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웅 ⑤
산업화 이전 포항의 바다 풍경

1950년대 초반 포항 송도해수욕장에서 한흑구 선생(뒷줄 오른쪽).

산업화 이전 포항의 바다 풍경은 어땠을까? 이북의 유년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낚시를 다녔던 한동웅 선생은 포항에 와서도 낚시를 즐겼다. 덕분에 누구보다 영일만과 동빈내항, 칠성천, 해도 염전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낼 수 있었다.

 

나는 낚시 마니아야. 낚시하다가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으니까. 포항은 낚시하기 좋은 곳이어서 나는 포항을 좋아할 수밖에 없어. 어릴 때 아버지와 동생과 셋이 낚시를 자주 다녔어. 과거 영일만에는 뱀장어가 엄청 많았지. 그리고 청어·정어리·고등어·감성돔 등 온갖 고기가 다 있었지. 동빈내항에는 민물장어가, 칠성천에는 황어와 고등어가 많이 잡혔지. 해도 염전 쪽에도 가자미·숭어 떼가 올라오고….

강과 바다가 곁에 있으니 수영도 잘했어. 동네 아이들과 형산강을 건너 송정까지 헤엄쳐 가기도 했지. 송정 백사장에는 멸치·숭어 떼 뛰놀고, 조개도 엄청 많아서 마대에 넣으면 무거워서 들지도 못했어.

김 : 교직에 오랫동안 계셨는데, 감회는 어떻습니까?

한 : 우여곡절 끝에 교단에 섰는데 38년 6개월 근무하고, 그중 16년이나 교장을 했으니 복 받은 사람이지.

김 : 교사로서 좌우명이나 원칙 같은 게 있었다면.

한 : 나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어. 정의와 정직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게 원칙이라면 원칙이었지. 간혹 학교에 납품하는 사업자가 미끼를 던질 때가 있는데 나는 원칙대로 단호하게 대처했어. 민주적인 교장이 되려고 노력했고, 교사들하고도 잘 지냈지. 교장으로 있으면서 교사들에게 고함을 지른 적은 딱 한 번이었어. 한 교사가 절차와 예의를 무시하고 행동하길래 화를 냈지. 그 직후 화를 낸 것은 사과하고 좋게 풀었어.

김 : 교단에 있을 동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한 : 동지상고는 한 학년의 절반은 진학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취업반이었어. 또 진학반을 우열반으로 나누었는데, 한번은 내가 열(劣)반의 담임을 맡게 되었지. 나는 당연히 우(優)반의 담임을 맡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그래서 교감에게 내가 왜 열반을 맡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우반 아이들이야 알아서 잘할 테지만 열반 아이들은 잘 이끌어줄 유능한 교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하는 거야. 일리가 있는 말이었지. 그래서 열반을 맡고 보니 학급 아이들 태반이 태권도, 유도, 검도의 유단자더군. 그 단(段)을 모두 합하니 100단이 넘어. 그래서 내가 아이들에게 말했지. “나는 참 행복하다. 이렇게 든든한 무술 유단자를 제자로 거느리고 있으니 말이야.” 그 아이들하고 참 잘 지냈는데 기어이 사고가 나더군.

김 :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나 봅니다.

한 : 포항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주로 가을 소풍을 가는 길이었어. 기차 안에는 경주의 한 고등학교 교사가 있었는데, 유도 유단자인 우리 반 아이와 시비가 붙은 거야. 해병대 출신인 교사가 아이한테 봉변을 당했지. 나는 그 교사한테 용서해달라고 빌었지만 용서는커녕 사건을 확대하려고 하더군. 나는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백방으로 애를 썼는데 결국 경북도교육청에서 사건을 알게 되었지. 그 일 때문에 나는 감봉 처분을 받았어. 동지교육재단 하태환 이사장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니 특유의 목소리로 잘했다고 하시더군. 하태환 이사장은 그런 분이었어. 그 감봉이 교직에 있는 동안 내가 유일하게 받은 징계야.

김 : 다른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선생님은 낚시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한 : 나는 낚시 마니아야. 낚시하다가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낚시를 배운 덕분이지. 한번은 릴낚싯대를 들고 호미곶에 갔더니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나와서 내가 낚시하는 장면을 지켜보더군. 호미곶 주민들이 릴낚싯대를 처음 본 거지. 포항은 낚시하기에 좋은 곳이어서 나는 이래저래 포항을 좋아할 수밖에 없어.

김 : 부자지간에 낚시도 자주 다녔겠습니다.

한 : 그랬지. 내가 어릴 때 아버지와 동생 동명이 그리고 나 셋이서 낚시를 자주 다녔어. 나룻배를 타고 영일만에 나간 적도 여러 번 있었지. 과거 영일만에는 고기가 엄청 많았어. 특히 바닥을 뱀장어로 깔아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뱀장어가 많았지. 하루는 얼마나 큰 뱀장어가 잡혔는지 아버지도 기분이 꺼림칙했던 모양이야. 영일만 이무기가 올라온 것 같다며 용왕님께 잘못한 걸 빌고 집으로 가자고 하셨어.
 

동빈내항(1961년).  /김진호 사진작가 제공
동빈내항(1961년). /김진호 사진작가 제공

김 : 영일만에 어떤 어종이 많았습니까?

한 : 온갖 고기가 다 있었지. 청어와 정어리는 정말 많았어.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였지. 조업 나간 뱃사람들이 청어와 정어리를 적당히 싣고 들어오면 될 텐데, 욕심을 못 이기고 갑판 가득 싣고 들어올 때가 있어. 그러다가 선착장 가까이 와서는 고기 무게를 못 이겨 배가 가라앉기도 했지. 고등어 떼가 영일만에서 뛰어오를 때는 장관이었어. 요즘은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다는 감성돔도 지천이었고.

김 : 고래를 보신 적도 있습니까?

한 : 내가 어릴 때는 고래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지. 1950년대 후반으로 기억하는데, 여름철 송도해수욕장에 고래가 얕은 바다까지 들어왔어. 그때 해병대 하계 휴양소가 송도에 있었거든. 해병대 대원들이 모터보트를 급히 띄워서 총을 쏘며 고래를 쫓아갔지. 피서객들은 박수를 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난리가 났어. 그런데 고래가 잡힐 리 있나. 도구 쪽으로 유유히 사라지더군. 영일만에 고래밥으로 통하는 곤쟁이가 많았어. 그러니 영일만에 고래도 많았을 거야. 학꽁치 잡을 때도 곤쟁이가 최고 미끼인데 지금은 구할 수가 없지.

김 : 동빈내항이나 칠성천 쪽은 어땠습니까?

한 : 비 내린 다음 날 동빈내항에 가면 황토가 씻겨 들어와 누렇게 변해 있었어. 그런 날에는 민물장어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혔지. 칠성천에는 상류까지 황어와 고등어 떼가 올라왔어. 어느 날엔가 칠성천에서 낚시를 하는데 탄띠가 올라오는 거야. 6·25전쟁 때 희생된 군인의 탄띠지. 그 실한 고기들이 사람 먹고 자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

김 : 해도 염전 쪽에도 고기가 올라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 : 염전 사이로 가자미와 숭어 떼가 올라왔지. 가자미는 힘이 좋아서 잡는 재미가 쏠쏠했어. 숭어를 잡으려고 해도 다리 근처에 사람들이 싸릿대로 물길을 막고 가마니를 깔아두었어. 그러면 팔뚝만 한 숭어가 싸릿대에 걸려서 가마니 위로 펄쩍펄쩍 뛰어올랐지. 그뿐만이 아니야. 당시에 송도다리가 ‘찢어져 있다’고 했어. 배의 돛대가 지나갈 수 있도록 다리 사이를 살짝 비워둔 거지. 그 위에 염전으로 유명한 염동골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황어와 감성돔이 올라왔어.

김 : 수영도 잘하셨습니까?

한 : 강과 바다가 곁에 있으니까 웬만한 아이들은 수영을 잘했지. 동네 아이들과 헤엄쳐 형산강을 건너 송정까지 가기도 했어. 당시 송정에는 사람의 발길이 거의 없었거든. 송정 백사장에 멸치 떼와 숭어 떼가 뛰어오르기도 했어. 조개는 또 얼마나 많았던지 마대에 넣으면 무거워서 들지도 못했어.

김 : 생선을 좋아하시겠습니다.

한 : 말해 무엇하겠어. 특히 고래고기를 좋아해. 교직에 있을 때는 퇴근하면 시내 대흥식당에서 살다시피 한 적도 있어. 그 집에서 고래고기를 즐겨 먹었지. 아동문학가 손춘익이 아버지를 따랐기에 나와도 친했어. 하루는 손춘익과 구룡포에서 고래고기를 안주 삼아 술을 거나하게 마셨어. 남은 고래고기를 시멘트 포장지에 둘둘 말아서 포항행 완행버스에 탔지. 그러고는 버스 뒷좌석에 앉아서 고래고기를 꺼내 또 술을 마신 거야. 입맛을 다시는 승객들이 있길래 어울려서 술판을 벌였지.

김 : 술 인심이 좋았던 시절의 얘기군요.

한 : 아마 이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을 거야. ‘날로, 하머, 과타.’ 대폿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다 보면 그 옆에 한 술꾼이 쓸쓸하게 앉아 있을 때가 있어. 그에게 소주잔을 권하면 ‘날로’라고 해. 풀이하자면 ‘나에게 술잔을 주는 겁니까?’ 하는 뜻이야. 조금 있다가 또 술잔을 권하면 ‘하머’라고 하지. ‘벌써’라는 뜻이야. 한 뜸 들였다가 또 한 잔을 권하면 껄껄 웃으면서 ‘과타’라고 해. ‘과하다’라는 뜻이지. 난생처음 보는 술꾼끼리도 그렇게 정을 나누던 시절이었어.

김 : 1940년대 후반부터 포항을 지켜보셨습니다. 포항의 변화상을 짤막하게 말씀해주신다면.

한 : 1960년대 후반까지 포항은 한적한 항구도시였지. 그때는 구룡포항이 더 활발했어.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포항은 상전벽해의 변화가 일어났지. 포항이 이렇게 변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대담·정리 : 김도형(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