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변덕스러움은 짐작하기 어렵다. 곡우(穀雨)이자 혁명일이었던 4월 19일, 반팔과 반바지 차림의 청춘들이 길을 메우고, 하늘엔 옅은 황사가 찾아들었다. 창문 열고 질주하는 차량 행렬에서 가까이 다가온 여름 냄새가 짙어진다. 가슴과 등판을 서서히 적셔오는 땀방울이 교정(校庭)에 환하게 피어난 이팝나무 꽃망울과 엇박자로 교차한다.오후 7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다가오는 황혼이 하루해를 아득한 지평선 너머로 내보낸다. 거기서도 최소 30분 이상 기다려야 까만 어둠이 지상에 깔리기 시작하고, 옅은 어둠은 조금씩 짙어져 마침내 대기가 깊은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이 있다. 유구하되 무상(無常)한 것이 자연이니 10년 세월에 변화가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요즘처럼 과학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대에 10년은 참으로 장구(長久)한 세월처럼 느껴진다. 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이 불러온 변화를 생각할라치면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경천동지도 유만부동 아닌가?!내일이면 2024년 4월 16일이다. 그렇다! ‘세월호 대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많은 사람은 잊고 살아왔겠으나, 참사의 희생양이 된 가족을 둔 분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특히 단원고교 2
이탈리아의 철학자 움베르토 에코와 리카르도 페드리가의 편저(編著)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 첫머리에 기억할 만한 구절이 나온다. 철학은 과학이 답하지 못하는 질문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그 하나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 가능한 명제이기에 논외로 한다. 그 둘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출발한다. “그리스인들의 철학은 경이로움에 대한 반응에서 비롯한다.”경이로움에서 시작한 고전 그리스 철학이 오늘날 서양철학의 기초가 되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은 무척 흥미롭다. 경이(驚異)로움은 놀랍고 낯설며 비일상적이고 신이(新異)하며 익숙하지
하루가 다르게 태양이 일찍 떠올라 창천에서 오래 빛난다. 아침 여섯 시 무렵 동창은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고, 저녁 일곱 시가 지나야 사방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생명의 환희와 약동(躍動)이 찬란하게 작동하는 눈부신 시절이다. 이런 날이 이어지면 누구나 들뜨고 조금은 흥분되기 마련이다. 접촉사고에 조심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반면에 봄날은 아주 변덕스러워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이를테면 지난 목요일 내가 사는 고장 청도에는 온종일 비가 뿌렸다. 아침나절부터 오기 시작한 비가 한밤중까지 그칠 줄 모르는 것이다. 결국 그날
청도가 자랑하는 시조 시인 이호우(1912∼1979)와 이영도(1916∼1976)는 남매 사이다. 몇 년 전 여름 그들의 생가를 찾았다가 모기와 각다귀 패거리에 쫓기다시피 한 처참한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요즘 그분들 생가를 복원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처음 생가를 찾았을 당시엔 청도 군정(郡政)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약간의 인연만으로 문학관을 짓는 비용과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 지자체와 너무도 비교되는 나른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일례로 구상 시인은 서울에서 출생했으나, 본적이 칠곡군 왜관읍이고, 그
20대 창창한 시절엔 여름이 제일 좋았다. 청년 시절 누구나 그렇듯 관념론에 빠져 있던 터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있는 ‘부패는 만상의 본질’이란 구절에 마음을 뺏긴 까닭이다. 열렬한 속도로 생장하는 것도 있지만, 그만큼의 빠르기로 부패와 소멸이 진행되는 계절이 여름인 까닭이다. 양극단의 두 얼굴의 계절, 여름을 찬양하라!중년에 접어들자 겨울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한여름의 눅진한 습기와 극복 불가능한 열기, 그것들이 자아내는 무기력과 타락의 분위기가 현저히 역겨워진 것이다. 그러나 겨울은 어떤가?! 피부를 뚫고
살아가면서 우리는 만남과 별리(別離)를 경험한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중대한 일대사(一大事)다. 불가(佛家)에서는 그것을 인연생(因緣生) 인연멸(因緣滅)로 명쾌하게 풀이한다. 인연이 생겨나면 만나는 것이요,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는 것이다. 고로 만남과 헤어짐에 특별한 의미와 희로애락을 부여할 까닭도 없는 셈이다.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의 장편소설 ‘죄와 벌’(1866)에 등장하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은둔 생활자 혹은 러시아판 ‘히키코모리’다. 돈 때문에 휴학생으로 지내
달포 전에 이장님이 전화한다.“김 교수, 집에 땔나무 충분한가?!”몇 차례 구들방에 불을 넣으면 나무는 바닥이었다. 어차피 겨울도 끝나가는데, 대충 넘어가야겠네, 하던 참에 걸려온 반가운 전화였다. 엔진 톱 가진 이가 산에 널브러진 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주기로 했다면서 환하게 웃는 목소리로 전화는 끊겼다.날이 가고 달이 바뀌어도 어찌 된 영문인지 소식은 없다. 답답한 마음에 내가 전화한다. 톱 임자가 과수원 전지(剪枝)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조만간 그이를 만나 일정을 잡아보리라는 언질을 얻을 수 있었던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대표적인 묘비명 주인공은 필시 니코스 카잔차키스일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그의 고향 크레타섬에 시멘트 묘지와 나무 십자가로 수수하게 꾸민 무덤의 묘비명은 그야말로 비상하기 짝이 없다. 자유를 향한 그의 등정에 걸림돌은 바람과 공포였다.죽기 직전까지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바라고, 무엇인가를 두려워한다.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두려워하고 바라는 대상은 천차만별이겠으되, 카잔차키스는 그 둘을 훌훌 뛰어넘는다.
봄기운이 완연하다. 경북대의 성질 급한 홍매와 백매(白梅)가 환하게 세상과 만나고 있다. 화양(華陽) 들판 마당에도 영춘화(迎春花) 노란색이 화사하다 못해 화려하다. 춘하추동 사계 가운데 유독 봄이 기다려지는 것은 분명 까닭이 있는 셈이다. 대상을 본다는 행위, 즉 봄은 우리를 전연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정령인지도 모른다. 하되, 무엇을 본다는 말인가?!저녁 산보(散步) 나갔다가 천상에서 세 대의 비행기가 삼각 편대를 이루고 남쪽 창녕으로 날고 있음을 본다. 드문 현상이기에 더욱 아름답고 새삼스러운 장면으로 남는다. 그럴 즈음, 남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며 반전 반핵을 앞장서 주창하고 실천한 행동파 지식인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의 ‘종교와 과학’(1935)을 읽노라면 흥미로운 사실에 이르게 된다.호모사피엔스라 불리는 인류가 맨 처음 주목한 대상이 별이라는 것이다. 칠흑처럼 아득한 밤하늘에 홀로 애처롭게 빛나는 별을 바라본 인간이라니!까마득한 옛날, 밤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갔고, 가야만 했던 고대인(古代人)을 부러워했던 게오르크 루카치(1885∼1971)의 ‘소설의 이론’(1920)에서 별은 얼마나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그려졌던가! 가혹한 생존 조
‘반야심경’을 이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첫 번째 문장인 것 같다.“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깊게 행하실 때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함을 밝게 깨우치시어 모든 고액(苦厄)을 뛰어넘으셨다.”여기서 ‘오온’이라 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다섯 가지를 일컫는다. 대상을 보고,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판단하는 다섯 가지가 오온이다. 이 문장을 통찰할 수 있다면, 이후의 모든 내용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오온이 어째서 모두 공한지,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첫 문장이
오고 가는 것이 인생사 필연의 불가피한 과업이라 하지만, 심성이 여린 사람에게 이것은 극한의 과제일 수 있다.어느 시인은 나에게 오는 사람은 그 하나가 아니라, 온 우주가 온다고 기막히게 노래했지만, 그것은 축복일 경우에 한한다. 내게 오는 그나 그녀는 축복이기도 하지만, 재앙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이기에 그러하다!“가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 (去者不追 來者不拒)”는 옛말이 있다.멋진 말이다. 하지만 이것을 실천할 사람은 많지 않다.떠나려는 사람은 한사코 막고자 하고, 마음에 없는 사람
20대 청춘일 때 시인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리되지 못했다. 세월이 더 흐른 다음에는 혁명가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그 또한 헛된 망상이 되고 말았다. 시인과 혁명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어휘인가?! 그래서 이육사 시인을 무척 좋아하는 것이다. 시인이되 혁명가였던 이원록(1904∼1944)을 어찌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언젠가 안동에 있는 이육사 문학관을 찾은 일이 있었다. 대구 동부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이육사 시인의 생애와 문학을 조명하는 것이었다. 어쩌다 그 일을 맡
연말연시를 맞으면 찾아오는 생각이 있다.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에 관한 상념이다. 연초에는 누구나 야심 있게 몇 가지 기획을 구상한다. 건강과 부 혹은 명예를 향한 갈망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불태우는 것이다.‘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는 허망한 생각이지만, 기획안을 구상할 때 우리는 웅대한 기획자로 거듭나는 순간을 경험한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혹자는 신년 기획을 아예 일정표에서 제외해버린다. 훗날 찾아드는 허망함과 무기력증을 원천봉쇄하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아쉬운 점이 많다는 게 나의 소감이다. 인
사노라면 뜻밖의 행운이 찾아들 때가 종종 있다. 그것을 가리켜 ‘망외(望外)의 소득’이라 한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굴러들어온 행운이라고나 할까!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 덕분에 나도 청춘들처럼 유튜브와 친해지고 있다. 양자역학과 천문학 같은 자연과학 분야와 영성(靈性)과 관련된 영상 그리고 인문학이 나를 끌어당긴다.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하다가 문득 귓전을 때리며 지나가는 구절이 있다. “그는 동그란 구멍과 맞지 않는 네모난 나사못 같은 사람이었다.” 19세기 말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만연한 천편일률적인 사회 분위기를 ‘동그란
겨울인데 한낮 기온이 18℃까지 올라간다. 이래도 괜찮은가, 생각하며 커피나무를 마당에 내놓고 화분에 흙을 북돋우고 한껏 물을 준다. 일주일 내내 거실에 있어서 답답하기도 한 것처럼 너른 이파리를 한껏 흔들어댄다. 커피나무는 그나마 운이 좋아 잠시나마 밖에서 외기(外氣)와 만나는 행운을 누리지만, 거대한 덩치의 길상천은 꼼짝할 수 없다. 남들보다 크고 무겁다는 게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닌 셈이다.얼마간 미뤄둔 마당 정리를 마치고 훌훌 들로 나선다. 어느새 다가온 해거름이어서 멀리 서녘으로 길지 않은 겨울 해가 꼴깍, 소리 내고 사라
얼마 전에 유쾌하기도 하고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내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이 ‘변리사(辨理士) 시험’에 합격했다는 글을 보내왔다. 참 잘 됐구나, 생각하면서 학생에게 답신을 보냈다. 12월 초부터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 학생의 졸업을 막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이 골자다. 더욱이 1년에 고작 200명 선발하는 어려운 시험에 붙었다는 말에 나 역시 힘이 솟고 기분도 좋아지는 것이다. ‘경북대 파이팅!’ 하고 속삭인다.나는 그에게 변리사와 변리사 시험에 관해 10분 정도 후배들에게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백면서생(白面書
‘자유(自由)’를 말할 때 나는 한자(漢字)를 가지고 먼저 생각한다. 자유는 스스로 말미암는다는 말이다. 말미암는다는 것은 원인 제공자가 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자유란 나로 인해 생겨나는 온갖 사건과 인연의 원인과 결과를 스스로 감당한다는 말을 뜻한다. 남에게 구속되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사전적인 의미의 자유는 좁고 단순하다. 그것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를 통찰하고 싶은 것이다.‘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의 말을 빌려서 자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원하는 만큼 처넣는다는 것이다. 어린
며칠 전에 울산에 사는 친구가 단톡방에 낯선 식물 사진을 올린다. 단톡방 참가자들은 서울과 청도 그리고 울산에 산다. 궁금한 두 사람이 ‘뭐야?’ 했더니 ‘길상천’이란 답변이 돌아온다. 길상천이란 글자를 보자마자 내 머릿속에는 청송(靑松) 인근의 ‘길안천(吉安川)’이 떠오른다. 언젠가 청송에 살던 선배 교수를 찾았다가 만난 길안천이 기억난 것이다. 그래서 ‘청송’ 부근에 갔는지 물었더니, 친구에게는 대꾸가 없다.나와 서울에 사는 친구는 길상천이 당연히 어디 ‘지명(地名)’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꽤 늦게 돌아온 답변은 ‘용설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