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가방을 메고 나서는 게 일상이 된 사람에게 물음을 하나 던져본다. 그에게는 여행이 먼저일까 사진이 먼저일까.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기가 고스란히 시와 사진집으로 환원되는 사진작가 류형우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그를 만났다. 그는 길에서 찾은 길 위의 행복을 위해 세속적인 관계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의사였던 사람이 진료실을 나왔고, 예총 회장직도 단임으로 내려놓았고, 열의가 많아서 40여 개의 단체에 개입되어 있던 사회활동을 하나씩 접었다. 에너지가 고갈된 느낌이었다던가. ‘지진지퇴(知进知退)’라고, 일만 하다 죽고 싶지 않
아름다움에도 각도가 있다. 신천을 걷다 보면 물을 거슬러 오를 때와 물길을 따라 내려올 때의 느낌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물을 거슬러 오를 때는 돌과 풀을 헤치다 폭포에서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의 속살을 훤히 볼 수 있는데 반해서, 물길을 따라 내려올 때는 다만 물의 겉모습만 보게 되므로 거슬러 오를 때의 감흥을 그대로 느끼지 못한다. 영화를 보는 것도 그와 같다. 좋은 영화를 한눈에 알아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물길을 거슬러 오르듯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게 된다. 좋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것을 나는 물길을 거
이노센스의 일층 매장에서 천상두 디자이너를 만났다. 매장에서 얘기를 나누다 패션쇼 동영상을 보기 위해 이층 카페로 올라갔다. 가수를 알려면 노래를 들어봐야 하고, 화가를 알려면 그림을 봐야 하고, 디자이너의 진면목을 알려면 그가 만든 옷을 보는 게 가장 빠르다. 천 대표도 그런 예술의 속성을 알기 때문에 패션쇼를 보여주겠다고 했을 것이다. 물론 매장에 옷이 가득하지만 그냥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과 모델이 입은 옷은 차원이 다르니.밤이 되면 명망 있는 지인들이 모여들어 화려하게 부상할 공간이지만 낮이어서 카페에 불이 꺼져 있고, 긴
김민정 원장이 상자의 리본을 풀었다. 상자 속에 국화꽃 모양의 들깨타르트와 흑임자 다식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궁중 잔치 기록서에 의하면 다식에는 황률다식, 송화다식, 흑임자다식, 녹말다식, 강분다식, 계강다식, 청태다식, 신감초말다식 외에 오곡다식과 산약다식 등,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차에 곁들여 먹는 음식’이라는 뜻의 다식은 오색의 전통문양을 다식판으로 찍어내기도 하고, 김 원장처럼 손으로 정성껏 매만져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차를 마시며 국화꽃 모양의 흑임자다식을 먼저 맛보았다. 검정깨의 고소
조선시대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여유당전서 500여 권을 집필했다. 다산으로 하여금 유배지의 길고 긴 외로움과 고통을 견디며 집필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차(茶)였다. 다산이 살았던 초당 가까이에 백련사가 있었다. 그 백련사에 다산을 다도의 길로 인도한 혜장선사가 있었다. 두 사람은 차 동무가 되어 함께 차를 마시며 주역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혜장선사는 다산으로 하여금 길고 긴 유배의 외로움을 견디며 집필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팔공산 자락에 보이차를 연구하시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으며,태양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고,꽃은 자신을 위해 향기를 퍼뜨리지 않습니다.우리 모두는 서로를 돕기 위해 태어났습니다.인생은 당신이 행복할 때가 좋습니다.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안종수 대구광역시태권도협회장을 만나며 그 문장을 다시 한 번 음미했다. 안 회장은 드물게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 동안 인터뷰를 위해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과묵하다고 할까. 말을 끌어낼 수 있는 질문을 하라지만 판에
사방무인(四方無人)!그는 어둠의 벽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버리고 만오천 여점의 그림을 태우며. 그가 선택한 어둠은 태고의 고요인가 과학의 암전인가. 시간의 블랙홀을 연상케 하는 검은 캔버스 앞에서 일상의 분주함과 소음이 가라앉고 작가는 자기만의 세계에 깊이 침잠한다.자신이 왜 그림을 그리는지 생각해보았다. 멋있게 자기만의 그림을 그릴 자신이 있는데 겉돌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종이와 붓 한 자루, 까만색 물감 하나로 그림을 시작했다. 블랙 페이퍼의 시작이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물감도 없고
한국예술문화단체 경상북도 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병국 회장을 만났다. 안동미술협회 지부장과 경북미술협회 지회장, 경북예총 회장 3선으로 21년째 예술단체를 맡고 있으며 현재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부회장과 한국미술협회 수석 부이사장까지, 사회활동 경력이 화려하다. 경력의 화려함이 예술인에게 덕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잘 모르겠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사회단체의 협회장으로 20여 년을 보냈다는 건 그만큼 주변인들의 두둑한 신임을 얻었다는 말이 되겠다. 예술보다 단체 활동에 더 열심이었다고 오해받을 만하지만 작품 활동이 그런 오해
악수를 하려는데 작가의 손이 얼른 눈에 들어온다. 덩치에 비해서 작아 보이는 그 손이 지금껏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김 작가의 작품을 실물로 보기 전에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작품에 꼭꼭 숨겨져 있는 그림자와 실물의 관계를. 그 이해 못함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듯, 김 작가가 차에 싣고 온 작품을 직접 들고 왔다. 하얀 프레임에 담긴 작품을 직접 보게 될 줄 몰랐다. 인터뷰 한 꼭지를 위해 차에 작품까지 싣고 왔다는 사실이 작가를 다시 보게 했다. 작품을 직접 들고 온 것은 올해부터 작업하기 시작
상공회의소는 동대구역 부근을 지나칠 때면 문득 보게 되는 건물이다.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있을 것이 있다는 느낌 외에는 별다른 끌림이 없는 건물이라고 할까. 인터뷰가 아니면 영영 인연을 쌓을 일이 없을 것 같던 곳이기도 하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그런 이질적인 곳에 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연임하신 이재하 회장님을 만나러 갔다. 상공회의소 회장은 지역의 상공인은 물론이고 국내외적으로 지역의 경제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명함을 주고받는 것으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회장님께 기본적인 질
계명대 특임교수 이상길 전 대구행정부시장을 만났다. 대구의 정치행정을 오래 맡았던 사람을 만났으니 도시행정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했다. 그가 진심으로 대구를 걱정하는 사람인지, 다만 표가 필요한 기러기 정치인인지. 대구 토박이로서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대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사람이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지금 대구는 진정으로 지역을 걱정하고 대구의 역사와 시대정신에 밝은 안목을 가진 정치인을 필요로 하고 있다. 생전 대구에 얼씬도 않다가 투표할 때가 되면 나타나서 ‘보수’를 들
빛명상의 ‘그림찻방’에서 정광호 회장을 만났다. 정 회장은 명상을 말하기 전에 그림을 한 장 펼쳐놓았다. 눈 내리는 겨울밤에 아이들이 사랑채에 모여앉아 할머니의 얘기를 듣는 그림이었다. 쌀가루 같은 눈이 푸짐하게 쌓인 길목에 찹쌀떡 장수가 어깨에 목도를 메고 간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 기나긴 겨울밤에 ‘찹싸알~ 떠억~’ 하는 외침이 골목에 울려 퍼진다. 정 회장은 소싯적의 추억으로 아름다운 나눔을 떠올린다. 감나무집 광호가 찹쌀떡 장수를 부른다. 그 소리에 동네 아이들이 잠옷 바람으로 뛰어와 찹쌀떡으로 반짝 잔치를 벌인다. 나눔은
나무는 살아서 천 년을 살고 죽어서 또 천년을 산다. 살아서 그 푸르름으로 사람들에게 맑은 공기와 그늘을 주고 죽어서는 주택의 기둥과 마루, 장롱 혹은 반닫이가 되어 또 그렇게 도움을 준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 선한 숨결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며 나무는 수호신처럼 인류와 생을 함께 한다.흔히 나무를 다루는 장인을 목수(木手)라고 한다. 14살부터 곤궁한 살림을 도우려 목수 일을 배운 사람이 소목장 중요무형문화재가 되어 60여 년을 나무와 함께 살았다. 엄태조 명인을 팔공산 자락에서 만났다. 당초문 통영반, 오동 의걸이장, 먹감약장,
작품을 구상할 때 작가는 간혹 심상에 떠오른 이미지를 따라가기도 한다. 그럴 때 작가는 눈으로 확인되는 실체보다 심상에 떠오른 이미지를 더 믿게 된다. 그것은 이미지가 품고 있는 여백이, 실체가 갖지 못한 환상으로 상상의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본을 따라 그리듯 모든 물상을 꼭 사실적으로 그려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너무 단조롭다. 밤에 쓴 문장을 다음날 아침에 지우는 일이 있더라도 작가는 환상을 따라가는 모험을 망설이지 않는다. 물상이 재창조 되는 은유의 과정은 창작에 종사하는 모든 예술가들이 아프게 겪어야 하는 일이다. 문상
일중 황보영 회장으로 하여금 전통생활민속예술에 관심을 갖게 한 것은 상여소리였다. 시골 장례식에서 상갓집 일을 돕다 구성지게 울려 퍼지는 상여소리에 감화를 받아서 황보 회장은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별의 슬픔과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을 담아 부르던 상여소리는 우리네 농경사회의 장례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식이었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친구들이나 가족모임, 교수들 퇴임식장 같은 소단위의 행사를 다니며 놀이 삼아서 소리를 했다. 자신이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신명에 겨워 소리를 하고 다니다
기도로 시작하는 삶!인간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은 기도뿐이다. 사방이 고요히 어둠에 가라앉은 새벽의 어둠 속에서 그는 기도를 한다. 지금은 곁에 없지만 큰 스님의 가르침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 생전에 큰 스님은 자신이 죽고 나면 금강경에 의존하라고 했다. 기도와 촬영삼매경을 통하여 지혜를 터득하였다. 그 지혜는 앞날을 미리 내다볼 수 있게 하고,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결정적 순간을 예측하여 사진에 담아내게 했다. 설악산으로 갔다. 소나무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잡으려고 밤 2시에 산을 올라가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며 두 달
60년대 70년대만 해도 집집마다 아이들이 대여섯 명 이상이었다. 칠 남매, 팔 남매, 아이가 더 많은 집은 십남매도 예사로웠으니 그야말로 베이비붐 시대였다. 온 나라가 가난에 허덕이는 것이 마치 아이들 때문이라는 듯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을 내세우며 ‘둘만 낳아서 잘 기르자’는 캠페인을 벌이기에 앞장섰다. 나중에는 둘도 많다며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고 외치는 사이, 사회 전반에 아이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먹을 입이 많아서 생활은 곤궁하고 옷차림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엄마들은 틈만 나면 양말 꿰매는 게 일이었고 첫째가 입던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 ‘연을 쫓는 아이’에 연싸움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집 아들인 아미르가 연을 날리고 하인의 아들 하산은 수십 리 길을 달려가서 줄이 끊긴 연을 찾아온다. 하산은 ‘도련님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연을 찾아올 수 있다고 한다. 아미르에게 있어서 하산은 친구이면서 하인이고, 하산에게는 아미르가 도련님이면서 친구다. 신분의 차이가 사람의 입장을 만드는 교훈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마을에 연 날리기 대회가 열리고 아미르와 하산이 한 조가 되어서 참가한다. 바람을 따라 연이 새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하산의 기지
예전에 내가 살던 반고개에는 통근차가 많았다. 반고개는 성서로 가는 길목이고, 성서에는 섬유공장이 많았다. 아침마다 동네의 언니 오빠들이 도시락 가방을 들고 구두소리 또각또각 울리며 섬유공장으로 출근했다. 요란하게 구두소리 울리는 언니 오빠들의 싱그러운 젊음으로 골목이 온통 수다스럽고 생기가 펄펄 넘쳤다. 한 사람이 뛰면 덩달아서 너도나도 뛰기 시작하는데, 구두 뒤축소리가 골목 가득 울려 퍼졌다. 숨을 헐떡이며 반고개에 이르면 통근차가 줄 지어 서 있었다. 식구들이 문 밖까지 나와서‘잘 갔다 온나~’하고 배웅하던 아침 풍경이 정겨웠
시조시인이신 문무학 선생님을 만났다. 가끔 출판사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독대는 처음이었다. 시인은 책이 가득 담긴 종이가방을 주었다. 그 중 반려도서 시리즈 두 권에 사인을 받았다. 시인은 반려도서 두 권을 마음에 담고 있던 사람 40명에게 보냈다고 했다. 시인의 마음에 담긴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누군가의 마음에 담긴 사람이 되는 것도,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쩌면 삶의 최종목적일지도 모르는데 더러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잊고 산다. 마음을 잊으면 일상의 모든 과정이 단순한 습관으로 굳어지고 마는데. 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