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결에 다녀온 듯 어렴풋하지만 문득문득 사진첩을 펼쳐보듯 생각나는 절이 있다. 아름다운 오솔길, 속세를 등진 고독감이 눅눅하게 온몸으로 배어들던 산사, 나는 벼르고 별러 마지막 산사 기행을 화암사로 정했다.새파랗던 청춘이 고스란히 살아서 반겨줄 것만 같아 마음이 설렌다. 하지만 멀고 먼 길을 달려 불명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 모든 기대감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넓은 주차장과 맞은편으로 뚫린 포장길 앞에서 변화의 예감은 적중했다. 신비롭던 오솔길은 넓고 완만해졌으며 가랑잎의 뒤척임조차 없이 산길은 적적하기만 하다. 도솔천을 찾아가듯
지리산 서쪽 들판에 천왕봉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절이 있다. 천왕봉과 반야봉, 덕유 산맥의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연꽃의 꽃밥 자리에 위치한 실상사이다. 일주문을 대신하는 해탈교를 건너도 익숙한 차안의 고리는 그대로 따라온다. 익살스러운 표정의 세 돌장승을 지나고 천왕문을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불국토는 멀어 보였다.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 홍척 증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신라 구산선문 중 최초로 문을 열었다. 중국으로 건너가 제일 먼저 선법을 배워온 이는 가지산문의 도의국사였지만 산문을 연 이는 실상산문의 홍척국사가 먼저라고
유순한 보성강 줄기를 따라 겨울 햇살이 반짝이며 따라온다. 보성강을 건너 잡목숲사이로 접어들자 차는 마른 먼지를 일으키며 힘들게 나아간다. 그토록 그리던 태안사 가는 길은 온통 그리움에 젖어 있다.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운 건 지붕 있는 다리, 능파각 때문이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한 능파각은 850년 혜철국사가 지었지만 파손되어 1767년에 복원했다. 누각이면서 다리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는 아름다운 건축물에서 선인들의 여유와 풍류를 읽는다. 능파각 아래로 펼쳐지는 계곡의 풍경과 물소리에 저절로 번뇌가 사라진다. 나는
오봉산은 신라 선덕여왕 때 백제의 군사들이 여근곡(女根谷)에 숨어 있다 격퇴된 곳이며, 부산성(富山城)이 있어 경주의 서쪽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뿐만 아니라 화랑 득오곡이 죽지랑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를 지은 곳이기도 하다. 그 오봉산 정상 아래 숨어 있는 주사암을 찾아 산길을 오른다.‘53 선지식의 돌탑’,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라는 팻말과 작은 돌탑들이 썰렁한 겨울 산길을 밝힌다. 섬세한 손길은 이내 담력시험이라도 치르듯 53굽이의 아찔한 경사길로 이어진다. 조금만 방심하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산길을 비틀거리
해인사의 중후한 품격은 변함이 없다. 열세 개의 해인사 부속 암자들까지 모여 있는 가야산, 매표소를 지나면서부터 불국토에 들어선 듯 무심(無心)이 된다. 사람들이 몰리는 해인사를 지나쳐 무생교 너머 외길 끝에 앉아 있는 암자로 향한다. 해인사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원당암(願堂庵)이다.계곡 옆 푸른 이끼를 두른 거대한 바위는 인파당 스님의 자연석 사리탑이다. 백련암에 주석하던 인파당 스님은 살아생전 고매한 인품과 학문에 능하여 많은 분들로부터 무위자연의 도인이라 칭송받았다. 1846년 열반에 드시자 기대했던 사리가 나오지 않아 허
떠나는 가을이 아쉽다. 일주문 안에는 늦가을 풍경이 전하지 못한 인사를 부여잡은 채 우리를 기다린다. 초췌한 계절의 끝자락과 잔뜩 흐린 하늘,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약간의 고독과 우수가 실려 있다.유모차를 탄 손녀의 손에 들려진 나뭇잎 하나, 돌 지난 아이가 한참을 들여다보고 코로 가져가 냄새도 맡는다. 그리고는 손에서 놓지 않는다. 이 작고 아름다운 교감을 바라보며 모든 생명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대화를 나누다 수시로 찾아드는 적적함에 가끔은 까칠한 허공을 응시할 수 있어서 좋다.곧게 뻗은 700m의 거리가 지겹지 않다
가을날의 하루는 유난히 짧다. 용화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숲은 부산하게 하루를 접고 있었다. 용화사 오르는 반대편으로 넓은 시멘트 길이 시원하게 산으로 이어져 있지만 우리는 걸어서 도솔암을 오르기로 했다. 만만치 않은 비탈길에서 뿜어내는 거친 숨소리가 고요한 숲을 깨운다.지척에 있을 거라 여겼던 도솔암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친구는 지친 기색도 없이 잘도 오른다. 관음암으로 향하는 자동차가 우리 곁을 가볍게 지나칠 때마다 그 편안함이 부럽지만 우리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급한 마음으로 목적
속리산의 주말은 발 디딜 틈이 없다. 법주사 선원에서 동안거에 들어가셨던 스님의 부름이 없었다면 감히 차로 들어설 엄두조차 내지 못할 곳이다.차로 옮길 짐이 있어 인파를 헤치며 들어서는 일은 쉽지 않다. 몇 번이나 검문 받듯 상황을 설명한 후에야 비상등을 켜고 나아갈 수 있었다. 법주사에 대한 기대감보다 특혜를 누리는 듯한 불편함이 무겁게 가슴을 누른다.법주사 뒤편에 자리한 선원에는 인적조차 없어 몸과 마음이 조심스럽다. 동안거가 끝났지만 여전히 선원을 지키며 수행하는 스님들이 계셔 외부인은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다. 먼 길 온 내
북대암을 처음 찾은 것은 수십 년 전 시를 쓰는 친구와 함께였었다. 고즈넉한 절간의 정취도 좋았지만 선한 미소로 반겨주시던 치자향 닮은 스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때 마침 제를 지낸 뒤 우리 앞에 차려진 푸짐한 공양상과 친절함은 감동적이었다. 봄기운 가득한 북대암의 첫 이미지는 두고두고 나를 미소 짓게 했다.북대암은 창건연대가 확실치 않고 창건자도 신승 혹은 보양국사라는 설이 전해진다. 네 개 암자 중 가장 먼저 세워졌으며 운문사 북쪽에 제비집처럼 높은 곳에 지어져 북대암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우연찮게 오늘은 동화 작가와 함
이른 아침 중앙고속도로는 안개로 자욱하고, 대형 전세버스들로 몸살을 앓았을 소백산 입구조차 한산하다. 붉게 물든 단풍과 상실의 눈물처럼 떨어지는 낙엽들, 소백산 가을잔치는 화려하고도 쓸쓸하다.희방사는 고운사의 말사로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두운이 창건하였다. 1850년 화재로 소실되어 강월이 중창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네 채의 당우와 보관되어 오던 월인석보 판목 등이 소실되었다. 다행히 주존불은 무사하여 두운이 기거하던 천연동굴 속에 보관하다가 1953년 중건한 뒤 대웅전에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희방사는 생각보다
하늘 정원을 향하는 길은 인파의 물결로 가득하다. 하늘은 흐리고 억새는 하얗게 부풀어 시리다. 청운대 절벽에 자리 잡은 서당굴은 원효가 6년간 수도해 깨달음을 얻은 수도석굴이다. 접근조차 쉽지 않은 천인절벽에 어떻게 굴을 만들었는지 쉽게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팔공산의 천기가 서려 있어 한 시간만 앉아 있어도 정신이 맑아진다는 좌선대 이야기도 결코 빈말이 아닌 듯하다.오도암은 쏟아질 듯 가파른 나무계단을 끝없이 내려가야 한다. 툭 트인 경관이나 송신소의 탑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묵묵히 긴장을 놓치지 않고 아래로아래로만 향한다
청화산과 속리산 사이 828m의 도장산 깊숙한 곳에 심원사가 있다. 쌍용구곡의 비경을 감상하며 절을 찾아 가는 길은 초입부터 걸음이 설렌다. 계곡 옆 작은 주차장에 두어 대의 차가 주차돼 있지만 산길을 한적하다. 발밑에서 돌멩이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가빠지는 나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온다.심원사는 직지사 말사로 태종 무열왕 7년(660년) 원효 대사가 창건하여 창건 당시에는 도장암(道藏庵)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뒤 이 절의 연일이 유정을 도와 일본에 가서 포로들을 데려오는 등의 공훈을 세워 선조 38년 나라로부터 부근 십 리 땅을 하사
가을이면 억새밭이 장관인 화왕산, 그 어디쯤에 관룡사라는 사찰이 있다. 정확하게는 화왕산 동쪽, 창녕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관룡산 품에 안겨 있다.옥천 저수지를 지나고 큰 벚나무 우거진 산길을 오르면 주차된 차들로 인기를 실감하게 된다. 가을이면 오르내리는 차들과 하산하는 사람들로 마음 비우는 과정을 생략한 채 관룡사를 맞아야 한다는 게 유일한 흠이다.작은 주차장 맞은편으로 돌계단이 있지만 사람들은 잘 닦여진 큰길을 따라 오르내린다. 돌계단 위에는 문 없는 돌담 출구 홀로 혼잡함에서 벗어나, 소박한 자태로
가을이 오고 있다. 폭염과 폭우를 피해 산사를 찾아다니던 지난하던 여름은 잊고, 어느덧 새로운 계절 앞에서 나는 또 설렌다. 풍요와 감사함으로 물결치는 계절이다. 매표소를 지나 동화사 산내 암자들이 모여 있는 길로 접어들자 울창한 숲 그늘이 이어진다. 휴일 뒤의 숲은 지친 기색도 없이 평온하다. 잘 닦여진 길조차 서로를 포용하며 숲의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다.부도암을 지나자 숲은 더욱 고요하다. 가끔씩 배낭을 메고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시끌벅적한 말소리와 배가 터질 듯 불룩한 배낭이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 그들이 누리는
네비게이션이 팔공산 갓바위 오르는 길 중턱에 자리 잡은 사찰로 나를 안내할 때까지 나는 관암사를 기억하지 못했다. 무심히 오르내리던 길목에 배경처럼 서 있던 절, 언제나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경내를 지나다니기만 했던 곳이었다.관봉은 내 젊은 날 즐겨 찾던 등산코스였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사색이 필요할 때면 그곳을 찾곤 했지만 절은 한결같이 침묵에 싸여 있었다.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고 이제 험난한 돌계단이 이어질거라는 묵시적인 길 안내만으로 충실했다. 모처럼 추억을 더듬으며 산길을 오른다.폐사의 비운으로 방치된 절터에서 한국
일주문은 길을 살짝 비켜나 높은 곳에 서 있다. 절을 드나드는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먼 곳을 응시하는 눈빛에서 느껴지는 고독한 품격은 그 상징성만으로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쉽게 일주문을 통과했지만 이내 단단한 철문이 더 이상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장내 집회를 금한다는 하얀 안내문이 콜록거리며 반룡사를 보호한다. 경내는 공사 중인지 푸른 가림막이 쳐져 약간은 어수선하고, 인기척 없는 산중에 빗줄기만 뿌려댄다. 그냥 돌아서기에는 아쉬움이 남아 철문 아래로 몸을 굽혀 허락없이 경내로 들어선다.반룡사는 동화사의
꿈자리가 어수선하여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태풍이 북상중이라는 소식으로 하늘빛조차 우울한데 영천댐 백리길 벚나무들은 꽃이 없어도 그 눈빛은 시리지가 않다. 나는 차이콥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의 볼륨을 좀 더 높인다. 서정적이고 차분한 음악과 터널을 이루는 나무들 사이로 비쳐드는 잔잔한 물빛까지, 완벽한 축복의 아침이다.보현산을 향해 달리던 차는 영천댐을 벗어나자 이내 충효사 앞에 이른다. 겉보기는 여느 사찰과 다름없이 평범하지만 어마어마한 크기의 오백나한상들 앞에서 무언가 색다른 분위기를 감지한다. 세계 최대 백옥 오백나한상은 석고
도덕암은 해발 702m밖에 되지 않는 도덕산 안에 숨어 있다.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지나 비포장길을 달릴 때도 나는 참나무숲에 일렁이는 바람을 노래할 정도로 여유로웠다. 다시 차가 포장길을 달릴 무렵, 소형차는 진입을 금한다는 안내문이 막아선다. 사륜구동이 아닌 차로 오를 수 있을지 잠시 막막하다.걸어서 오를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용기를 내기로 했다. 가파른 급경사를 몇 구비 꺾을 동안에도 절은 보이지 않고 식은땀만 흐른다. 수많은 산사를 찾아다녔지만 이토록 험난한 오르막길은 처음이다. 내려오는 차라도 마주치면 난감하다. 담력 테스트
일명 육산이라 불리는 백원산 국사봉 기슭, 상주 시내가 지척에 보이는 곳에 도림사가 자리 잡고 있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지만 모두 훼손되어 변변한 법당조차 없는 절을 자용, 탄공, 법연 세 비구니 스님이 재건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마을을 지나 비탈길을 오르면 일주문 대신 600여 개의 장독이 먼저 반긴다. 오래된 독에는 건강한 시간들이 익어가며 향수에 젖게 한다. 탄공 주지 스님은 전통 사찰음식의 맥을 잇기 위해 사찰음식과 장 담그기에 열정을 쏟는 분이다.해마다 정월이면 3000장의 메주로 장을 담근다고 하니 그 정성과 규모가
산세가 빼어나 충청북도의 설악산이라 불리는 천태산, 그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영국사를 찾아 내비게이션에 하루를 맡긴다. 차는 산길을 한참 올라 화전민들이 살았을 법한 평평한 고원지대로 들어서고, 한 때는 밭이었을 것 같은 평지와 드문드문 몇 그루의 호두나무들이 보인다.영국사는 법주사의 말사로 527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했다. 그 후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해 절을 국청사라 부르고 지륵산이던 산 이름을 천태산이라고 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원 마니산성에 머물며 이절에 와서 기도를 드린 뒤 국태민안이 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