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문 ①
6·25전쟁과 포항 정착

선린대학교 인산기념관에서 김종원 원장의 흉상을 바라보고 있는 김화문 원로장로. /김훈 사진작가 제공

포항의 정신을 상징하는 사람으로 선린병원을 세운 김종원 원장을 꼽을 수 있다. ‘할아버지 원장님’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김종원 원장은 이 땅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인술을 베푼 의인(義人)이었다. 김종원 원장이 1953년 포항에 세워진 미해병 기념 소아진료소의 운영을 맡은 이후 2007년 숨을 거둘 때까지 포항의 의료와 교육 분야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1962년부터 김종원 원장을 가까이서 모신 김화문 기쁨의 교회 원로장로에게 김 원장의 감동적인 삶을 들어보았다.

 

김종원 원장님을 1962년에 처음 뵈었으니 2007년 작고하실 때까지 45년간 모셨지.

원장님이 동산병원에 근무할 때 미국 선교단체와 동산병원, 미 해병대 그리고 경동노회 등 기독교계가 포항의 전쟁고아를 치료하는 진료소를 설립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그러던 차에 함께 남한으로 온 고모 가족이 포항에 있어서 찾아가다가 시내 우체국 근처의 포탄 웅덩이 속에 고아 여러 명이 들어가 있는 장면을 보게 된 거야. 그때 북한에 두고 온 세 아들이 떠오른 거지. 그 직후 대구로 가서 포항의 소아진료소를 자원했다고 해.

이한웅(이하 이) : 할아버지 원장님(김종원)을 곁에서 오랫동안 모셨지요?

김화문(이하 김) : 1962년에 처음 뵈었으니 2007년 작고하실 때까지 45년간 모셨지. 내가 기쁨의 교회 전신인 북부교회에 학생으로 출석할 때 원장님을 교회 장로님으로 먼발치에서 뵈었어. 그러다가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가 선린의원을 거쳐 정식 법인병원으로 출발하던 1962년에 조직을 갖추려다 보니 사람이 필요했던 모양이야. 그때 나는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항대학의 전신인 포항수산초급대학 상학과 2학년이었는데, 영덕 강구에 있는 동일제관이라는 통조림 제조공장에서 실습을 하고 있었지. 그때 북부교회 이성도 집사님한테서 연락이 온 거야. 선린병원 원장 장로님이 찾으시는데 한번 찾아뵈라고 말이야. 선린병원이 설립될 때 병원 직원은 대부분은 병원과 가까운 북부교회 성도였어. 경리나 회계 쪽으로 직원이 급하게 필요했던 거지. 마침 나는 부기 2급에 상학과를 다니고 있어 유리한 조건이었던 것 같고, 교회에서 원장님이 눈여겨보신 것 같아. 그렇게 김종원 원장님과 만난 후 원장님이 2007년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인연이 이어졌지.

이 : 병원에서 처음 맡은 업무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김 : 처음부터 경리 업무를 맡지는 않았아. 직원 수가 많지 않아 초기에는 모든 직원이 1인 3역, 1인 4역을 했지. 의약분업이 실시되기 전이라 병원 내에 약국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약봉지를 포장하고 배달하는 일부터 시작했어. 그 후에 경리와 회계 업무를 하고, 또 원무 등 병원 행정 업무를 두루 거치게 되었지.

이 : 1962년 선린병원이 개원할 때 포항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김 : 6·25전쟁 후 전쟁고아를 미 해병기념 소아진료소가 미군이 철수하는 바람에 더 이상 약품과 재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일반 환자를 받아 그 수익으로 고아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위해 선린병원을 세웠어. 그런데 원장님의 철학이 영리를 추구하는 개인병원은 안 된다고 해서 돈의 흐름이 투명한 재단법인을 세웠지. 그래서 초기에는 직원들이나 원장님이나 봉급을 제때 받을 수 없었어. 마침 전후 복구가 활발히 진행될 때여서 1962년 5월에 포항이 국제개항장으로 지정되고 6월에는 도립 보건소가 설치된 데 이어 8월에 선린병원이 문을 열었지.

이 : 장로님은 선린병원과 한동대 통합 업무를 위해 잠시 한동대학교에서 근무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선린병원에서 보내셨군요.

김 : 선린병원이 법인으로 전환된 후 32년간 선린병원에서 김 원장님을 모셨지. 정년 퇴임하고는 한동대학 법인 사무처장으로 5년 있었고. 거기서 나오니까 원장님이 “나 죽을 때까지 같이 있어야지”라고 해서 다시 선린병원에 들어가서 2010년에 퇴직했지.

이 : 김종원 원장님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 : 원장님을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렇게 부르면서 익숙해진 거지. 물론 처음부터 할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았고, 환자로 온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할아버지라고 불러서 그렇게 된 거야. 사실 나한테는 아버지뻘이지. 원장님이 북한에 두고 온 맏아들 정수가 1938년생으로 나하고 나이가 같아. 그래서 유독 나를 챙기신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이 : 원장님이 북한에 아들 셋을 두고 온 사연이 궁금하군요.

김 : 원장님은 북에 두고 온 세 아들 생각이 나서 그런지 주일날이면 교회 중고등학생들을 앉혀두고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많았어. 애들을 참 좋아했지. 그때 월남하신 이유를 들려주셨어. 평양의전을 졸업하고 김일성대학 의과대학의 전신인 평양의학대학 소아과 의사로 근무할 때 두 차례나 공산당에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해. 한 번은 환자가 남쪽으로 내려가 치료를 받겠다고 해서 진단서를 발급했는데, 이 사람이 38선에서 발각되는 바람에 원장님이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죽음 직전까지 갔다고 했어. 그때 마침 원장님이 평양에 파견된 러시아 고문의 아들을 치료해준 덕분에 가까스로 풀려났다고 해. 또 한번은 6·25전쟁 때 국군이 평양을 점령한 후 유엔 한국민사지원단(UNCACK) 병원에 근무하면서 미군과 한국군을 치료해준 것이 문제가 되었지. 1·4후퇴를 앞두고 인민군이 다시 평양으로 들어올 태세였는데 인민군에게 잡히면 처형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고 해. 그래서 걸을 수 있는 세 아들은 할아버지 집으로 보내고 아내와 맏딸 정숙, 젖먹이 막내아들 걸수만 데리고 야밤에 고모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급히 온 거야. 세 아들을 곧 찾으러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만나지 못했지. 그 후 원장님은 고모 가족과 2주 만에 대구에 도착해 동촌 근처 동촌교 밑에서 피난 생활을 하셨어.

 

북한에서 신혼 초 김종원 원장 부부.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제공
북한에서 신혼 초 김종원 원장 부부.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제공

이 : 그럼 북에 두고 온 가족 이야기는 안 하시던가요?

김 : 왜 안 했겠어. 원장님이 대구 동산병원에서 근무하시다가 포항으로 오신 것도 북에 두고 온 아들 생각 때문이지.

이 : 그 이야기는 나중에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고, 이산가족 상봉도 있었는데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셨겠군요.

김 : 당연히 했지. 국정원장을 지낸 임동원 씨와는 각별한 사이였어. 평양에 있을 때 같은 집에서 살았지. 임 원장도 1·4후퇴 때 단신 월남해 육군사관학교를 나왔잖아. 김 원장님을 아버지처럼 모시며 해마다 찾아왔지. 내가 김 원장님을 모시고 서울에서 임 원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아들 삼형제의 안부도 확인했고 상봉할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포기하셨어. 혹시라도 본인의 신분이 노출되어 북한에 있는 아들들이 피해를 볼까 봐서였지. 가끔 그런 말씀을 하셨어. “공산당, 당해보지 않으면 몰라!” 그 후 미국 시민권을 가진 맏딸 정숙이와 사위가 평양을 방문해 세 아들과 만나고 원장님께 전하는 편지를 받아왔어. 원장님은 그 편지를 참 소중하게 품고 다니셨지.

이 : 김 원장님은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시면서 어떻게 남한의 의사가 되었습니까?

김 : 원장님이 대구 동촌교 다리 밑에서 피난 생활을 하며 근처 공립병원에 일을 봐주다가 우연히 북한에서 함께 근무한 간호사를 만났지. 이 간호사가 자신이 근무하는 동산병원의 황용운 원장 서리를 소개해주었어. 원장님은 마침 북한에서 가지고 온 청진기와 평양의전 졸업장이 있어서 동산병원의 부탁으로 소아과 의사로 근무하게 되었지.

이 : 포항에 별다른 연고가 없는 원장님이 포항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 : 전쟁고아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지. 동산병원에 근무할 때 미국 선교단체와 동산병원, 미 해병대 그리고 경동노회 등 기독교계가 포항의 전쟁고아를 치료하는 진료소를 설립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그러던 차에 함께 남한으로 온 고모 가족이 포항에 있어서 찾아가다가 시내 우체국 근처의 포탄 웅덩이 속에 고아 여러 명이 들어가 있는 장면을 보게 된 거야. 그때 북한에 두고 온 세 아들이 떠오른 거지. 그 직후 대구로 가서 포항의 소아진료소를 자원했다고 해.

김화문

김화문 기쁨의 교회 원로장로는 김종원 원장을 그림자처럼 모신 인물이다. 그 시기는 1962년부터 2007년까지 45년 동안이다. 김 장로는 포항고를 졸업하고 포항수산초급대학 2학년 재학 중에 통조림공장에 실습을 나갔다가 김 원장의 부름을 받아 선린병원에 입사했다. 1938년생인 김 장로는 김 원장이 북한에 두고 온 아들 셋 가운데 장남 정수와 나이가 같다. 1962년 선린병원의 약국 보조사원으로 일을 시작한 김 장로는 경리과장, 원무과장을 거쳐 사무국장, 법인 사무처장을 거쳤다. 선린대학교 설립과 한동대학교 법인(사무처장) 업무를 맡았으며, 정년 후에는 선린병원과 한동대학교를 오가며 김 원장을 모셨다. 2007년 김 원장이 별세한 후에도 선린의료원에서 근무하다 2010년 퇴직했으며, 대동신협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대담·정리 : 이한웅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