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함산에 깃든 신라 역사와 경주 이야기
⑬ 천년 고찰의 향기 기림사·골굴사

기림사 천수천안

◇부처님의 수행처 ‘기림’이 절 이름

토함산은 불국사와 석불사 외에도 19개소에 달하는 사찰이나 불교 유적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기림사와 골굴사는 반드시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찰들이다. 양북면 호암리에 있는 기림사는 ‘토함산이 동해의 안개를 마시고 내뿜으면 그것을 흡수하여 담아낸다’는 함월산 자락에 있다. 신라 신문왕이 동해에서 만파식적을 얻은 다음 왕궁으로 돌아갈 때 기림사 앞 개울에서 잠시 쉬어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절이기도 하다. 해방 전까지는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린 큰절이었지만 지금은 도리어 불국사의 말사가 됐다.

부처님이 수행하던 시절 인도에는 ‘죽림정사’와 ‘기원정사’가 있었다. 부처님은 20년 넘게 기원정사에 머물렀는데 그 정사가 있던 숲을 기림(祇林)이라 불렀다. 이곳 기림사도 부처님이 정진했던 기림에서 왔다.

 

신라 초기 천축국 승려 광유 창건 설화 전해

임정사로 부르다 원효대사가 ‘기림사’ 개칭

다섯가지 맛 내는 오종수 있는 것으로 유명

장군 출현 두려워한 일본인들 장군수 메워

천수 천안 관세음보살 모신 전각인 관음전

고려청자 빛깔 불상 삼천불 모신 삼천불전

매월당 김시습 숨결 살아있는 매월당 영당

골굴사, 석불사 뛰어넘어국내 최초 석불사

기림사 창건 광유 일행 자연굴 다듬어 건립

스님들 참선 수행 무술 선무도 잘 알려진 곳

가파른 바위벽 오르면 감실에 부처님 모셔져

감실 밑 작은 석굴 원효대사 열반 든 법당굴

기림사 경내.
기림사 경내.

기림사는 신라 초기 천축국(인도)의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창건 당시 기림사의 이름은 임정사(林井寺)였다. 우물 정(井)으로 절 이름을 지었듯 이 절의 사적기(事跡記)에는 다섯 가지 맛을 내는 오종수(五種水)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적광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 옆 장군수를 마시면 신체가 튼튼하고 기개가 있는 장군이 나온다는 이야기 내려온다. 장군수는 장군(독립운동가)의 출현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이 메워버렸다고 한다. 오종수는 장군수를 비롯해 물맛이 좋은 오탁수, 눈이 맑아지는 명안수, 마음이 편안해지는 화정수, 단 이슬과 같은 감로수인데 지금은 화정수만 기세 좋게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다.

다섯 가지 물은 차를 달이는 최고의 물로 알려져 있다. 기림사는 창건 초기부터 차와 깊은 관련이 있다. 오종수를 길어 부처님께 차를 다려 공양하는 것(獻茶)을 수행법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기림사 약사전에는 국내 유일의 헌다벽화(獻茶壁畫)가 있다. 이 절의 역사가 차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희귀한 그림이다. 임정사는 이후 원효대사가 절(도량)을 확장하면서 기림사로 개칭했다. 창건 시기는 선덕여왕 12년(643년)으로, 1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풍스런 사찰이다. 철종 14년(1863년), 본사와 요사채 113칸이 불타 없어졌는데 당시 지방관이던 송정화가 중건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림사 진남루
기림사 진남루

기림사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고색창연한 대적광전을 비롯, 수령 500년 이상 된 큰 보리수나무와 목탑 터가 있는 지역과 성보 박물관, 삼성각, 명부전, 관음전 등이 있는 지역이다.

선덕여왕 때 건립된 후 무려 8차례나 중건한 대적광전(大寂光殿)은 기림사의 주 건물로 정면 문짝에는 소슬 빗살로 문양을 만든 꽃 창살이 아주 예쁘게 장식돼 있다. 단청은 입히지 않았지만 채색을 한 어느 꽃보다 아름다워 몰래 떼어가고 싶을 정도다. 소박하면서도 단아하다. 부안 내소사 꽃살문이 천하일품이라 하지만 기림사의 꽃살문도 이에 못지않다. 대적광전은 이전에는 대웅전이란 명칭을 사용하다가 ‘진리’를 의미하는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을 모시면서 대적광전으로 명칭을 바꿨다.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대덕광전 안에 모셔진 3불로서 중앙이 비로자나불이고 좌측이 약사불, 우측이 아미타불이다. 이 부처님들은 향나무로 틀을 만든 뒤 그 위에 진흙을 바르고 다시 금칠 한 것이다.

대적광전의 적(寂)은 번뇌가 없는 고요한 진리의 세계를 말하며 광(光)은 참된 지혜가 온 우주를 찬란히 비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골굴사 감실
골굴사 감실

 

◇매월당 김시습의 영당도 있는 곳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응진전과 목탑 자리가 있다. 오백나한을 모신 응진전은 각기 다른 모습의 나한(부처님의 제자)이 모셔져 있다. 나한의 모습이 개성이 강하고 사실적이어서 앞에 서 있으면 마치 말이라도 걸어올 것만 같다.

마당에는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어진 기림사 삼층석탑이 있다. 불국사의 다보탑이나 석가탑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단정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삼층석탑 지붕돌에는 세월의 더깨가 더덕더덕 붙어 있다. 기단의 오른쪽은 주저앉았고 받침돌 가운데는 홈이 파여 있다.

기림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은 관음전이다. 천수 천안(千手 天眼)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인데 수많은 손과 눈이 마치 공작이 날개를 펼친 것 같다. 천수 천안은 수많은 중생을 보아야 하고 수많은 중생에 손을 내밀어 구제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대적광전 왼쪽에는 약사전과 진남루가 있다. 진남루는 ‘남쪽을 제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남쪽은 일본을 두고 한 말이다. 기림사는 임진왜란 때 전략적 요충지로 의병과 승병이 활동하던 진원지 역할을 했으며 승군지휘소도 이곳에 있었다.

 

법당굴 (원효대사 입적한 굴)
법당굴 (원효대사 입적한 굴)

삼천불전의 부처님은 불상마다 수인이 다르다. 삼천불전은 특이하게 고려청자 빛깔의 불상 삼천불이 모셔져 있다. 과거 천불, 현재 천불, 미래 천불의 부처님이 어디에나 항상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건칠보살반가상(乾漆菩薩半跏像)은 기림사 내 유물전시관에 보존돼 있는데 누구나 들어가서 무료 관람할 수 있다. 건칠불이란 진흙으로 속을 만들고 그 위에 삼베를 감고 다시 진흙을 바른 다음, 옷칠을 반복해서 만든 후 속의 진흙을 빼 버린 부처님이다. 국내에는 건칠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가치가 크다.

기림사는 매월당 김시습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쓰며 머문 곳은 용장사였지만 매월당의 영당(사당)은 기림사에 있다. 매월당 생전에 인연이 없던 기림사에 영당이 차려진 이유는 용장사에서 치루던 제사가 고종의 금령으로 철거되자 경주 유림들이 이를 애석해하며 기림사 경내에 영당을 재건했기 때문이다.

김시습은 원래 유학자였지만 단종 3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해 전국을 유랑했다고 한다.

기림사 마당에는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보리수가 자란다. 목탑이 있던 자리에서 나와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이 눈물겹기만 하다.

 

선무도 공연.
선무도 공연.

◇‘한국의 소림사’ 골굴사

기림사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골굴사는 선무도로 잘 알려진 절이다. 절 입구에는 다양한 선무도 동작을 한 조각들이 열을 지어 전시돼 있다. 역동적인 입구부터 10여 분 정도 올라가니 골굴사 사찰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글이 보였다.

선무도는 스님들의 참선 수행 방법 중 하나다.달마대사가 중국의 소림무술을 창안한 것처럼 우리 선승들이 깊은 산속에서 면벽수행(벽을 보면서 참선을 하는 것)을 하며 산짐승들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 한국형 무술 선무도다. 국난이 닥쳤을 때는 스님도 승군이 되어 전쟁터에 나섰는데 선무도를 익힌 스님들은 그들을 이끄는 중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골굴사와 선무도 대학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골굴사는 불교문화 체험 프로그램인 ‘템플스테이’가 생겨나기도 전인 1992년부터 선무도 수행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선무도 대학은 불교 무술로 알려진 선무도를 체계적으로 보급하기 위해 골굴사 주지 적운 스님이 설립한 곳이다.

골굴사는 기림사를 창건한 광유 일행이 자연 굴을 다듬어 만든 국내 최초의 석굴사원이다. 석불사의 석굴보다 기원이 오래된 석굴인 셈이다. 조선 후기의 유명한 화가 정선은 이곳을 배경으로 유명한 ‘골굴석굴도’를 남기기도 했다.

골굴암이 세워진 이곳은 옛날 화산 분출로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암석은 비바람에 약해 쉽게 깎여나간다.

암석이 비바람에 깎일 때 암석 안의 크고 작은 덩어리들이 빠져나가 수많은 구멍이 생겼다. 이 구멍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졌다. 이런 구멍들이 수없이 발달한 것을 ‘타포니(tafoni)’라고 부르는데, 골굴사의 골굴암은 타포니 동굴을 다듬어서 석실을 만들고 불상을 배치한 석굴이다. 단단한 화강암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 신라인들이 암석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웅전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바위벽을 타고 감실에 부처님이 모셔져있다. 자연 석굴에 지붕을 얹어 만든 간이 법당이다. 인공석굴로 가는 길은 제법 높이가 있는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부처님께 향하는 길이 가파르고 길어 마치 한걸음, 한걸음 험난한 수행의 여정을 떠나는 것 같다.

석회암에는 모두 12개의 석굴이 있다. 굴마다 작은 불상이 있거나 설법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암벽 제일 꼭대기에는 마애불상이 온화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높이는 약 4m, 너비는 약2.2m다. 곱슬머리인 나발의 정수리에는 상투(육계)가 있고 귀는 길게 늘어져 있다. 왼손은 단전에 오른손은 손상된 모습이지만 오른쪽 무릎으로 향하고 있다.

감실 밑 작은 석굴에는 원효대사가 열반에 든 법당굴이 있다. 겉모습은 일반 법당과 비슷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천장도 벽도 모두 석굴로 돼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대사가 입적한 뒤 아들 설총은 아버지의 뼈를 갈아 실물 크기의 조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설총은 한때 법당굴 부근에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최병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