점 혹은 선으로 시작해 하얀 캔버스 위를 빠짐없이 덮어나가는`채움`의 미학을 바탕으로 하는 서양화에 비해 문인화는 여백의 미를 강조하는 비움의 미학으로 하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내면속의 현대적 감각을 바탕으로 생동감 넘치며 맑고 끈끈한 필력으로 먹색과 채색의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나는 자연을 동경하고 연구하는 작가이다. 계절마다 나타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태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관찰하며 한국적인 정서와 서정적인 모습들을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전통 문인화에서부터 현대 문인화까지 두루 섭렵한 나는 문인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려 노력하고 있다. 화려하고 세련미가 넘치는 나의 작품들은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자연을 해석하고 자연이 갖는 미를 표현하는 조형적, 예
디지털 붓을 들어 아날로그 세상을 함께 나누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내 작업에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타협 없는 직선이 만들어 낸 사각형의 틀속에 나를 가두고 있었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가 망각된 채 강조되는 효율성, 그것은 결국 나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작업의 적자(適子)가 아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했던 것일까? 매일 목적에 의한 짓과 씨름해 오다가 우리의 자연과 전통문화에 주목하게 되었다. 무심스럽고 어리숭한 선, 비균형적 형, 조촐한 멋 무목적의 곡선들과 무채색, 그리고 무심한 필획(筆劃). 거기에는 고귀한 단순성과 위대한 고요함이 깃들어 있었다. 따뜻함과 평안함에 매료되었다. 이제 디지털 붓을 들어 아날로그 세상을 함께 나누고 싶다. 나는 내달 말까지 청도군 각북
남성이 가질 수 있는 여성에 대한 생각은 실제적으로 다가서는 모습과 또는 환상, 기억 등의 아름다운 화폭의 한 장면 다가오기도하며 다양한 형태의 느낌으로 그 남성에게 다가선다. 나는 이런여성들의 모습에 실제가 아닌 남성 또는 여성 스스로가 원하는, 바라는 모습들을 화폭에 나타내고 싶다. 그럼에 나의 화폭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앞이 아닌 뒷모습 내지 옆을 나타내고 있는데 직접적인 여성이 아닌 환영, 환상으로 나타나는 여성이며 이것은 그림을 보는 관객들의 기억을 더듬어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원해지는 모습으로 관객의 시각을 통해 다른 오감을 되살린다. 그러한 감성은 내 옆의 누군가 일수도 있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누군가 일수도 있다. 이런 상상에 의한 여성은 단순한 이성이 아닌 미
나는 자연의 일상 속에서 지나쳐 버리는 순간에 이입되면서 감정이 극대화된 어떤 근원을 포착하려고 한다, 우리들의 눈은 표면을 통해 정신의 영역으로 잠입하고 그림에서의 평범한듯한 풍경은 우리를 낯선곳으로 데려간다 회화에 나타나는 이미지는 사실적일수도 있지만 그이미지에 내제한 상징적,추상적 의미가 나를 항상 붙들고 있다. 통속적인 사람들의 의미속에서 `섬`이라는 이야기로 사람들마다 각자의 섬이 있고,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섬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나는 평범한 일상의 즐거움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세상의 낯설음, 세상과의 관계, 그속에서의 사람들, 사람들 간의 섬에 관한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좀 더 관조적이고,시적인 느낌으로, 또는 은유적이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다
현대 사회에서 공예는 흔히 이용되는 식기, 다기, 예술작품 이외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실용성이 강조되기는 하지만 미학적 가치 또한 중요시된다. 이는 건축 등 일상 생활환경에도 반영돼 나날이 다채롭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대한 욕구가 커져가는 현대인들에게 도자공예는 적격인 인테리어 아이템이라 할 수 있다. 나는 23일부터 28일까지 대구 대백프라자갤러리에서 두번째 개인전을 연다. 지난 2007년 석사학위 청구를 위한 첫 번째 개인전에서 밧줄의 형태를 이용해 다양한 관계의 양상들과 그것을 통한 타인과의 정신적 소통, 발전의 이미지를 표현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첫 번째 개인전에서 보여준 작품들은 궁극적으로 매체와 매체간의 결합과 오브제를 통한 주제의 현대적인 표현 영역의 모색이었다면 두 번째 개인전
◆서양화가 양정원 언제부턴가 꽃시장을 둘러 볼라치면 우선 그것들이 주는 시각적 감동보다 입구가득 향긋한 꽃향기가 민감하지 못한 후각을 자극한다. 이런 기분좋은 감각들은 세필로 따박따박, 눈을 찡그려가며 이젤 앞에 수도없이 왔다갔다하는 노동마저 잠시 잊게 하는데…. 장미라는 아니 꽃이라는 소재를 통해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보여져야 할까? 시간의 유한성에 내재된 아름다움의 순간표출이라는 거창한 말보다는 지금의 작업은 그나마 생화라는 말 뒤에 겨우 목숨을 담보로 잠시 피어있는 것들을 담담히 그려보는 것이다. 미술이라는 폭넓은 테두리속에 현대미술에 비해 진부하다고 느껴지는 평면회화에 국한된 구상작업을 선택했다. 결국 빛과 색이라는 단순하면서 절대 호락하게 다룰 수
최근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나의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얼굴은 단순히 소재적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그림 속 얼굴은 모든 것을 스스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개인의 삶뿐 아니라 시대상까지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인간에게 있어 얼굴은 `영혼의 통로`라는 비유처럼 그의 인물화는 삶의 풍경들을 담고 있으며 사회적 메타포(metaphor)를 나타내려 한다. 얼굴은 “지구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표면(surface)”이라고 말했던 프랑스 현상학자 프랑시스 자크(Francis Jacque)의 지적처럼 얼굴은 다양한 사회적 텍스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몸은 인간 영혼의 최고의 그림이며, 얼굴은 몸의 영혼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 또한 인간의 얼굴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되짚어 보게 해 준다.
◆한국화가 김애숙 2일부터 11일까지 경주 갤러리 라우에서`이미지의 형상화`를 주제로 개인전을 열고 있다. 나는 그동안 현대인들의 단절된 삶에 주목해 왔다. 현대인들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개인적인 일에 바빠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단절돼 있다. 이처럼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어 무관심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담았다. 상념, 사랑, 눈물, 기쁨, 등의 제목의 작품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자신의 감정과 타인의 생각에 대해 되돌아 볼 수 있도록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이번 작업은 특별했다, 동료들과 작업시간을 통해 서로 대화하면서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기회가 됐으며 그러한 감정들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한층 더 현실감 있으면서도 생동감 있는 작품으로 완성 됐다.
참새는 도심이나, 숲속 혹은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그 무리를 흔히 접하고 있는 대상물이며, 참새를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한 것을 의인법적 관계로 접근 하려고 했다. 인간 내면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은 삶의 연속적 유기체적인 관계로 희로애락을 접하면서 삶을 지탱해 왔으며, Aleksandr의 사라지거나 지나가 버린 것이 그리움이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 이처럼 삶이란 수많은 여정과정 속에서 삶의 유기체적 관계로 서로가 살아가며, 단순한 조류의 삶 모습 속에서 그들의 관계에서도 서로의 유기체적인 관계를 엿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모습에서 자연에 대한 동경이나 우리들의 감성을 비유 혹은 동경 해가며 삶의 여정을 이어가지는 않을까? 우리들의 가장 근본적인 내면은 어쩜 서정성과 동경이라는 것을 항상 지니
도예가는 흙을 사랑하고 흙과의 실험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생산해내는 산고의 고통을 치르는 이들이다. 나는 그동안 4번의 개인전을 통해 형태적 조형성의 질 작업에서 도예의 기본인 형태와 번조, 유약처리, 질의 활용방법과 제조 공정을 연구를 했다. 이러한 미적 범주 속 심미의 깊이를 나름대로 새롭게 결합시켜 구조적 현상성과 질의 가소성 활용을 통해 형태를 만들고 변형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결합과 자유로운 변화로 역동성 있는 미적조형을 표현한다. 내 작품은 거친 듯, 부드러운 듯 다양한 느낌을 주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불의 심판을 거친 흙은 때론 웃고 있고 때론 울고 있다. 흙과 함께 한 지 삼십 년이 다 된 나는 그 속에 `삶`을 본다. 긴 시간 인내하고, 번뇌를 곱씹으며 더 많이 웃을
나의 작품세계를 굳이 정의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빛과 공간`의 어우러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선택하는 소재는 모과 열매나 목련 등 다분히 평범한 사물이다. 그래서 결국 관객들은 나의 작품 역시 자연물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요즈음의 트렌드에 속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작품을 좀 더 깊이 있게 관찰해보면 결코 묘사주의에만 집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미술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빛과 공간성, 그리고 회화적 표면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까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빛은 매우 소박하고 사색적인 빛이다. `향기가득` 또는 `하늘보기` 등 작품 제목이 암시하듯이, 나는 빛을 통해 향기를 맡고 빛을 통해 하늘을 본다. 나는
나의 `Draw-Crevice 틈을 그리다`는 종이의 집적과 그것을 방해하는 또 다른 종이의 개입이 만들어 내는 사소한 틈의 존재를 이미지 드러내기를 통한 시각화를 시도한다. 종이의 날을 수없이 겹쳐서 만든 화면과 그 사이사이를 높이가 다른 종이를 끼워 넣어 틈을 만든다. 종이날을 차곡차곡 쌓아 만들어진 화면위로는 아래 이미지들을 가리는 동시에 드러내며 이미지의 은유와 왜곡을 만들어 낸다. 틈을 통해 보여지는 이미지들로 작가에게 있어서의 틈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작업을 들여다보면 서로 높이가 다른 종이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끼워 넣어 틈에 대한 추상적 형상을 공간적·시각적 현실로 끄집어낸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틈에 대한 관념적 형태는 그러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현실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
작품 속에서 흰색의 선(線)들은 곧 빛이다. 빛은 생성과 소멸 그리고 해체를 반복하면서 사물의 표면 전체에 머물러 있다. 해체된 빛들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어지기도 하며 특히 명암이나 재질마저도 해체시킨 표면효과는 모호성을 더욱 가중시킨다. 결과적으로 차가운 유리 같기도 하고 스테인리스(stainless steel)의 금속성 같기도 한 정물들은 철저한 허구이면서 감상자를 엉뚱한 곳으로 끌어들이게 한다. 예술은 주체적인 개물(個物)을 통해 보편적인 표현을 하고자 하는 기술인 동시에 지적 활동이다. 예술가는 보편적인 것을 직관해 그것을 종이·그림물감·돌·소리·기호 따위 물질적 재료에 의해 표현하고, 이것을 관상자(觀賞者)에게 직관시키고자 한다. 예술작품으로부터 관상자가 향수(享
작업실 공간은 항상 심장을 뛰게 하고, 긴장감을 준다. 익숙해진 붓질이 내 의지를 떠날 때 자연스런 표현이 화면에 담겨 진다. 항아리, 그릇 등 담을 수 있는 소재를 통해 작품을 풀어 간지 몇 년이 지났다. 나는 비워진 옛 그릇에서 채움을 보고, 다시 채우기 위해 비워 버리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느껴본다. 물질의 채움은 한정된 시간 속에 존재한다. 이 시간의 반복이 지속되면서 어느 순간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비워진 공간에 가득히 채워져 있는 우리의 삶 이야기를 보게 된다. 그 이야기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커다란 행복의 순간까지 고스란히 녹아 채워져 있다. 이런 채움을 내 화면에 쏟아 붓고, 채움과 비움의 황금비율을 찾기 위해 오늘도 나의 붓질은 계속된다. ♠ 서양화
그림 그린다는 것, 그래 나에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의식의 나, 나를 표출하는 작업이다. 해서 그림을 그리면서 고단한 마음 쉬어가고 상처받은 마음도 치유하고 지우고 싶지않은 아름다운 기억들을 담아본다. 삶의 굴레에서 자의든 타의든 열심히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잠시 돌아보고 쉬어간다. 모든 것을 놓고 그저 평안히, 작게 흔들리는 풀잎들, 그사이에 곱게 피어나는 꽃들이 주는 즐거움, 행복감. 커다란 나무아래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싣고 자연이 주는 휴식과 향취에 흠뻑 젖어 본다. 이 순간 마음은 가장 깨끗하고 순수하며 흔들림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살짝 벗어난 가장 처연한 상태 자연이 주는 선물에 감사할 따름이다. 나의 그림에 가끔 등장하는 검둥이는 홀로아닌 함께이고 싶음이다. 머리쓰지 않아도
어느덧 완연한 봄이다. 도무지 올 것 같지 않던 봄이 너무 반가워 내 작업실 창가에 둘 꽃화분 몇 개를 샀다. 작업실 창문을 열고 꽃에 물을 주다 보니 환한 햇살이 나를 반긴다. 나는 `꽃`을 그리는 화가다. 그 아름다움이 내 마음을 끌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꽃의 일생이라 생각된다. 봄 한 철 꽃을 피우기 위해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날씨가 따뜻해지자마자 온 생을 걸어 꽃을 피워 올리는 그 짧지만 아름다운 생. 나의 삶 역시 꽃을 닮아가려는 과정의 연속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올 봄에 나는 개인전을 열어 캔버스 위에 꽃을 피워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내 그림을 감상하며 행복해했다. 돌이켜보면 거의 봄에 개인전을 열었는 것 같다. 봄은 내가 꽃을 피우는 계절이기도 한 것이다.
누구나 순간의 찰라에서 만질 순 없지만 감지할 수는 있었던 그 불편한 무엇이 있을 것이다. 나는 유독 이상하게도 그 불편한 무엇이 무언으로도 형용될 수 없을 때면 날카롭게 팽창되어가는 답답함에 알 수 없는 묘한 감질 맛을 느꼈다. 그런데 작업이란 그랬다. 나의 기만일지도 모르는 이 방식들이 영원한 비밀일 수도 혹은 자위적인 감동의 봇물처럼 쉽사리 터질 수도 있을법한 그것들을 유연하게 의식하게하고 자각하게 만들었다. 내가 작업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사사로움 앞에 억지식의 눈돌림으로 감추었던 누구에게나 필연적이고 개연성있는 무언들의 비겁하고 어리석은 순간들의 `화`나 `회의심`의 배설물들을 달콤한 해악적인 시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타나는 모순된
내 조형의 화두는 축제다. 축제는 열정과 자유로움과 분방함과 아름다움이 한데 엉켜 환희가 샘솟는 현장이다. 그것은 이제껏 살아온 나의 삶의 궤적과 뜻을 같이 한다. 순수하고 고운 나의 심성처럼 밝은 자유로움으로 생의 길을 걸어왔듯이 일상이 축제이기를 그는 소망 하는 것이다. 내 작업은 자연주의에 속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을 단순한 자연주의에 넣을수 없는 것은 대상을 시경화하는 것이 아닌, 마음의 시각을 형상화 해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의 그림은 단순하게 꽃을 잘그리고자 하는게 아니라 꽃이라는 표현 대상을 통하여 삶과 만남의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의 꽃은 한 송이 외롭게 그려진 것들이 없다. 여러 개의 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큰 송이를 이루고 있다. 그것이 암시하는 바는 더불어
화이트라는 추상적 공간에의 감은 사실적 재현을 넘어 감성의 표현이다. 감이라는 회화적 이미지를 통해 그 그리움을 얘기하고 싶다. 어떤 날은 막연한 그리움을 어떤 날은 하얀 그리움을 그리고 또 어떤 날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그 영원한 그리움을…. 어떤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한 그 간절한 그리움을 나는 그린다, 그린다. `화중유시 시중유화(畵中有詩 詩中有畵)`는 왕유의 그림을 보고 소동파가 평한 글 이다. 우리는 서정적인 시를 읽으며 한폭의 수채화를 떠올리곤 한다. 그렇듯이 좋은 그림을 보며 한편의 시를 쓰기도하고 씌여진 시 한 소절 읊조리기도 한다. 내 그림 앞에서 그리움의 시 한소절 읊조릴 수 있는 여유, 굳이 그리움이 아니더라도 잠시 머물러 쉬어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순수 염색 작품인 Batik 작품을 디지털 방식으로 Lee Design 하여 넥타이, 스카프를 Silk 소재로 제작해 고급스럽고, 소비자의 Life Style에 Plus가 되는 작품들이다.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자연을 염색이라는 기법으로 표현한 지 30년 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그 다음은 오기로 이제는 한가하게 즐김으로…. 점으로 흔적을 많이 남겼다. 점을 나보다 많이 찍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것도 파라핀으로. 그 파라핀 점들이 디지털과의 만남으로 인해 생활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액자 속에서 벽을 장식만 할 작품들이 넥타이가 되고 스카프가 되어 우리들의 일부분이 된다. 그것도 귀하게, 독특하게 명품스럽게. 30년전부터 작업해 온던 것들이 상자에 가득 보관되어 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