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는 사직단이 없다. 문중마다 묘당묘우는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나라를 열고 정신문화의 시조를 모실 사직단이 없다. 물질문명이 풍요로워지고 수출 7위, 세계 13위 경제대국이 될수록 출발의 기본과 정신문화의 뿌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경주는 정신문화의 고향이다. 한국 문학의 성지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곳이 경주이기에 더 그렇다.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한반도 끄트머리에 위치한 작은 나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과정이 가려졌을 뿐 경주에는 여전히 해동의 빛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곳이다. 우리나라하면 신라와 경주를 가장 상징적으로 내놓을 수 있고 다음이 서울이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걸작 예술 체계를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이자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한국적인 예술을 간직한 역사도시
술은 원래 신성한 음식이다. 인간과 신을 연결시키고 사람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역할을 한다. 제사장이 신에게 바쳤던 신성한 음식이자 음복(飮福)에서 빠질 수 없는 매개체로, 인간과 신이 하나로 되도록 하는 연결체다. 제사장이 신에게 올리는 술의 기원은 기원전부터다. 조상을 기리는 제사상에 술을 올리는 역사도 삼국사기에서 확인되는 것을 보면 삼한 이전부터 술은 민중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조상들은 새해 첫날이나 정월 보름날 아침에는 귀 밝게 술을 마시도록 했다. 반가운 손님이 왔을 때는 술을 빠뜨리는 적이 없었다. 술은 합일 정신을 가리킨다. 옛 혼례에서는 신랑신부가 술을 마시는 의식이 들어있고, 포도주를 마시는 천주교의 성스러운 종교의식은 천년을 넘게 이어졌다. 조선시대
요즘 가수 싸이가 세계적으로 뜨고 있다. 마치 접신(接神)이 된 것처럼 세상 가요계를 지배하고 있다. 가수 싸이를 보면 상식으로는 그 많은 관중을 이끌고 흥분시킬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나온다. 세계적 아티스트 백남준도 무속에서 작품의 소재를 건졌다. 접신은 자기가 전공한 분야에서 신의 경지에 들어갔을 만큼 최고가 되었다고 칭송하는 말이다. 신라 시조 왕 박혁거세나 남해 차차웅이란 이름도 접신을 한 제사장을 가리킨다. 갑골문이 탄생한 배경도 신으로 행세한 제사장에 의해 부호로 표기되는 것이 시작이었다. 경주에는 원래 창조의 신이 많은 곳이다. 가냘픈 무녀(巫女)가 60관이 나가는 돼지를 한손으로 번쩍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은 신의 경지에 들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경주 삼릉계곡을 한참
암각화에서 제사장이 탄생시킨 갑골문자는 세월을 두고 꾸준히 발전해서 오체를 만들었다. 갑골문이 가장 잘 나타난 금석문은 요동 벌을 호령한 고구려 19대 광개토왕 비석에서 볼 수 있는 비문이다. 선이 가늘지만 힘이 있고 고졸하고 변화무상하다. 갑골문에서 발달된 전한(前漢)대 오체가 가장 잘 살려졌다. 임신서기석이나 포항시 신광면 냉수리비, 울진 봉평리 신라 고비보다 더 수려하고 힘이 넘치는 글 획으로 채워져 있는 우리나라 최고 문화재이자 동아시아의 역사서이다. 고졸하고 뼈다귀 골격이 살아 숨 쉬는 광개토왕능비의 수준은 안진경체를 넘는 것으로 4세기 고구려 문화가 정점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서는 환원의 이치까지 후세에 남겼다. 더욱이 고구려 신라 비는 조선시대 비보다 더 강한 돌을 써서 문화재적 가치도 높
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중국 길림성 집안현(集安縣)에 세운 선왕 광개토왕(고구려 19대왕, 375~413)비는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비석이기도 하지만 중국에서도 100비 내에 올리고 자기네 동북아 역사편년에 넣고 있다. 전혀 다듬지 않은 화강암(높이 6.39m, 너비 1.38~2m)에 전서에 가까운 예서 1천775자가 음각돼 더 거대하다. 글씨체는 전한(前漢)시대다. 호태왕비는 청나라 봉건주의가 몰락되었던 조선후기까지 확인되지 못함으로써 신묘년조 논란에다 155자 가량이 무리한 탑본으로 판독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광개토왕비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1면 1행에서 6행까지는 시조 동명성왕이 나라의 기틀을 세운 기록이다. “천제의 아들이시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며 알을 가르고 세
지난 여름 경주 금장대(藏臺, 한옥단청누각 154㎡)가 준공됐다. 강변도로를 달리던 사람들이 차를 세워두고 다시 보고 갈만큼 명소가 됐다. 신라 사람들은 질 좋은 돌(화강암)에 서원할 내용을 쓰고, 성스러운 산마루에 세우거나 묻었다. 1935년 경주보통학교(계림초등학교 전신) 교장과 경주 고적보존회(국립 경주박물관) 회장을 지낸 오사까 긴따로(大阪金太郞)가 금장낙조로 이름난 이곳 나들이에서 글씨가 음각된 비석을 주웠다. 글자를 판독해 보니 신라의 두 청년이 “임신년 6월 두 사람은 하늘에 맹세한다. 3년 동안 나라에 충성하고 큰 일이 없기를 빌며,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는 하늘이 큰 벌을 내려도 감수하고, 난세가 되더라도 이 약속은 지킬 것”을 서원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었다. 신라인
지금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헛꿈을 많이들 꾼다. 자고 밥 먹고를 되풀이하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그런 헛꿈을 꾸는 사람들로 세상이 채워지고, 자신의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몸을 던져 정면 돌파하는 방법을 채택하지 않고 불평만 늘어놓는 보통 삶으로만 채울 뿐이다. 몸을 던져 일상을 깨어버린 성철(1912~93) 스님의 구도열정은 위대하다. 이보다 더 위대한 분이 신라 혜초 스님이다. 21세기의 실크로드는 자동차로 달리고 비행기로 적당한 지점에 내려서 며칠 쉬었다가 갈 수도 있다. 중국 둔황에서 현대문명의 이기를 빌려 사막을 넘어도 온몸이 마르고 헉헉거리면서 며칠을 가도 사막을 넘지 못하는 것이 현생의 삶이다. 먼저 간 구도자의 해골바가지가 나침반과 길 표준으로 삼았던 혜초는 해동 최초의 해외
금강산 그림은 겸재 정선(鄭敾:1676~1759)만큼 잘 그린 사람은 우리 역사에는 없을 것이다. 삼성 미술관 리움이 소장한 국보 217호 금강전도(1734년, 종이에 엷은 채색 94×130.6cm)나 고려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한 금강도(剛山全圖:絹本淡彩 34×28.5cm)는 일만 이천 봉우리가 한 송이의 꽃으로 피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림 상단에 빼곡하게 쓴 제발(제사(題辭)와 발문(跋文)을 아울러 이르는 말)에도 겸재만이 갖는 시각이 표현돼 있다. 경상도 청하현감시절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내연산 폭포(리움소장)도 절벽을 휘감는 물길모습이 금강전도의 아름다움에 비길만하다. 17세기를 살았던 겸재가 금강전도에서 새로운 기법을 등장시킨 것은 당시 유행했던 실학과 국문학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겸재가 우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뼈아픈 기억은 일제 강점기 36년간이다. 아직도 그 뒤처리를 말끔히 하지 못하고 있다. 강제 징병과 징용, 정신대의 상흔이 가슴깊이 남아 있는가하면 그 원혼들이 만주 땅과 연해주 남태평양의 정글에서 지금껏 떠돌아다니지 않는가. 같은 말을 주고받는 동포끼리, 부모 형제가 서로 총질을 했던 한국전쟁의 비극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다. 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의 슬픔도 쉽게 아물지 않을, 깊고 깊은 상처다. 한 시대를 먼저 살다 가신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역사는 말을 하지 않지만 역사는 무한의 진리를 품고 있기 때문에 지혜의 눈과 용기의 입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나 말을 하게 한다”고 말했듯이 인류는 길고 긴 세월동안의 역사를 교훈삼아 미래의 행복을 추구한다. 세계 역사
한국문인협회 경주지부장 임기를 막 끝낸 수필가 박원은 경주를 가장 잘 아는 고수이다. 경주에 대해서는 모르는 분야가 없다. 그만큼 내공이 깊은 문학가다. 박원의 말을 빌리면 경주는 한국문학의 성지다. 일찍이 고대국가의 도읍지였으며, 반만년 역사의 뿌리가 되는 땅이자 우리문학의 싹을 틔운 정신문화의 고향으로, 밝은 얼굴과 핏줄의 뜨거움을 갖는 도시가 되었단다. 신라 향가 가운데 충담사가 지은 `안민가`는 나라의 기강이 되는 정치적 원동력을 알게 했으며, `처용가`한 구절로써 그 시대 사회상의 단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원앙생가`를 통해서는 시공을 초월하는 신라인들의 종교관을 이해할 수 있었고, `제망매가`에서는 높은 문학성을, `찬기파랑가`에 비친 화랑의 기개도 대단하지만 내면적 성찰은 오늘날까
지금쯤 몽골 초원에 누워보면 내 눈앞으로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별들이 아까워 잠 들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오지 지역에도 우리와 똑 같은 사람들이 정겹게 살아가고 있다. 그 많은 별들 가운데 유독 지구별에 올라 탄 것도 기적 중에 기적이다. 지구별이 속한 태양계만 살펴봐도 수·금·화·목·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등 9개의 행성에다 32개의 위성, 1천600개에 이르는 소행성이 사이좋게 태양을 돌고 있다. 이 별들 가운데 지구는 크지 않은 별이다. 토성의 762분의 1, 목성에 비해서는 1천318분의 1, 주별 태양에는 130만분의 1이다. 사실 지도를 펴고 보면 우리나라 땅 덩어리는 지구면적의 0.1%, 미국 인디아나주 정도의 크기이지만 5천만명이 부대끼며 살아간다. 이런 작은 땅에 200만년 직립인
경주시 동부동에서 북부동을 잇는 경주읍성은 사적 96호로 지적돼 있었을 뿐 신라문화재에 가려 상당기간 그냥 버려져 있었다. 최근 들어서 그 중요성을 알고 복원작업에 나선 경주읍성은 조선시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의 기능을 함께 했던 돌 성이다. 경주읍성은 근세까지 가장 잘 보존된 성이었지만 문화재의 중요성을 잘 몰랐던 시기와 나라전체가 전쟁의 폐허로 혼란을 겪었을 즈음 인근 주민들에 의해 파손됐다. 지금도 성 주변의 민가 담장에 박힌 돌들은 읍성을 허물어 가져다 쓴 돌이다. 성 돌은 일차적으로 한번 다듬어져 있어 담장을 쌓기가 수월했기 때문에 더 빨리 파손되었을 것이다. 경주는 또 국보급 신라 문화재가 수두룩한 고도여서 조선시대 유적이 천대받았던 원인도 있을것 같다. 경주 읍
한국인 뿐만은 아니다.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데 돈과 시간을 얼마나 투자하는가를 따져 보았더니 49.76%로 나타났다는 보도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미인 지수는 세상 살기가 각박해질수록 더 심해질 수는 있지만 결코 내려갈 수치는 아니다. 볼테르는 이렇게 말했다. “두꺼비에게 미모를 물었다 하자. 귀 밑까지 찢어진 긴 입하며 툭 튀어나온 두 눈, 뒤뚱거리는 배를 가리킬 것이다” 찰스 다윈 역시 인간을 포함시킨 동물에게 미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고 했다. 동양인의 전통적 미의 기준은 삼백(三白) 삼흑(三黑) 삼홍(三紅)이다. 살결·이빨·손은 희고, 눈동자·눈썹·머리칼은 검어야 하며, 입술·볼·손톱이 붉으면 구색(九色)을 갖춘 미인이 됐다. 그렇지만 요즘은 다르다. 서양 미인을 쫓
현판 글씨는 건물의 격(格)과 조성한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어 당대의 명필만이 쓴다. 지난 4일 준공식을 가진 경주 금장대(藏臺, 한옥단청누각 154㎡)의 현판글씨는 경주가 낳은 영남 명필 심천(心泉) 한영구(韓永久) 선생이 썼다. 심천 선생이 전서로 쓴 서쪽현판은 글 획에 실린 기운이 부족하고, 도로에서 볼 수 있는 동쪽 현판은 글씨가 작아 추석 전에 다시 써 달기로 결심, 작품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심천 선생은 글자 한자 한자에 풍부한 근육과 단단한 뼈가 들어있고, 글 획들이 서로 어우러져 전체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기운이 흐르도록 이번엔 전서보다는 해행(楷行)체로 쓰기로 결심하고, 대 붓(마모필)을 다듬고 있다. 글자 한자 크기가 1m가 넘으니 금장대(藏臺)엔 폭 4m가 넘는 현판이 걸리게 됐
채소를 소금에 절여 적당히 발효시켜 먹는 김치이야기는 3천년 전부터 중국역사서에 나온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처럼 즐겨먹는 김장김치가 완성된 것은 1천800년대에 들어서부터다. 그 전에는 소금 등 기초 양념만 입히는 절임김치였을 것이다. 고추가 들어온 것이 임진왜란(1592~1598)때로 알려졌고, 배추 겉잎이 안으로 오그라드는 결구(結球)배추는 1천700년대 중반쯤 중국서 종자가 들어왔다. 결구배추라야 젓갈이나 무채 낙지 해산물로 속을 채울 수 있어 김치보쌈이 만들어진다. 예전엔 겨울 김장이 반년 양식이라 했고, 배추김치 반포기를 썩썩 찢어 얹으면 고봉밥 한 그릇도 너끈히 비울 수 있었다. 동짓달이면 동네주부들이 품앗이로 김장을 했다. 김장독을 땅에 묻어두면 이듬해
북경을 다녀온 연암 박지원은 우리 민족의 심성(心性)을 `좁쌀`로 비유한 적이 있었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싸우고 송사를 일으키는 편협하고 각박한 처신을 두고 한 말이다. 생각에 갇혀서 안절부절 할 때가 많다. 해와 달은 그 무량한 빛으로 차별 없이 세상을 구석구석을 두루 비춘다. 무한하게 풍요롭다는 생각을 가질 때라야만 비로소 스스로도 풍요로워 질 것인데도 말이다. 세상사는 일이 하루같이 지지고 볶는 일이다. 흡사 불난 집(火宅)이다. 지식은 하루하루 늘어나 쌓이지만 도는 하루하루 덜어야 이룰 수 있다. 원효의 일통(一統)사상도 이와 무관치 않다. 원효의 화엄경도 넓게 유추해보면 일통사상이다. 원효가 화엄경을 쓰던 시대적 상황은 신라 백
성(性)과 관련된 극악한 뉴스들이 도배를 하는 세상이다. 우리 아이들이 그런 환경에도 이만큼 바르게 자라준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스쳐간다. 천주교 박해가 절정에 이르렀던 조선시대 말 천주교에 귀의해 신앙생활에 몰두했던 처녀들이 성모 마리아의 순결을 흠모, 결혼을 거부하고 동정을 지키는 수행으로 온갖 고통을 이겨냈던 얘기는 지금도 유명하다. 전주의 순교자 가문의 요한 유중철(柳重哲)은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주선으로 한양의 순교자 가문 출신 루갈다 이순이(14)와 결혼했다. 둘은 사랑은 하지만 육신은 범하지 않는다는 순결 서약을 굳게 한 동정부부가 됐다. 루갈다는 옥중 생활에서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부부생활을 이렇게 밝혔다. 순결을 지킬 것을 천주님께 명세한 이들 부부가 시집가던 날부
인체를 도는 물기는 염분 0.9%, 당분 0.1%로 구성돼 있다. 체내 소금 농도가 떨어지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저체온증이다. 반면 당도가 높아지면 혈류가 굳어져 각종 질환이 닥친다. 이러니 좋은 소금은 건강을 다스리는 천연 약이다. 너무 싱겁게 먹어도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인류는 지금까지 소금보다 더 좋은 방부제를 찾지 못하고 있다. 대나무 속에 소금을 넣고 아홉 번을 구워내는 게 죽염이다. 죽염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1천500℃의 불에서 소금이 정제되는 것을 보면 소금이 태양에서 날아 왔다는 말이 참말처럼 느껴진다는 것. 소금은 신이 사람에게 내린 가장 큰 선물이자 태양에서 날아온 인간생활의 가장 훌륭한 식재료다. 소금에 절인 배추나 음식은 쉽게 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
물은 별이 되고, 생명이 되고, 미래가 된다. 5년 째 극심한 가뭄을 겪는 사헬지역은 물 자체가 곧 행복이다. 아프리카 가뭄은 특히 사헬지역(북 사하라 사막에서 남쪽 수단에 이르는 아프리카 영역을 이르는 아랍어)이 심하다. 먼지가 풀풀 이는 땅에서 곡식을 심을 수는 없다. 보이는 것은 모두 말라 비틀어 졌으니 인간은 물론 가축도 죽어간다. 하루 끼니로 죽 한 그릇 얻어먹기가 어려운 상황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다. (유니세프)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의 경우 내전은 지난해 끝났지만 난민촌은 여전하다. 우간다에 미국 로타리클럽 회원들의 도움으로 펌프가 생겼다. 오랜만에 어린이가 맑은 물로 목욕을 하고나니 마음까지 깨끗해 졌다고 했다. 인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물이지만 10억 명이 물 부족으로 고난의 날
세상에서 힘이 가장 세고 몸집이 큰 동물인 코끼리와 황소는 육식을 전혀 하지 않고 풀로 배를 채운다. 채식만 해도 덩치가 가장 크고 힘이 세다는 얘기다. 인간의 몸을 유지시키는 세포는 자기 정화작용을 한다. 세포 하나하나가 몸속의 우주이고, 독립적 체계를 갖추고 있는 생명체다. 암세포는 같이 가지 못하는 게 속성이다. 고기는 그런 걸 가속시켜 병근을 악화시킨다. 건강해지려면 신선한 공기와 좋은 물을 마음껏 마시고, 세상이 알아주는 야채를 먹으면 신체 건강이 좋아지는 게 이치다. 색에 따라 기능이 달라지는 만큼 동양 오행(五行)에 맞추는 것도 좋은 식단을 짜는 방편이다. 푸른색은 눈과 간에, 검은 색은 신장과 방광에, 황색은 위장과 비장, 흰색은 폐와 대장, 붉은 색은 심장에 좋다. 복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