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식 ④
해병대 교관으로 1961년 제대

가리산 탈환 뒤 방어 전투.

한 사람이 한 도시와 인연을 맺는다는 건 ‘운명적’이다. 해병대 1기로 입대해 6·25전쟁을 거치며 온갖 수난과 고통을 겪었음에도 이봉식 선생은 전역 후에 자신이 살 곳으로 ‘해병대의 도시’ 포항을 선택한다. 만 18세에 해병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후배 해병을 교육하며 30대 초반까지 살았던 그는 어떤 이유로 고향이나 서울이 아닌 포항을 ‘제2의 고향’으로 선택하게 된 걸까?

 

신병훈련소에서 구대장을 했지. 그 시절 해병대에는 일본 해군에서 복무한 사람들이 꽤 많았어. 지금은 대부분 사망했고, 살아 있다면 백 살을 넘었겠지. 휴전되면서 진해 덕산 비행장을 비워주고 훈련소를 경화동 앞으로 옮겼어. 거기에 목조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을 훈련장으로 2~3년 사용했지. 그러다가 훈련소 일부를 전투 훈련을 하는 상남훈련대로 또 이전했어. 내가 훈련소를 떠나 보급 계통에서 일한 건 2년 정도야. 보급소대 선임하사도 했고 보급중대 관리도 했어. 1961년 10월 28일 제대하고 3~4일 만에 바로 포항으로 왔지.

홍 : 지금의 부인을 찾아서 부산을 헤맨 것도 전쟁이 한창이던 때군요.

이 : 그렇지. 그즈음 해병대가 적 소탕 작전을 하며 북쪽으로 올라갔는데 춘천까지 가면서 수많은 산에서 전투가 벌어졌어. 죽은 대원도 많았고 부상병도 많았지. 남한에 내려온 중공군과 인민군 중 다시 북한으로 올라가지 못한 부대와 전투를 벌인 거야. 그들이 방공호를 파고 숨어 있으면 우리는 눈이 쌓인 곳까지 올라가 치열하게 싸웠어. 그 과정에서 희생자가 많았지. 이렇게 하면서 1951년 3월 하순에 홍천까지 올라갔어. 이후 후퇴해서 홍천 가리산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졌는데, 산 정상에 우리 부대가 주둔했어. 중공군이 못 내려오도록 진지를 치고 방어를 한 거지.

홍 : 그 유명한 가리산전투가 벌어진 겁니까?

이 : 중공군은 통상 야간에 습격하는데, 어느 날 아침에 총소리가 나서 순찰을 가다가 총에 맞았어. 쇄골 쪽을 만져보니 피가 흐르는 거야. 높은 지역에 있으니 부상당한 나를 데리고 내려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잖아. 천만다행으로 총알이 뼈에 스치기만 했는지 목숨을 위협하는 큰 부상은 아니었어. 부대원들 8명이 달라붙어 나를 산에서 데리고 내려오는데 온통 바위산이고 고지대니 끌고 오기가 정말 힘들었을 거야. 두세 시간 걸려 겨우 내려오니 저만치 헬기가 대기해 있더군. 그걸 타고 대구 제1군병원으로 갔지.

홍 : 다친 군인들이 많았겠습니다.

이 : 많은 해병이 죽고 다쳤어. 대구에서 부산으로 가니 부상병이 많아 병실이 모자라더군. 복도에다 매트리스를 깔고 부상병을 받을 정도였지. 나는 해병대니까 진해로 후송해야 한다고 해서 다시 진해로 갔어. 해군병원 군의관이 “심각한 부상이 아니니 20일 후면 퇴원해도 좋다”고 하더군. 그 후 치료받고 회복되었지. 해병대사령부가 부산 용두산 꼭대기에 있을 때인데 퇴원하고 거기서 일주일가량 대기했어. 다들 “전투가 없는 부산에 있게 해주겠다”고 하는데, 나는 우리 대대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 내 목숨을 살린 전우들 곁으로 가는 게 맞잖아. 전투를 치르며 부대원들과 정도 깊이 들었고.

홍 : 전쟁터로 돌아가니 상관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이 :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마음으로 돌아갔어. 철이 없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가보니 ‘해병대 5대 작전’으로 불리는 도솔산전투가 진행되고 있었어. 대대본부에 가니까 “어? 너 여기 왜 왔어”라고 하더군. “후방에는 못 있겠습니다. 제 부대로 가겠습니다”고 하니 “그렇다면 대대본부에서 임시 작전선임 겸 근무선임하사를 하라”고 하더군.

홍 : 전투병이 아닌 행정병이 된 거군요.

이 : 험한 전투를 계속해야 하는데 대대 본부요원이 별로 없었어. 소대 병력이 거의 대부분 부상당하거나 죽을 경우에 시체를 수습하고 부상자 후송을 하는 인력이 필요했지. 심지어 대대장도 탄약통을 짊어지고 다닐 정도로 어려운 전투였어. 그런 전투를 15일 동안 치렀지. 그렇게 도솔산전투를 직접 겪고 인민군을 북쪽으로 퇴각시켰어. 도솔산전투가 끝난 후 다시 부대 편성을 하니 7월 초가 되었지.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부대를 위로하기 위해 방문했어.

홍 : 이승만 대통령 방문 때는 어땠습니까?

이 : 연대본부로 오라고 해서 갔어. 1~3대대 선임하사들이 전부 갔지. 한참 앞에서 대기하니 들어오라고 하더군.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해병대는 무적이다’라고 쓴 글을 받았어. 우리가 “이게 뭐냐”고 물으니 “대통령이 하사하는 것”이라고 하더라고. 그때는 그게 귀한 줄 몰랐어. 대대에 갖다주며 “이걸 주던데요”라고 하니까 대대장이 챙겼지. 내가 가지고 있었다면 혼란스러운 전쟁통에 잃어버릴 수도 있었을 거야. 여하튼 그 후 우리 부대는 서울을 지키러 갔어. ‘강한 부대가 수도를 지켜야 한다’는 상부의 뜻이 있었겠지. 그래서 해병 1연대가 중동부 전선에서 철수했어. 전쟁 때 많은 전우가 죽었지. 휴전할 때까지 29기가 입대했는데, 그 기수까지는 지금도 참전 수당 35만 원가량을 받고 있어.

홍 : 그 후 해병대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이 :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한 후에 서해 쪽으로 옮겨갔어. 파주 장단지구지. 거기서 사천강 전투가 있었어. 적이 밤이면 밤마다 포를 쏘아댔지. 힘든 전투였어. 나는 대대본부에 있었기에 일선에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많은 희생을 지켜봤어. 지금 해병대 2사단이 있는 김포 앞을 해병대가 지킨 거야. 그러던 와중에 휴전되어 전쟁이 끝난 줄 알았는데, 조금이라도 점령지를 넓히려고 서로가 포를 쏘았어. 그러다가 전투가 멈췄지.

홍 : 원산에서 만난 부인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이 : 전쟁이 잠잠해지니까 원산에서 만난 아가씨 생각이 났어. 큰아버지가 괴산 부군수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지. 그래서 편지를 썼더니 2년 만에 답장이 왔어. ‘외박을 가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파주 장단에서 청주를 거쳐 증평으로 완행열차를 타고 갔지. 아가씨 집은 증평에서도 20리쯤 떨어져 있었는데 ‘국민학교로 오세요’라고 해서 가보니 그 학교 교사였어. 20리를 가려고 자전거 점포에 들러 사정을 설명하고 자전거를 빌렸지. 선물하려고 당시에는 귀했던 간고등어를 사서 싣고 갔어.

 

도솔산에서 전사한 전우를 위해 나무에 충령비를 쓰고 있는 해병대 용사.
도솔산에서 전사한 전우를 위해 나무에 충령비를 쓰고 있는 해병대 용사.

홍 : 가보니 지금의 부인이 있던가요?

이 : 학교에 도착하니 아내가 교무실에서 걸어 나오는데 2년 전에 잠깐 본 얼굴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어. 어쨌건 아내 나이 스무 살 때 처음 만나고 스물두 살에 다시 만난 거야. 아내가 “우리 집으로 갑시다”라고 청해서 고개를 넘어 자전거를 끌고 집에 도착하니 아내의 어머니와 남동생이 있었어. 나중에 처남은 매형이 해병대에 있으니 해병이 되겠다고 해서 해병 간부후보생이 되었지. 항공병과였는데, 포항으로 와서 월남전에 두 번이나 참전했어. 헬기 조종사였고 해병대 중령으로 제대했지.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의 권유로 미국에 가서 헬기를 사오기도 했어. 그런데 안타깝게도 군포에서 안개 속을 비행하다가 사망했지. 아내의 유일한 동생이었는데 안타까운 일이었지.

홍 : 전쟁이 부인과의 결혼을 맺어준 것이군요.

이 : 올해로 만난 지 73년이고, 결혼한 지 71년이 되었어. 4남매를 낳았고 자식들 모두 포항에 살고 있어. 어디서 인터뷰를 청해오면 항상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해. 개그맨 유재석이 진행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가서도 말했지. 아내는 큰 대회에서 상을 받을 만큼 글씨를 잘 썼어. 지금 부모를 보살핀다고 셋째가 와 있는데, 그 애 나이가 예순넷이야. 힘에 부쳐 셋째가 자리를 비울 때면 막내아들이 제 엄마를 돌봐주고 있어. 나도 아내를 챙겨야 하니까 외출하는 게 쉽지 않군.

홍 : 자식 넷을 뒀으니 손자 손녀도 많겠습니다.

이 : 많은 건 아니고 네 명 있어. 증손자도 있고. 모두 포항에 사니까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아. 세상 어디에도 피붙이처럼 서로를 위해주는 사람들이 없잖아.

홍 : 1953년 휴전 이후 1962년까지 해병대 교관으로 일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 신병훈련소에서 구대장을 했지. 그 시절 해병대에는 일본 해군에서 복무한 사람들이 꽤 많았어. 지금은 대부분 사망했고, 살아 있다면 백 살을 넘었겠지. 휴전되면서 진해 덕산 비행장을 비워주고 훈련소를 경화동 앞으로 옮겼어. 거기에 목조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을 훈련장으로 2~3년 사용했지. 그러다가 훈련소 일부를 전투 훈련을 하는 상남훈련대로 또 이전했어. 내가 훈련소를 떠나 보급 계통에서 일한 건 2년 정도야. 보급소대 선임하사도 했고 보급중대 관리도 했어. 1961년 10월 28일 제대하고 3~4일 만에 바로 포항으로 왔지.

홍 : 제대 후 포항으로 오게 된 이유가 있나요?

이 : 글쎄 말이야. 서울에서 해병대 선배가 좋은 직장을 마련해놓고 오라고 하는데도 가족들 데리고 포항으로 왔어. 이건 운명이라고밖에 못 하겠네. 내가 열아홉 살 때부터 죽음과 삶을 함께한 해병대 근처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겠지. 처음엔 포항 오천 사격장 근처로 이사 왔어. 해병대와 결별하면 되는데 왜 해병대가 있는 포항으로 왔는지 모르겠어. 먹고살 길도 마땅치 않았고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다만 친구들이 포항에 많았지.

대담·정리 : 홍성식 기자 / 사진 출처 : 해병대사령부 ‘사진으로 본 해병대 50년사(1949∼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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