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포항 <4>
구룡포 ②

포경선 모형.

1945년 8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고 한반도에서 일본인들이 떠난 후에도 구룡포의 활기는 여전했다. 풍부한 어자원과 잘 정비된 항구는 구룡포를 동해안의 대표적인 항구로 유지하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현재 구룡포의 인구는 1만 명이 채 안 되지만 1970년대에는 3만 5천여 명이나 되었다. 한때 구룡포에 가면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구룡포는 번성했다. 포항이 부럽지 않았고, 구룡포의 항구는 포항의 항구보다 활기가 넘쳤다.

 

해방이후 일본인들이 떠난 후에도
풍부한 어자원과 정비된 항구 ‘활기’
‘개도 만원짜리 물고 다닌다’ 소문

구룡포항, 전국 가장 많은 대게 위판
1970년대까지 포경업이 성행한 곳
뒷골목 고래고깃집엔 단골들 발길

호미곶 함께 경북서 해녀 가장 많아
뭐니뭐니해도 ‘과메기의 고장’ 명성
대부분 꽁치지만 청어 소규모 유통

강사리에는 90톤 넘는 고인돌 유적
용암 분출하다 멈춘듯한 주상절리
한반도의 동쪽 땅끝마을은 석병리

구룡포항에서는 다양한 생선이 들어오고 위판된다. 한 예로 대게 하면 영덕 대게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대게가 들어와 위판되는 곳이 구룡포항이다. 구룡포의 목 좋은 횟집은 대부분 대게를 주메뉴로 팔고 있다. 왁자지껄한 구룡포시장에 가면 웬만한 생선은 다 있고, 싼 가격에 살 수 있다.

구룡포 뒷골목에 있는 고래 고깃집에도 단골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구룡포는 광복 이후 1970년대까지 포경업이 꽤 성행한 곳이다.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있는 제1동건호라는 포경선이 구룡포가 과거에 포경기지였음을 말해준다. 선체 앞에 부착된 70미리 포는 고래를 향해 작살을 날리던 실물이다. 포경선을 탔던 선원들은 대부분 작고했고, 지금은 대여섯 명만 생존해 있다.

구룡포의 해녀도 명성이 높다. 호미곶과 더불어 경북에서 가장 많은 해녀가 있는 곳이 구룡포다. 이제 해녀는 모두 60대 이상의 고령이다. 수입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바닷속을 누비며 성게, 미역, 전복, 소라 등을 채취하는 험한 일을 젊은 여성들이 선호할 리 만무하다. 고령의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짠해진다.

구룡포는 뭐니 뭐니 해도 과메기의 고장이다. 과메기를 빼놓고 구룡포를 얘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겨울 한철 과메기를 팔아서 1년 내내 먹고사는 사람들이 꽤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인 2017년에는 과메기 매출액이 약 560억 원이었다. 과거에는 바닷가 덕장에서 과메기를 건조하는 모습이 구룡포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사라진 옛 풍경이 되었다. 지금은 과메기 공장에서 깨끗하고 위생적으로 건조한다. 세월은 과메기를 만드는 방식도 바꿔놓은 것이다.

원래 과메기는 청어로 만들었지만 청어가 잡히지 않자 꽁치로 대체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구룡포 연근해에 그렇게 많던 꽁치의 어획량도 줄어들자 원양에서 들어오는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고 있다. 그렇다고 청어 과메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청어 과메기 맛을 잊지 못해 찾는 이들이 있어 적은 양이나마 유통되고 있다. 지역 내에서만 유통되던 겨울철 별미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과메기는 겨울이 되면 홈쇼핑, 포털사이트, 택배 등 다양한 경로로 전국에 팔려나간다. 앞으로 과메기가 어떻게 변신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어자원 감소는 구룡포의 골칫거리다. 최근에는 예전처럼 많은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어자원의 남획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기후변화로 수온 등 바다 생태계가 바뀐 게 주원인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어만리 호천리(漁萬里 虎千里)’라는 말이 있다. 하룻밤 사이에 바닷고기는 만 리를 가고 호랑이는 천 리를 간다는 뜻이다. 고기는 수온에 그만큼 민감하다. 바다 생태계가 바뀌면서 수온도 바뀌고 수온을 따라 고기도 움직이는 것이다. 어자원 감소는 구룡포뿐만 아니라 국내 모든 바닷가 마을의 공통 숙제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도 있기 마련이다. 구룡포에 닥친 이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고인돌과 주상절리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구룡포에는 아득한 옛이야기가 곳곳에 남아 있다. 구룡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유적은 강사리에 있는 고인돌이다. 90톤이 넘는 이 고인돌을 통해 청동기시대 구룡포에 꽤 큰 규모의 공동체가 존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강사리 바로 옆에는 고래의 전설이 살아 숨 쉬는 다무포 마을이 있다. 강사리의 고인돌과 다무포의 고래를 연결하면 이 마을에 고래 사냥을 하던 선사인들이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의 날개를 펴게 된다.

구룡포 삼정리 구룡포해수욕장 근처에 가면 특이한 지질 현상인 주상절리(柱狀節理)를 볼 수 있다. 주상절리는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지표면에 흘러내리면서 식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규칙적인 균열이 생겨 형성된 것이다. “우주는 지구를 저질러놓고/용암 같은 점액질의 시간을 흘려보냈다”(김주대, ‘시간의 사건’ 일부)는 시구절이 떠오르는 곳이다. 구룡포의 주상절리는 화산이 폭발하면서 용암이 분출되다가 갑자기 멈춘 듯한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구룡포 항구.
구룡포 항구.

석병리, 동해안의 땅끝마을

바람이 거센 바닷가 근처는 날렵하고 튼튼한 말을 키우기 좋은 적격지다. 거센 바람 속을 달려본 말들은 바람보다 빠르게 더 멀리 달릴 수 있을 터이다. 바로 조선 최고의 군마를 키우던 국영 목장이 구룡포에 있었다. 지금은 말을 방목해 키우던 석성(石城)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석성은 구룡포읍 석문동에서 동해면 발산리까지 호미반도를 가로지르는 7.8㎞ 구간에 높이 2∼3m로 쌓았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보면 석성은 약 1400년 전에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 폐쇄되었다.

이 구간의 약 4㎞는 말목장성 탐방로로 조성되어 있다. 호젓한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국영 목장에서 성장하며 훈련받은 군마들은 한반도 곳곳을 달리며 용맹을 떨쳤을 것이다. 해발 205미터의 석성 정상에 오르면 봉수대 터를 만날 수 있고, 봉수대 터 옆에 있는 전망대에서 구룡포와 호미반도 능선, 영일만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전남 해남에 땅끝마을이 있듯이 경북 구룡포에도 땅끝마을이 있다. 한반도의 동쪽 끝은 구룡포읍 석병리다. 포항 출신의 시인 박남철은 석병리를 ‘태양이 사는 곳’이라 했다.

“태양이 사는 곳, 땅끝마을 석병리
이곳은 이제 그대로.
갯목 시,
해맞이 군,
일어서는 바다 읍!”

- 박남철 ‘위대한 고향 포항시’ 부분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지명은 아무 곳에나 붙일 수 없다. 아홉 마리 용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을 감당할 수 있어야 비로소 ‘구룡’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구룡포에 가면 지명을 감당할 수 있는 기운이 넉넉히 느껴진다. 비록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남아 있지만 구룡포의 장구한 역사를 생각한다면 그 기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구룡포의 오랜 역사와 자연 그리고 사람들의 의지는 그 아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구룡포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무엇보다 구룡포는 태양이 사는 곳이자 늘 푸른 바다와 동의어가 아닌가. 결코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력이 구룡포를 늘 새롭게 만들어갈 것이다.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김훈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