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강을 건널 때에 마지막 남기는 글을 세간世間에서는 사세辭世라 하고 불가에서는 임종게臨終偈, 열반송涅槃頌 혹은 입적게入寂偈라고도 한다.선승들이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소회를 짧게 압축하여 후세에게 주는 글 대부분은 한마디로 인생의 무상함이다.인간에게서 읽고, 쓰고, 느끼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대함이다.한낮의 태양처럼 찬란한 역사든, 깊은 밤의 달빛에 젖은 야사든, 선인들께서 남아있는 자들에게 삶에 있어서 다시금 내밀히 관조하게 하려는 마지막 가르침이며 오롯이 할喝이요 방棒이 아닐 수 없다.물론 삶의 등불을 켜주는 이는 죽은 자
죽지도 않았는데 죽었다는 헛소문이 내 인생에서 도합 세 번쯤 있었다. 그 첫 번째는 돌도 되기 전이었다는데 내겐 기억이 없다. 다만 자라면서 집안어른들에게서 종종 들었을 뿐이다. 그 두 번째는 스물이 훨씬 넘어서였다. 중학교 동창들 사이에서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나머지 세 번째는 미국에 살다가 귀국하여서 종적을 감추고 지인들과의 소식이 뜸했을 때였다. 나이 사십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난 여태껏 살아오면서 세 번이나 죽었던 사람이었다.죽지도 않았는데 죽었다는 소문이 어찌어찌하여서 났었는지는 통 모를
“은행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사람의 통제를 벗어난 체제로 그 체제는 이자와 이익을 먹고 커간다. 정상참작을 고려하지 않고 대출을 갚지 못한 자의 땅을 뺏어가는데 사람들은 그런 체제를 통제하지 못한다. 이미 이 회사는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지배체제가 되어 버린다.”존 스타인백이 ‘분노의 포도’를 통해서 한 말이다. 히틀러의 나치즘도 독일 시민들의 통제권을 벗어난 악의 지배체제가 되었고, 푸틴 정권 역시 러시아 국민과 유엔도 통제할 수 없는 전쟁 지배체제가 되었다.현대사회학자 피터 블라우는 “조직이 만들어 지면 그 조직은 만든 목적과
과거 일본에서 일어난 대지진과 인도네시아, 인도, 태국에 쓰나미가 지나갔을 때에 한국을 대표하는 모 목사가 이들이 우상숭배를 하기 때문에 내린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설교했다.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도 일부 종교인들은 하나님이 내린 징벌이라 했다.그렇다면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의 지진과 거의 100%가 기독교인인 아이티의 지진은 왜 일어났을까에 대해 합리적인 답변을 내어놓지 못했다.자연재해가 정말 하나님의 징벌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신학자들이 모여 성경을 연구했다.그 결과 가톨릭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
한 시대가 공유하는 정신과 문화양식, 이념과 신앙은 그 시대의 삶의 방식이 되는 보편적 정신으로 이를 시대정신이라 한다. 역사를 평가할 때에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평가하는 내재적 접근방법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는 외부적 접근방법이 있다. 과거 역사의 인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이 이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내재적 접근법으로는 높은 점수를 받고 이승만은 외부적 접근법으로는 백 년을 내다봤다는 높은 점수를 받는다. 백 년 앞을 내다보며 산 사람을 내재적 접근법으로 평가하기 보다는 백 년이 지난
최근 베이징 동계올림픽 경기 중 발생한 중국 선수 봐주기 편파 판정과 관련하여 중국을 대하는 감정이 더 악화되었다. 아울러 중국의 반한정서도 더 높아졌다.“소국 주제에 나대지 말라” “나라가 작아 하는 짓도 하찮다” “중국은 한국의 아버지”라는 댓글이 대변해 주는 중국인의 한국에 대한 생각을 황희 문체부 장관은 자신들을 대국(大國)으로, 한국을 소국(小國)으로 보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대국이어서 큰 생각을 하고 소국이어서 좁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중국인의 편견일 수 있다. 자신들이 가장 존경하는 등소평은 키가 150Cm 밖
교회 성장학에 있어서 두 이론이 있다. 양적성장이론과 질적성장이론이다. 피터 와그너와 맥거브란과 같은 학자는 양에서 질이 나온다면서 양적성장이론을 내세웠고 반면 독일 신학자 이말테 교수와 같은 분은 양은 질의 저하를 가져온다면서 질적 성장을 강조했다. 초기 한국교회는 양적성장이 필요하였기에 양적성장에 매달렸다. 덩치가 크면 힘도 세다는 물리적 논리를 교회론에 적용하여 교회도 몸집이 크면 힘도 세어진다고 하여 양적성장에 전념했고 성공했다. 그런데 1990년을 정점으로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하고 지금은 성장이 멈추거나 마이너스 성장 시대
장자가 사냥을 나갔는데 까치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활을 겨누는데도 까치는 눈치를 채지 못하였다. 눈앞에 왕거미가 있어 그 왕거미를 잡기 위해 집중하느라 뒤에서 활을 쏘려고 하는 장자를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 왕거미 역시 눈앞에 매미를 잡아먹기 위해 집중하느라 자신을 노리는 까치를 보지 못했다. 그것을 보고 장자는 내 뒤에도 누군가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내 앞에 있는 것을 탐하여 그것만 얻기를 집중하다 내 생명을 위협하는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눈을 시이불견(視而
역사가 이레니우스는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통치할 때에 요한이 소아시아 교회에 보낸 편지를 ‘계시록’이라 했다.도미티아누스는 평화유지를 위하여서는 폭력이 필요하다면서 폭력적 지배체제를 구축했지만 실상은 권력을 영구화하기 위한 지배체제였다. 폭력만으로는 백성들을 복종시킬 수 없자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신격화하여 숭배케 함으로 백성들을 복종케 하였다.이에 기독교인은 황제숭배와 폭력적 지배체제를 거부했고 그 결과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요한이 볼 때에 황제는 거짓 신이요 황제가 추구하는 평화 역시 거짓된 위장평화였다. 요한은 이
이병옥 박사의 ‘암을 손님처럼 대접하라’라는 책에 의하면 암은 “사랑받지 못한 세포의 반란”이라 했다.세포가 사랑받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세포는 자기방어를 위하여 극도로 이기적 세포가 되고 그것이 암세포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암세포를 적으로 여겨 몸 밖으로 몰아내려 한다. 그러면 암세포는 쫓겨나지 않기 위하여 더욱 강해지거나 쫓겨난 곳에서 또 다른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바로 전이(轉移)이다.이병옥 박사는 암을 내몰려고 하지 말고 손님처럼 대접하라고 한다. 그러면 대항이 느슨해지고 언젠가는 떠나가게 된다는
조지 오웰의 에세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주거 환경이 매우 열악하여 방 하나에 열 한 명이 살고, 화장실은 공용으로 사용하는데 200미터를 가야 하는 곳에서 사는 광부들에게 “주거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고 기자가 물었다. 광부가 대답했다.“심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들 그렇게 사는 것 아닌가요?”기자는 이들에게 정상적인 마을의 집을 보여 주면서 다들 이런 집에서 산다고 했다. 그제야 광부는 자신이 사는 마을의 주거 환경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개선 해 달라고
부자(父子)가 닮고 모녀(母女)가 닮는다는 말이 있다. 한 집에서 살다보니 은연중에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몸에 배어 무의식적으로 닮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자 칼 융은 잠재의식이라 했고 인간의 행동은 의식보다 잠재의식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잠재의식은 그가 사는 곳의 전통과 문화와 관습에 의해 형성된다. 이것을 굴레이니, 유산이니, 업보이니, 맥이라고도 하지만 칼 융은 그것을 ‘집단 무의식’ 또는 ‘잠세태’라고 했고 예레미야는 그것을 ‘찌끼(침전물)’라고 했다. 의식이 작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행위는 모두 잠재의식
이스라엘 사람들이 새해에 가장 많이 암송하는 성경구절은 예레미야 애가에 나오는 “하욤 하랏 올람”으로 “우리의 날들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예레미야가 살던 당시 이스라엘은 죄악이 만연하고 부패가 심하여 국력이 쇠하였고 그 결과 바벨론에 멸망 당해 식민지가 되었다.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수없이 변화를 외쳤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고 오히려 비난하였다. 정의의 통제권을 벗어난 시대의 흐름을 본 예레미야는 탄식한다. “혼인을 앞둔 사람은 결혼을 하지 말고, 결혼을 하여 임신한 자는 아이를 출산하지 말라” 출산과 더
성경에는 결산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중에 한 청지기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청지기란 주인의 자산을 대리 경영하는 사람인데 그 청지기가 주인의 자산을 탕진한다는 소식이 주인에게 전달된다.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결산하고 그게 사실이라면 해고하려고 했다. 그것을 안 청지기는 기름 백 말을 채무한 자를 불러 증서에 오십 말로 고쳐 쓰게 하고, 밀 백석을 채무한 자에게는 팔십 석으로 고쳐 쓰게 하여 탕감을 해 준다. 그렇게 호혜를 베풀면 자신이 해고된 이후에 이들이 자신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을 한 듯하다. 이는 당연히 배임
기독교인들에게 성탄은 신(神)이신 하나님이 인간인 예수로 탄생한 날을 의미한다. 이를 육화(肉化) 또는 체현(體現)이라 한다. 교리상 하나님의 속성은 전지전능과 계시지 않은 곳이 없는 무소(無所), 존재하지 않음이 없는 부재(不在),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시간, 모든 곳에 있다는 편재(遍在)이다. 그런 속성을 지닌 하나님이 제한적 공간에, 제한적 시기에, 한 사람의 육체 속에 갇혀 있을 수 없는데 한 시기에, 한 장소에, 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교리상 모순이라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고 모순된 것이기에 수많은 이론들이
프랑스가 히틀러에게 항복을 하자 독일에 사는 프랑스 사람들은 나치경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본 회퍼는 반 나치주의자 답지 않게 나치경례를 하라고 했다. 사람들이 본 회퍼를 향해 변절자라고 비난을 했다. 나치경례를 거부하던 자들은 나치의 탄압에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제 목숨 살리기 위하여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러나 나치경례를 용납했던 본 회퍼는 히틀러에 저항하다 형무소에서 처형을 당했다. 본 회퍼에게 경례하는 일은 목숨을 걸 만큼 가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목숨을 아껴 두었다가 정말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일이 생겼을 때 그는 도망가
개 중에 가장 무서운 개는 투견이 아니라 편견(偏見)이라는 말이 있다. 특히 권력을 가진 자가 편견을 가지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히틀러가 행한 일을 보면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 수 있다. 역사의 불행한 일들은 대부분 편견에서 비롯되었다. 기독교 역사에 성서에 대한 편견을 절대진리로 교리화 하여 패악을 끼친 일이 이루 말할 수 없다. 한 예로 어거스틴, 터툴리안은 여자가 남자의 일부로 만들어졌기에 여자는 남자의 종속물이며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간론을 주장하여 여성 억압과 마녀 사냥 같은 일을 자행하
게토(ghetto)는 중세 시대에 유대인거주지역으로 외부와의 접촉을 금지 시킨 곳을 의미한다. 유대인은 자의로 때로는 타의에 의해 게토를 이어갔다. 유대 땅에 대 흉년이 들자 유대인은 이집트로 피난을 간다. 마침 동족 요셉이 총리로 있었던 터라 쉽게 난민 수용이 허락된다. 그때 유대인은 고센 땅을 자신만을 위한 거주지역으로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고센은 유대의 게토가 되었다. 유대인이 게토를 원했던 것은 이집트에 동화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유대의 종교는 유일신앙으로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게토가 유대
힘겹게 우물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물을 긷는 한 노인을 보고 자공이 두레박을 사용해보라고 권면했다. 노인은 대답하길 “기계를 가진 자는 반드시 기계를 쓰게 되고 기계를 쓰다보면 언젠가는 기계의 종이 되어 버리게 된다”며 두레박의 사용을 거절했다. 두레박을 기계에 비유한 것이다. 기계에 너무 의존하다 보면 인심(人心)이 기심(機心)이 되어 인간본성을 잃어버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현대문명은 기계와 자본의 결합으로 이익을 추구하면서 편리함을 극대화 했지만 반면에 지구온난화를 불러와 자연이 파괴되고 기후변화로 인한 천재지변으로 동식물의
랍비이며 사회 운동가인 마커스는 부켄발트 강제수용소에 숨겨져 있던 904명의 아이들을 발견하고 이들을 구출하는데 힘썼다. 그때 구출 받은 아이 중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엘리 위젤이 있었다. 위젤은 유대인들이 교수대에서 죽어갈 때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탄식소리를 듣는다. 신의 부재는 위젤이 수용소에 있는 동안 내내 던진 질문이었다. 그 순간 그는 “나는 교수대에 죽어가는 저들과 함께 있다”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신이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부재를 깨닫고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