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떠날 여행 때문에 설레는 요즘이다. /언스플래쉬

곧 일본 여행을 떠난다. 이번 여행을 위해서 한동안 잠들기 전에 유튜브 속 일본 여행 영상을 많이 찾아봤다. 도톤보리에서 꼭 먹어봐야 할 초밥집이나 타코야끼집, 우메다의 쇼핑센터나 각종 오사카 관광 스팟을 체크하며 구글 지도를 하트 마크로 점찍어 두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자 행복이었다.

처음 가는 해외 자유여행이라 더욱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늘 여행은 즉흥적으로 떠나는 타입이라 잠은 아무데서나, 먹는 것도 아무거나 먹으며 하루 온종일 정처 없이 걸어 다니곤 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다르다. 얼마나 들떠있는지 여행 일정을 스스로 난생 처음으로 계획해서 모든 일정을 문서로 정리했을 정도다.

‘여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대학 졸업 이후 홀로 자유 기차여행을 떠났을 때다. 당시 만나던 연인과 헤어진 이후 이별의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기차에 올랐다. 당시 코레일에서 내일로 티켓을 끊으면 무궁화호에 한해서 기차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었기에, 수중에 있던 아주 적은 금액의 돈과 배낭만 챙겨 들고선 서둘러 기차에 올랐던 여행이었다.

처음으로 향한 곳은 포항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지역이면서 푸른 바다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다 싶어 택한 곳이었다. 포항역에서 내리자마자 역에 배치된 관광지 팸플릿을 보았고 별 다른 고민 없이 호미곶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당시 불안으로 휩싸인 적막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가까웠기에, 재빨리 파도와 갈매기 그리고 밝고 활기찬 관광객의 소란스러운 목소리로 적막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급해져선 간단히 숙소에 들려 배낭을 내려놓고 휴대폰과 카드만 챙긴 채 호미곶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분명 스마트폰이 알려주는 지도대로 따라가 버스 환승을 하려 했지만 어느 작고 외진 마을에 내리고 말았고 환승할 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점점 해는 지고 있었고, 마을은 조용했으며 마을회관조차 인기척을 찾을 수 없어서 계속 초조한 마음이 더해졌었다. 정처 없이 걷던 와중 다행히 나와 비슷한 처지의 관광객을 만나 정신을 차리고 택시를 불러 겨우 호미곶으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겨우 도착해서 해가 지는 것을 멍하니 앉아 보고 있는데 그때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이 여행은 아무래도 도망에 가까운 것이구나. 아무리 낯선 곳으로 멀리 도망친다 한들 뜨겁고 눅눅한 후회의 감정은 떨어트릴 수 없는 거로구나, 하며 물거품이 되어버린 모든 것들을 바라만 보았던 여름날의 습한 기억이 잔잔히 남아 있었다.

당시의 무력함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루 온종일 낯선 거리를 걸어 다니며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더 물 수 없도록 몸을 지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포항 다음은 부산, 그리고 경주 그 다음은 진주를 오가며 낯선 이들을 만나 새로운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고 또 헤어지며, 수많은 거리를 정처 없이 쏘다녔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시큼하게 파랗던 하늘, 묵묵히 우거진 초록과 그늘을 내어주던 커다란 나무들, 깊은 골목에서 묵묵히 머무르고 있는 오래된 집과 사람의 흔적들은 쓸쓸함으로 스스로를 내던지는 와중에 자꾸만 고개를 기울여 바라보게끔 했다. 내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들은 이토록 묵묵하고도 견고한데, 나는 왜 작은 이유로 흔들리는 건지 알 수 없었고 아리송한 의문은 더욱 외로운 도피로 느껴지게끔 했다.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가라앉는 기억들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이번 여행을 위한 짐을 싸다 불쑥 그날의 기차 여행이 떠오르고 말았지만 이젠 과거의 기억 위로 새로운 짐을 챙겨 넣을 수 있게 됐다. 시간이 많이 흘렀기도 하고, 사랑과 존중의 깊이를 다시금 헤아리면서 더는 과거 어린 날의 나의 모습에서 씁쓸함을 느끼지도, 필요 이상으로 애틋해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6월의 일본은 덥고 습하므로 얇고 가벼운 옷 위주로 잘 개어 넣고 다음으론 편한 잠옷과 슬리퍼를 담는다. 기초 화장품과 약, 액세서리류는 작은 통에 소분해서 투명 파우치에 챙겨 넣는다. 그렇게 새로운 여행의 기대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이번 여행은 과거의 후회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닌, 좋음을 가득 채워 올 여행을 할 것이다. 더없이 소중한 이와 나란히 낯선 길을 걸을 것이고, 그 지역의 유명한 음식을 먹고, 그 나라의 언어를 쓰고, 역사적인 곳도 방문하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대상을 오랫동안 누리며 가득 담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