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를 방문한다는 건 그 공간이 간직한 고유의 문물을 접하고, 거기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행위다. 우리는 이걸 ‘여행’이라 부른다.신라 천년의 빛나는 유적·유물과 즐겁게 조우할 수 있는 경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 최고의 여행지 중 한 곳. 하지만,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과 경기도에 사는 지인들은 가끔 묻는다.“경상도 사람들은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다던데, 경주도 그래?”이 물음 앞에 설 때면 기자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했다.100년의 역사를 지닌 경주 중앙시장. 무거운 짐을 옮기
인간의 상상력은 한계와 끝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건 오만이나 착각일 수 있다.상상이 구체화되기 힘든 아주 오래된 사건이나 1천400여 년 전 까마득한 풍경 앞에서는 사람이 가진 상상의 힘이 무너지거나 무력화될 수도 있지 않을까?매번 신라의 고대 유적과 유물을 만날 때면 위와 같은 의문을 가졌다. 경주를 여행한다는 건 스스로의 상상력이 얼마나 큰 영역 안에서 작동하는지를 가늠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4명의 왕이 93년에 걸쳐 만들어낸 사찰, 80m 높이의 거대한 목탑이 우뚝 서있던 공간, 서라벌 사람들의 정신적 버팀목 역할을 했던 황
경주 여행이 처음인 사람이건, 여러 차례 방문한 이들이건 마찬가지다. 경주 톨게이트 위에 근사하게 올라앉은 기와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푸근해진다.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 도시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수십 년 전 기와집과 초가집에서 살아본 세대에겐 아련한 향수를 선물하고, 콘크리트로 지어진 아파트와 연립 주택에서만 지내온 아이들에겐 감탄을 부르는 풍경.경주에서는 기와를 얹은 한옥(韓屋)을 어디서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심지어 관공서와 대형 카페도 기와지붕이 흔할 정도다. 이런 형국이니 한옥은 ‘서라
얼마 전 예순을 훌쩍 넘겨 일흔에 가까운 부부의 집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거기서 두 사람이 신혼여행 때 찍은 사진을 봤다. 아마도 1970년대 후반이거나 1980년대 초쯤이었을 터.경주 첨성대 앞에 나란히 선 부부는 말 그대로 금방 피어난 꽃처럼 화사하게 젊었다. 신부는 분홍색 한복을 입고, 신랑은 결혼식을 준비하며 샀을 것이 분명한 깔끔한 새 양복 차림.“우리 때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이라 외국으로 놀러간다는 건 언감생심이었지. 비행기 타고 제주도를 가는 신혼부부도 드물었어. 그저 기차 타고 온양 온천에 가거나, 버스 타고 경주
동양과 서양을 불문하고 세상에 전해오는 신화와 전설은 언제나 흥미롭다. 인간의 상상력과 이성 바깥에 존재하는 감성을 자극하기에 그렇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하늘의 신(神) 몸의 일부분이 파도가 일으킨 거품과 뒤섞여 조개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프로디테였다. 신화에 매혹된 수많은 조각가들이 대리석을 깎아 그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다.그 옛날 북유럽 사람들은 남쪽의 뜨거운 불꽃이 거대한 얼음 기둥을 녹였고 거기서 생겨난 거인이 자신들의 선조(先
지상에 유토피아(Utopia·불합리와 부조리가 사라진 완벽한 사회)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인류의 역사는 그걸 증명한다. 길 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보자.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불문하고 ‘빈틈없는 온전한 세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다. ‘유토피아가 실재할 수 있다’는 희망을.천국은 유토피아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예술가들은 어떤 방식으로건 이상사회(理想社會)를 꿈꿔 왔다. 그 연장선에서 소설가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도서관을 유토피아 혹은,
비단 종교인만은 아닐 것이다. 무신론자들도 세상살이 번잡함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을 땐 절이나 성당, 또는 교회를 찾아간다. 주위에서 그런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기자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낯선 곳으로 떠난 여행에선 오래된 사원이나 이름난 중세 성당을 빼놓지 않고 방문하곤 했다. 종교를 떠나 인간 모두에겐 안식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를 찾았던 몇 해 전엔 불가리아 정교회 교당에 갔었다. 검은 망토를 두른 성직자의 나지막한 음성을 들으며 기대하지 않았던 안정과 편안함을 얻었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도시는 특유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입에서 발음되는 순간, 그 즉시 연속적으로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경주가 가진 이미지는 고풍스럽고 묵직하다.천년 세월 동안 이름을 간직한 오래된 사찰, 거대하고 부드러운 반구(半球)의 형상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수많은 고분들, 남산에 뿌리를 내리고 세파를 견디며 숲을 이룬 부드럽게 굽은 소나무….경주는 위와 같은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다가선다. 진녹색의 풍경 속에 자리한 고색창연한 도시 서라벌. 이는 산과 가람, 왕릉 등이 결합해 만들어낸 압도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중년들 중 경주에 관한 추억 한 조각 없는 사람이 있을까?분명 없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박철화 역시 마찬가지. 그는 1981년 경주 수학여행의 추억을 떠올리며 ‘서라벌의 보물’로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목했다. 신라와 신라인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원고를 아래 싣는다.필자인 박철화는 서울대 불문과와 프랑스 파리 8대학·10대학에 공부했다. /편집자 주 경주 수학여행의 대표적인 장소로 유명한 ‘불국사와 석굴암’자연과 인위, 무심함과 정교함, 화려함과 절제, 위엄과 겸손까지…찬란한 불교예술·뛰어난 건축기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생의 허무와 쓸쓸함이 견딜 수 없는 감정으로 밀어닥치는 날.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의미를 찾기 힘들고,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혼자서 고요 속으로 침잠하고 싶은 날은 누구에게나 온다.그럴 때 당신에게 잠시잠깐이나마 위로와 편안함을 선물할 여행지를 알고 있다. 경주 시내에서 동쪽으로 35km쯤을 달리면 닿을 수 있는 양북면 감은사지(感恩寺址).지척에서 바다가 출렁이는 이 ‘오래된 절터’는 주요 유물이 출토된 거대한 석탑과 금당(절의 본당)·강당(경전을 읽고 토론하는 학습장)터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본문에 앞서 먼저 사적인 경험 한 토막.1970년대 초·중반. 영남의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던 외가를 자주 찾았다. 그때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에 TV는 물론, 라디오와 전기밥솥도 없거나 드물던 곳. 모든 것이 지금과 비교하자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그럼에도 벽촌 구석구석까지 인터넷이 개통되고, 여든 살 촌로들도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2020년 오늘보다 매력적인 게 분명 존재했다. 동네를 걸으면 콧속으로 스며들던 향긋한 아카시아 향기, 기와를 머리에 인 고풍스런 집들이 만들어내는 풍경, 드물지 않게 멋스런 초가(草家)가 있었고,
“벚꽃이 흐드러졌을 때 여기 못 와보셨죠? 아이고, 그때 오셔야 했는데…. 올해는 나라 전체가 바이러스로 난리가 나서 어쩔 수 없었겠지만, 내년에 꼭 한 번 다시 오세요. 아마, 풍경에 깜짝 놀라실 겁니다.”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릉원 돌담길로 가는 5분 남짓의 짧은 시간.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 아저씨의 자랑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런 게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 대한 자부심일까? 웃음 섞인 그의 이야기가 듣기 좋았다.난분분 춤추는 벚꽃 잎으로 환히 불 밝히는 봄날의 대릉원 돌담길은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잘 알려져
경주 나들목을 지날 즈음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가 교촌마을 기와를 적시고 있었다.오래 전 멋을 그대로 간직한 고풍스런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경주향교 처마 아래서 가늘게 흩뿌리는 비를 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어디선가 학자들의 웅성거림과 학동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1천 년 가까운 세월을 버텨 온 왕조. 신라는 우리들 기억 속에서 여전히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제국’이다. 곳곳마다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유적과 유물이 가득한 경주. 수십 번을 다시 찾아도 여전히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던지는 공간.교촌마을 역시 마찬가지다.
‘길은 길 위에서 끝이 없다’는 말이 있다. ‘길’은 ‘집’과 더불어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가장 주요한 공간 중 하나다.길은 또한 변화의 장소다. 수백 년, 혹은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내는 길은 없거나 매우 드물다. 시대와 세상의 흐름에 따라 길은 형상을 달리하며 시시각각 변한다. 그게 길의 타고난 운명이다.한때는 호화찬란한 건축물이 가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 막막한 폐허가 되기도 하고, 인적 드문 곳에서 산새만이 조용히 지저귀던 오솔길이 거대한 도읍(都邑)의 광대한 길로 바뀌기도 했던 게
‘천년왕국’ 신라의 숨결이 여전히 살아있는 경주는 ‘거리 자체가 박물관’이란 수식어에 맞춤한 도시다. 산처럼 솟은 거대한 왕릉과 역사서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사찰들, 곳곳에 산재한 석탑과 불상, 여기에 화랑도와 풍류정신처럼 1천년을 이어져온 무형의 자산까지.고고학자들에게는 신화적 상상력을 제공해 역사 탐구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고, 관광객들에겐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선물한 서라벌의 유적과 유물들. 이것들은 여러 말 할 없이 한민족(韓民族)의 소중한 보물들임이 분명하다.경주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보물 외에도 새롭게 주목받는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