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와 신명이 넘치는 사람’.포항제철공고 김명훈(58·사진) 동창회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든 생각이다. 덩치는 크지 않지만 김 회장의 목소리와 행동에서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느껴졌다. 당당하게 세상에 맞서온 이들에게서 보이는 특징일 터.중학교 때까지는 고향인 충청북도 제천에서, 고교 시절과 사회 초년생 시절은 경상북도 포항에서, 20대 중반부터는 전라남도 광양에서, 50대를 넘어서면서는 광양과 포항을 무시로 오가며 살고 있는 김명훈 회장.그는 잘라 말한다. “어디서건 지역감정 같은 걸 느껴본 적이 없다. 자신이 발 딛고 선 곳
운동선수에게 올림픽 출전이란 개인적 영광인 동시에 자신이 살아온 국가의 이름을 드높이는 의미 있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선수들이 각자의 종목에서 ‘올림픽 출전’이란 목표를 가지고 오랜 세월 피땀을 흘린다.여기 안타깝게 올림픽 출전이 좌절된 유도인이 있다. 현재 경북체육회 유도팀을 맡아 지도하고 있는 김정훈(43) 감독.김 감독은 현역 시절인 2004년과 2008년 아테네올림픽과 베이징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섰다. 하지만, 결과는 아쉽게도 두 번 모두 2위. 한 국가에서 단 한 사람만 출전할 수 있는 올림픽 무대에 서지 못했다.그
‘2030 세계박람회’ 개최지 결정이 6개월도 남지 않았다. 세계박람회(EXPO)는 인류의 산업·과학기술의 발전 성과를 알리고, 개최국의 역량을 과시하는 장으로 경제·문화올림픽으로도 불리는 국제적인 행사다.우리나라는 현재 이 세계박람회의 부산 유치를 위해 각계각층에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행사 개최가 가져올 긍정적인 경제 파급효과를 염두에 둔 주요 기업의 총수들은 물론, 정치권과 문화예술계에서도 힘을 보태고 있는 형국.여기에 한국의 국기(國技)인 태권도를 통해 세계박람회의 부산 유치를 염원하는 이들도 가세했다. 그 중심에 국기원
“포항시민 전체가 두 번씩 먹을 양은 팔았을 걸요.”대체 이처럼 크게 히트 친 상품이 뭘까? 궁금증이 일어날 만하다. 한스드림베이커리 한상백(52) 대표가 만든 갈릭바게트(바게트 사이에 마늘 소스를 넣은 빵)의 인기는 예나 지금이나 대단하다.포항의 인구를 50만 명으로 잡으면 지금까지 대략 100만 개의 갈릭바게트를 만들어 판매했다는 이야기 아닌가. “빵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 말하는 한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꿈과 스케일이 남들보다 컸던 사람.교육자였던 아버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10년째 병상에 누워있던 1980년대 후반. 기울어진
최근 ‘독특한’ 책 한 권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작품집에 수록된 8편의 소설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포항을 소재로 삼고 있는 ‘어룡이 놀던 자리’. 이는 전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일종의 ‘사건’처럼 느껴졌다.책을 펴들었다. 소재는 ‘포항’으로 단일하지만, 수록된 개별 작품에서 읽히는 메시지는 각기 달랐다.‘디어 마이 엉클’에서는 한국전쟁이 야기한 비극의 그림자가, ‘관목(貫目)’에선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의 아들이 겪는 정체성 혼란이, ‘불꽃 지다’로 가면 비루한 상황에서도 놓칠 수 없는 인간의 순정한 마음이 기자의 눈앞으로 성큼
견인불발(堅忍不拔)과 기호지세(騎虎之勢).여성 사업가를 지칭하는 단어로 적절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농업회사 하이청 박해성(57) 대표를 만나며 떠올린 이 두 사자성어(四字成語)는 예기치 않은 불행과 그 불행을 넘어서려는 그녀의 노력을 가장 간명하게 표현한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서울에서 태어나 별다른 부침(浮沈) 없이 살아온 박 대표는 20대 후반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남편의 치료를 위해 경상북도를 처음으로 찾았다. 일정 기간이 지나자 부군의 병이 호전되는가 싶었는데, 또 다른 고난이 박 대표를 찾아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화학 회사에 다니던 30대 초중반 청년 셋이 의기투합 사업을 시작했다. 막걸리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다. 비즈니스의 시작은 비참함(?)에 가까웠다.대형 마트를 찾아가 “저희가 만든 술입니다. 여기서 판매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부탁하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막걸리를 가져와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바쁘니까 나가주세요”라며 문전박대 당한 것만 수십 차례.그로부터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상황은 180도 변했다. 홀대 받던 청년들의 막걸리는 모내기와 벼 베기로 바쁜 농번기엔 하루 6천 병이 팔린다. 연매출 12
“초등학교 때 처음 서예를 시작했고, 이후 차례차례 단계를 밟아 캘리그라피에 이르렀다.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글씨에 대한 애정을 간직해, 꾸준히 성실하게 노력한 작가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고 싶다.”캘리그라퍼 이현정(40)씨는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 하지만,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는 누구보다 당당해 보였다.예술가 혹은, 작가로서 바람직한 태도다. 모든 문화·예술적 작업은 스스로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되는 법이니까.이 작가는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을 졸라 서예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글씨’에
먼저 흥미로운 질문 하나. 다음에 열거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김상국 전 세종대 체육학과 교수, 이치호 전 건국대 축산식품생명공학과 교수, 곽병휴 전 경성대 글로컬문화학부 교수, 정두환 경주대 관광외국어학부 교수.하나로 묶이지 않는 다양한 학문을 공부했고, 서울과 부산, 경주까지 각자 다른 지역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이력이 있는 이 4명의 학자 모두는 1950년대 초중반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함께 보냈다.당시엔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 고현1리, 현재는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고현1리로 불리는 곳이 바로 이들의 고향.청
새벽 4시에 홀로 카메라를 들고 구미 원평동 재개발 지역에 들어섰다. 한 번 사라지면 다시는 옛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는 풍경을 사진 속에 담아 사라지지 않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런 ‘예술적 필요성’을 건설사 관계자와 경비원들에게 이해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철거와 신축이 계속되는 도시의 재개발 현장은 곳곳에 CCTV가 설치돼 있다. 안전을 위한 감시와 예기치 않은 사고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다.오래전부터 원평동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진행 중인 사진작가 김은정씨가 카메라를 들어 딱 한 번 셔터
어느 지역이건 그 도시를 떠올리면 동시에 연상 작용으로 이어지는 음식 하나쯤은 있다.흑산도는 홍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독특한 발효법으로 숙성시킨 ‘삭힌 홍어’는 이제 호남만이 아닌 전국의 미식가들을 유혹하고 있다. 경기도 이천은 좋은 쌀로 기억되는 고장이다. 잘 차려낸 ‘이천 쌀밥’ 한 상은 관광객들의 미소를 불러낸다.포항이라고 흑산도 홍어와 이천 쌀밥처럼 지역을 대표하는 특별한 먹을거리가 없을까. 당연지사 있다. 겨울철에 한국인이 맛보는 과메기의 8할은 포항 구룡포 일대에서 만들어진다.적절하게 건조된 꽁치를 미역과 김,
몇몇 사람들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고향이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한다.현대도시는 태어나고 자란 공간에 대한 기억을 흐리게 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인간의 유소년 시절 ‘기억’과 ‘그리움’은 대부분 고향과 연관돼 있다. 이는 동서와 고금이 다르지 않을 터.지지난해 시작해 최근까지 포항과 관련된 책 5권의 기획·출간에 깊숙이 관여한 사람이 있다. 이런저런 자리에서 ‘내 고향 포항’에 대한 애정을 무시로 드러내는 김도형(55)씨다.경희대 국문과에서
기자가 ‘게스트하우스(Guest house)’라고 불리는 숙박업소에서 처음 묵어본 건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였다. 2011년이다. 10개월쯤 아시아와 유럽의 20여 개 나라를 떠돌며 다양한 형태의 게스트하우스를 경험했다. 그 이전까진 여행을 떠나면 호텔 혹은, 모텔이나 여관에서 잠을 청하는 게 보통이었는데.태국 방콕의 조그만 게스트하우스. 노르웨이에서 왔다는 스무 살 청년은 맥주 한두 병이 준 취기에 신이 나서 당시 마흔 살이던 기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숙부와 조카뻘의 여행자가 그렇게 너나들이로 어울리는 모습은 한
‘눈빛과 표정이 티 없이 맑은 사람’. 포항 흥해에서 마을활동가로 일하는 김명준(49)씨를 처음 만났을 때 든 느낌이었다. 서른아홉에 포항으로 온 김씨는 현재 사회복지사와 마을활동가 역할을 병행하고 있다.마을활동가란 자신의 거주하는 공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곳의 미래 발전 방안을 고민하는 사람.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지향하며 구체적 개선 방식을 공부하고, 전파하고, 실행하는 게 마을활동가다.‘도시재생’도 마을활동가가 맡은 역할 중 하나.‘인구 증가와 산업기술 발달로 이미 만들어진 도시 환경이 그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돼
그간 취재를 위해 여러 차례 포항 꿈틀로를 찾았다. 그곳에선 적지 않은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고, 열정과 젊음을 바쳐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포항시 중앙동 옛 아카데미 극장과 중앙파출소 일대에선 지난 2016년부터 ‘문화도시 조성사업’이 진행됐고, 회화, 공예, 음악, 공연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 다수가 거기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이른바 꿈틀로의 탄생이었다.청포도 다방은 ‘꿈틀로의 문화사랑방’이라 불러도 무방한 곳이다. 2019년 봄부터 2년 동안 청도포 다방을 운영
여기 포항 흥해읍 너른 들판에서 신명나게 노래하며 춤추는 사람이 있다.10대 때부터 30대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우울증과 열등의식의 어두운 터널을 걸었던 그녀는 국악을 만나며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포항흥해농요보존회 박현미(57) 회장은 국악을 배우는 궁극적 목적이 뭐냐는 물음에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녀의 경우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이다.흥해읍은 옛날부터 논농사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모내기와 벼 베기 등 농사일의 힘겨움과 시름을 ‘노래 한 가락’으로 위로하던 우리 선조들. 그러나 1970년대
찰나의 순간을 영원의 기록으로 남기는 게 사진 아닐까? 고교 시절 빠져든 사진의 매력을 잊지 못해 회갑을 맞은 올해까지 사진과 함께 울고 웃어온 사람이 있다. 바로 사진작가 김훈 씨.그는 사진을 ‘또 하나의 언어’라고 말한다. 소설가가 소설이란 언어로, 화가가 그림이란 언어로 세상을 향해 발언한다면 사진가는 사진이란 언어로 대화하는 사람이라고 김훈은 믿고 있다.오는 30일 예천군청 갤러리에서 열릴 기획초대전 ‘관찰자의 독백’을 앞두고 있는 김훈을 지난주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날 그는 ‘사진’과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때로는 소탈하고 어느 순간엔 호방했다. 웃음이 선량해 보여서 더욱 좋았다. 신라문화원 진병길(57) 원장은 숨김이 없는 사람으로 느껴졌다.30년 가까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와서일까? 표정에 그늘이나 구김이 없는 소년 같았다.스물아홉 살 청년 진병길이 불교문화운동을 향한 꿈을 품고 몸담게 된 신라문화원. 이 단체는 경주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단순한 문화재 관람에 그치지 않고, 문화재 속에 숨어있는 가치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또한, 문화 콘텐츠 개발을 통해 경주가 한국의 대표 관광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아버지는 소금 산이다. 아버지의 삶은 소금과 같은 것이었다. 쓴맛, 신맛, 단맛을 더욱 더 돋우고 스스로는 짜디짠 존재가 되어야한다. 아버지의 일생은 아버지라는 단단한 고체에서 액체 상태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용해의 삶이었다. 그것이 아버지이며 아버지다움이다.’재론의 여지없이 잘 조탁된 좋은 문장이다. 군더더기가 없고 따뜻하다. 누가 썼을까? 처음엔 오랜 세월 작가로 활동해온 사람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의외였다. 위의 글귀를 쓴 사람은 문학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회사에서 33년 이상 근무하다가 최근에 정년퇴직한 차
담낭암, 대장암, 다섯 군데나 막힌 관상동맥…. 한 가지만으로도 쉽게 극복될 수 없는 심각한 병들이다. 6~7년 사이에 이어진 3번의 큰 수술. 경북교육포럼 이해우 대표의 중년은 생사가 걸린 ‘위기’, 그 자체였다.포항과 경주, 서울의 병원을 오가며 4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를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이 대표는 절망 속으로 숨거나 찾아온 병에 항복하지 않았다. 투병의 와중에도 박사 학위 논문을 썼고, 미국 대학의 객원교수로 가기 위해 열정을 쏟았다.이해우의 이력은 독특하다. 초등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모자란 시간을 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