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뒤늦게 넷플릭스에서 ‘소년심판’을 보았다. 자식을 잃었지만 가해자가 촉법소년이란 이유로 제대로 처벌되지 못한 아픔을 간직한 심은석 판사와 소년원 출신 차태주 판사를 중심으로 몇 개의 에피소드가 속도감 있게 전개되어서 총 10회를 정주행하고 말았다. 드라마는 소년들의 불행한 환경에 초점을 맞춰 옹호하거나 그들의 범죄를 파고들어 촉법소년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지도 않는다.

‘소년심판’은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사실을 전달한다. 차태주를 교화하여 판사가 되는 것에 결정적 역할을 한 강원중 부장판사는 ‘문광고 시험지 유출사건’에 아들이 관련되어 본인의 정계 진출에 걸림돌이 되자 사건을 편파적으로 진행한다. ‘무면허 뺑소니’ 사건에서 백미주는 몰카 사건의 피해자이지만 무면허 뺑소니 방조 혐의에 자유롭지 못하다. 곽도석은 백미주를 위해 몰카 사건을 해결하려다 죽음에 이른 피해자이지만, 무면허 운전으로 누군가를 죽게 만든 가해자이기도 하다.

한병철은 ‘폭력의 위상학’에서 오늘날 폭력은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 실재성에서 잠재성으로, 육체성에서 심리성으로 이동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현재의 폭력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전이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소년심판’의 강원중과 그의 아들이 교육 시스템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나와 내 주변을 지키려는 욕망이 놓여있다. 그 절박한 목적 앞에 누군가의 고통은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난 21일 경기도 수원에 사는 세 모녀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자살하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2014년 발생한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과 판박이로 우리 사회의 복지 시스템이 갖는 허점을 보여준다고 한다. 왜 이런 비극은 되풀이될까? 복지 시스템 미비를 거론하는 것은 문제의 절반만 바라보는 것이다. 가령 완벽한 복지 시스템을 구축하면 이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비극은 되풀이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폭력은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시스템은 인간의 내면을 장악하여 자신을 폭력의 가해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의 주춧돌인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고정된다. 이런 구조에서 좀 더 나은 환경에 올라타고 싶다는 욕망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공동의 목표가 될 때, 자본의 궤도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은 혐오의 시선을 견디다 자신을 파괴할 수 있다.

‘소년심판’의 소년들은 가난한 집안 혹은 부유한 부모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성장했다. 후자의 부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과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자식을 외면한 부류이다. 그래서 소년들은 외친다. 부모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환경이 범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사회적 폭력의 가해자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죽음 앞에 월세를 내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이 드는, 바로 그 내면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