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흔적만 남아도 부처님의 형상
감은사지·장항리사지·고선사지

감은사지 삼층석탑
감은사지 삼층석탑

◇항왜의 정신을 담아 건설한 감은사

폐사지는 아무리 번성했던 절터라 해도 처연한 느낌이 든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흔적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폐사지는 풀 섶에 탑만 홀연히 서 있거나 돌덩어리나 기왓조각만 쓸쓸하게 흩어져 있다.

그 텅 빈 공간에 무슨 아름다움이 남아 있을까 싶지만 폐사지를 방문하게 되면 묘하게 마음을 건드리는 것들이 있다.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풍경소리와 염불 소리가 낭랑하게 울리고 향 내음이 나는 것 같다.
 

감은사지
높이 13m, 우리나라 삼층석탑 중 가장 큰 규모
지대석 사용해 장중함과 안정감·상승 이미지
감은사지 동쪽 바위섬이 유골 보관한 대왕암

고선사지
고선사탑, 하늘 찌를듯한 찰주 없고 부드러워
주지였던 원효대사 행적 기록한 서당화상비
거북이 받침 유실됐다가 동네 우물터서 발견

장항리사지
절터에 서탑인 오층석탑·동탑 석재 남아있어
석조불대좌, 팔각 아랫단·연꽃 원형대좌 윗단
1923년 도굴꾼들에 의해 탑·불상 폭파되기도

지금은 고인이 된 사진작가이자 폐사지 여행전문가였던 이지누 선생은 “폐사지는 무엇을 외우는 곳이 아니라 교리나 절의 역사 이런 것 다 떼놓고, 천년 세월을 품은 주춧돌 위에 앉아 느끼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에 있는 감은사(感恩寺)지는 진정한 울림을 주는 폐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감은사지는 혼자 있어도 다른 폐사지에서 느껴지는 적막함이나 쓸쓸함이 없다. 감은사지에서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장엄하게 서 있는 두 개의 석탑이다. 장대하고 압도적이다. 몇 개의 유구와 두 개의 삼층 석탑(국보 제112호)만 있는데도 드넓은 사적지가 꽉 찬 느낌이다. 유홍준 교수 말처럼 쌍탑이 연출하는 공간감이 장중하고 드라마틱하다. 탑은 부처님의 무덤이다. 부도탑이나 주춧돌, 기단석도 폐사지의 풍경을 이루지만 탑만 있어도 부처님의 형상이 느껴질 정도로 존재감이 확실하다.

신라는 ‘탑의 나라’라 할 정도로 수많은 탑이 있다. 그 중 좌우에 같은 탑을 세우는 감은사의 쌍탑 1금당 형식이 수많은 사찰 가람배치의 표준이 됐다. 불국사 석가탑이 완벽한 조형미의 절정이라면 감은사 쌍탑은 석가탑으로 향하는 신라미술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셈이다.

감은사지 석탑이 삼층탑이라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백제의 정림사지나 의성 탑리의 석탑 장항리 석탑은 모두 오층석탑이다. 삼층석탑보다 오층석탑이 더 시각적으로 입체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삼층석탑을 만든 이유는 통일된 새 국가의 이미지에 맞는 탑을 건설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보다 장중하고 엄숙하고 안정된 탑이 새 시대에 각광 받았다는 것이다. 삼층 밖에 안되는 탑에 상승하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지대석을 사용했다. 상·하 지대석은 층수에 포함되지 않지만, 안정감을 주면서 동시에 상승감도 주는 역할을 한다. 상층부에는 길이가 3.9m나 되는 철찰주를 꽂았다.

감은사탑은 우리나라 삼층석탑 중 가장 큰 규모로 총 높이가 무려 13m나 된다. 철찰주를 제외하고도 무려 9.1m나 되는 장중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감은사지는 토함산에서 발원해 양북면을 가로질러 동해로 흐르는 대종천의 하류에 있다. 감은사는 문무대왕의 왜구 퇴치의 염원이 담긴 절이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통일 군주 문무왕은 바다 건너 왜(倭)가 무거운 걱정거리였다. 왜의 침입은 신라를 초기부터 괴롭혔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대왕이 부처의 힘을 빌려 왜구를 격퇴하고자 감은사라는 절을 짓기 시작했다. 감은사의 원래 이름은 진국사(鎭國寺)였다. 하지만 불사 건축은 문무왕 생전에 끝내지 못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법사에게 “내가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문무왕은 유언에 따라 화장된 뒤 동해에 안장됐으며,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불사를 이어받아 682년에 감은사를 완공했다.

원래 감은사지 금당터 돌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용혈)을 하나 뚫었다고 한다. 용이 된 문무대왕이 절로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려고 마련한 것이었다. 감은사지 동쪽의 봉길해수욕장 맞은편에는 작은 바위섬이 있는데, 이곳이 왕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보관한 대왕암(大王岩)이다. 문무대왕릉(대왕암)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는 문무대왕을 참배하기 위해 만든 작은 정자 이견대(利見臺)가 있다.

이견대는 ‘주역’의 ‘비룡재천이견대인’(飛龍在天利見臺人), 하늘을 나는 용이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라는 의미의 글귀에서 따온 이름이다. 삼국유사에 ‘커다란 용이 바다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돼 있다. 지금 건물은 1970년에 발굴조사 된 초석에 근거해 1979년 새로 지은 것이다.

감은사는 문무대왕릉이 있는 바다와 물길이 이어지게 만든 구조 등을 보아 문무대왕릉과 함께 세트로 계획,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감은사를 완성한 신문왕은 동해에 있던 작은 섬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 내려와 파도를 따라 왔다 갔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신문왕은 이견대에 와서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에 보관했다. 그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다. 그런 이유로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 명작 고선사탑

경주시 보덕동 암곡리 경주박물관 뒤뜰에 있는 고선사탑은 감은사 석탑과 쌍둥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모양이 닮았다. 스케일과 형태는 거의 감은사탑과 비슷한데 하늘을 찌를 듯한 찰주가 없고 선의 마무리가 약간 부드럽다. 좌중을 압도하는 장중함은 감은사탑 못지않다.

원래 고선사탑이 있던 고선사지는 토함산 북쪽 기슭의 암곡동에 있었다. 1975년 덕동호가 건설되면서 암곡동 고선사터가 물에 잠기면서 고선사터에 흩어져 있던 여러 문화재와 삼층석탑과 비석 받침 등을 국립 경주박물관 야외로 옮기게 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명작인 고선사탑이 감은사지 석탑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고선사는 신라 신문왕(681~692) 때 원효대사가 주지 스님으로 계셨던 곳이다. 고선사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원효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 비문 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

비문을 지탱하던 비신 아래 거북이 모양의 받침 부분은 유실됐다가 1968년 경주시 동천동 인가 우물터에서 발견됐다. 동네 아낙들이 중요문화재인 것을 모르고 빨래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고려사에도 고선사가 나온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선사의 규모는 감은사보다 더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금당터는 물론, 강단터와 중문터 등의 건물 규모가 상당하고 기와 전돌 등 수많은 문화재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추론하고 있다.
 

경주 장항리사지 석탑
경주 장항리사지 석탑

◇도굴범에 의해 훼손된 장항리사지

토함산 동남쪽 계곡에 있는 장항리사지도 빼놓을 수 없는 통일신라시대 절터다. 절터가 있는 계곡은 대종천의 상류로 감은사터 앞을 지나 동해로 흘러간다. 절을 지은 연대나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데, 장항리라는 마을 이름을 따서 ‘장항리사지’ 혹은 ‘탑정사’라고 부르고 있다.

절터에는 서탑인 오층석탑과 파괴된 동탑의 석재, 그리고 석조불대좌가 남아 있다. 금당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의 석조불대좌는 2단이다. 아랫단은 팔각형으로 조각이 새겨져 있고, 윗단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대좌 모양이다. 서탑은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장항리사지 동쪽으로 약 1㎞ 지점에 금광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발파 작업을 위해 다이너마이트가 이용됐다. 1923년 도굴꾼이 서탑의 사리장엄구와 불상 내부의 복장물(腹藏物)을 노리고 광산에서 훔쳐 온 다이너마이트로 탑과 불상을 폭파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후 약 10여 년간 불상과 탑은 파손돼 흩어진 채로 방치됐다. 1932년 서탑을 복원하고 파손된 불상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탑은 1966년 대종천 계곡에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모아 복구했다.

장항리사지는 계곡 사이의 좁은 공간을 이용해 쌍탑을 세우고 그 뒤쪽 중앙에 금당을 배치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쌍탑 1금당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을 보이나, 아직 강당과 회랑의 자리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최병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