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가 만났다
오상균 광복회 대구시지회장

광복절 77주년을 맞았지만 광복의 의미는 갈수록 퇴색하고 있는 것 같다. 휘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감격했던 기억이 추억이 되고 있는 것처럼.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은 태극기와 독립을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민족정기를 선양하고 국민정신으로 승화시키겠다고 선언한 광복회가 한때 국민의 비난을 받았다.

오상균 광복회 대구시지회장은 “독립유공자 유족이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닌 만큼 겸손하고 선열의 이름을 욕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사과한다.

친일청산에 대해서는 “당연히 해야 한다. 목표는 맞지만 방법은 학자와 관계자들의 연구를 거쳐야 한다. 급진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광복 77주년… 광복의 의미 갈수록 퇴색
대구·경북 유공자 2천400명 ‘전국 최다’
보훈처 서훈 못받은 유공자는 6천800명
의료혜택·보훈수당 등 적절한 보상 필요
젊은세대에 독립운동 정신 일깨워주고파

- 다시 광복절을 맞았다. 광복회 지회장으로서 광복절을 맞는 소회부터 듣고 싶다.

△77주년 광복절을 맞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광복절 행사가 축소된 것이 무엇보다 아쉽다. MZ세대들에게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일깨워주고 광복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자꾸 줄어드는 것 같아 더욱 그렇다. 나는 광복회 지회장으로서 젊은 세대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알려주고 또 그 정신을 일깨워주기 위해 노력하겠다.

- 독립유공자 유족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독립유공자 유족이지 본인이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겸손하고 선조들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는 거다. 선조들의 풍찬노숙하면서 자신과 가족을 돌보지 않고 국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그 고결한 정신을 생각하고 이어받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 광복회 대구지회장으로 취임한 지 한 달여가 지났다.

△그동안 지역에 ‘사과’하러 다녔다. 광복회 중앙회에서 일어난 작금의 사태가 유족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 보기에도 부끄러워 대신 사과하면서 광복회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광복회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는 다짐이다.

지금 중앙회장은 장준하 지사의 손자인 장호권 씨가 맡고 있다. 보궐선거에서 김구 선생의 손자 김진 씨 등과의 선거에서 이겼다. 어쨌든 김원웅 직전회장의 여러 불미스러운 일과 이번 회장 선거 과정에서 독립유공자 자제들이 선조들의 위명에 먹칠을 하는 추태를 보이거나 들추어진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우리나라의 독립유공자는 얼마나 되며 또 지역의 독립유공자는 얼마나 되나.

△국가보훈처 자료에 의하면 7월14일 현재 1만7825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유공자의 세대 중 1명만이 유공자증을 받고 광복회원이 되고 다른 가족은 유족이 된다. 독립유공자의 본적지를 국가자료로 추정하면 대구와 달성군을 합쳐 180명 정도 되고 경북이 2천282명으로 합계 2천400명 정도 된다. 이는 전국 독립유공자의 13.8%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곳이 우리 지역이다.

- 대구 경북지역에서 독립운동가들이 특별히 많이 배출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이 지역은 유림의 고장이자 선비의 고장이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국제 성세를 판단하고 민중을 지도하는 사회지도층으로는 유림들이 많은 역할을 했다. 선비의 고장인 이 지역에서 자연히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결과였을 것이다.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깨어있는 지식인으로서 항일 정신과 독립 의식이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석주 이상룡 선생이나 왕산 허위 선생의 가문을 보면 알 수 있다.

- 아직 서훈 받지 못한 유공자들은 얼마나 될 것으로 보나.

△정확히는 판단할 수 없지만 여러 자료를 보면 20만~40만명으로 추산한다. 50년 일제 강점기 동안 얼마나 많은 분이 독립운동을 했는지는 국가가 다루어야 할 문제다. 특히 만주나 러시아지역에서 활동하신 분들은 남북분단으로 자료 접근이 어려워 역사 속에 묻혀버린 감이 있다.

3·1운동 집회인원이 204만6천938명이었고 사망자가 7천508명, 부상자 1만5천849명, 수감자가 4만6천306명이었다고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기록했다. 거기에 비하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서훈 받은 독립운동가가 1만8천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적은 숫자다.

현재 보훈처가 발굴하고도 후손이 없거나 소재파악이 안 돼 서훈을 전수하지 못한 독립유공자가 6천800명이나 된다.

- 우리나라의 유공자 보훈은 어떤 것이 있고 독립유공자의 보훈은 어느 수준인가.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과 보상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는 것 같다.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되고 있는 국가유공자들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독립유공자와 호국유공자, 그리고 민주화유공자가 그것이다. 독립유공자는 동시대에 겪은 신체적·재산적 고통과 피해는 엄청나게 그 후손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독립유공자는 ‘3대에 걸쳐 망했다’는 자조적인 말이 나돌 만큼 후손들에게 준 피해는 컸다. 다른 단체도 후손에게 영향을 주지만 독립유공자 유족과 비교하기는 곤란한 점이 있다. 독립유공자 유족들은 조상의 독립운동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후손들이다. 국가에서 독립운동을 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발적인 헌신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과 재산과 기득권을 버린 독립운동가들은 그야말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슈퍼에고’에 해당하는 분들이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가난한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근대화 과정에서 뒷전에 밀려나기도 했으니 유공자들의 공적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료혜택이나 보훈수당 등에서 지자체마다 다르고 국가보훈처에서는 타 보훈단체와의 형평성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 현재 독립운동가,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 절차와 방법에서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독립유공자가 받는 포상에는 5단계의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과 건국포장, 대통령장으로 나누어진다. 지금 가장 급한 것은 독립유공자의 훈격을 결정할 때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즉 같은 독립운동이라도 훈격이 달라 유족들이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 할 때 후세가 보상금 받으라고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하는 반응이 나올까 두려워 선뜻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자칫 선대의 빛나는 독립운동 사실에 흠이라도 될까 우려해서 유족들이 서훈이 낮게 평가되어 있다며 재심요청을 해도 국가보훈처 공훈심사 부처에서는 재심의를 해주지 않고 있다.

- 선친인 오기수(吳麒洙·1892~1952) 지사의 행적에 대해서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해 달라.

△나는 아주 어렸을 때 문중에서 큰아버지인 오 지사의 양자로 입적됐다. 큰집의 두 분 누님과 함께 자랐다. 그래서 내 기억에는 안방에 앉아 계시던 눈먼 노인의 기억밖에는 없다.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눈이 보이지 않아 고생을 하셨던 것이다.

어렸을 때는 선대의 많은 재산을 선친 옥바라지에 날려버렸다는 집안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어릴 때 가난하게 자랐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대개 그러하듯 재산적 피해로 제대로 공부를 못 한 분들이 많다. 나 또한 반항심을 많이 가졌지만 지금 이 나이에는 무한한 자긍심을 느낀다.

- 석주와 함께 오 지사의 건국훈장 애족장이 훈격으로서 부족하다고 했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은 석주 이상룡 선생이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라면 훈격이 매우 낮은 편이다. 또 오 지사의 행적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보니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너무나 과소평가돼 있었다. 그래서 지난 2005년 보훈청에 재심을 신청했더니 “미서훈된 분에 대한 공적심사를 우선 하고 있다. 따라서 기서훈자에 대한 훈격 조정을 위한 공적 심사는 계획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해해 달라”고 답변을 해 왔다.

- 오기수 지사의 서훈은 어떻게 받았나.

△내가 20대 초반이었던 1977년 신간회의 박노수 지사께서 독립유공자 신청을 할 때 “나보다 오기수 지사의 공적이 큰데 같이 포상 신청을 올려야 한다”며 우리집을 찾아 왔다. 그렇게 해서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고 1990년에야 건국훈장을 받았다.

오 지사가 1919년 6월 중국 만주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대구지법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1920년 9월 대구 남문시장에서 동지들과 일제에 협력한 조선 관리들을 처단할 목적으로 폭탄을 제조해 암살하려건 계획으로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1년 복역한 것이 서훈 공적의 전부다.

- 그렇다면 오지사의 주요 행적과 서훈 받지 못한 활동 이력은 어떤 것이 있나.

△사실 확인과 재판 기록을 발굴해보니 실제 감옥살이도 3차례 4년10개월이나 됐다. 1929년 8월 만주 장춘경찰서에 붙잡혀 신의주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언도받고 상소해서 징역 2년 판결 받아 1931년 석방됐다. 그때 고문으로 상한 몸을 치료하기 위해 고향 의성으로 내려왔다.

2년 뒤인 1933년 12월 의성적색독서회 사건 주범으로 체포돼 대구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관련자 2명은 오 지사보다 적은 징역 2년6월 판결을 받았지만 그들은 그 사건 하나만으로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당시 오 지사는 결국 무죄판결을 얻어낼 때까지 1년7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기준에 따르면 4년 10개월 수형기간은 애국장(5년 이상 활동 또는 4년 이상 옥고)을, 활동기간을 기준으로 하면 독립장(8년 이상 활동)에 해당된다고 보고 재심을 신청했다.

- 유족으로서 오 지사에 대해 평가하면.

△오 지사는 의성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서울로 유학, 경성관립공업전습소를 졸업하고 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잠시 근무하기도 했다. 3·1운동을 계기로 만주로 건너가 대한독립단에 가입했다가 의성으로 귀향한 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고 고문 후유증으로 눈이 멀어 힘든 노후를 보내야 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독립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변하기 시작하자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주로 사회주의 운동을 했으나 해방 후에는 사회주의 활동을 접고 자유민주주의로 건국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의성을 뒤흔든 ‘의성적색독서사건’은 당시 신문에 의성 공산당 재건 운동으로 보도되었다. 자유민주주의자로 전향했음에도 ‘공산당’ 말만 나오면 움츠려드는 시대에는 쉬쉬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 독립유공자 유족으로 보훈 절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겠다.

△이처럼 재심을 바라는 유족들이 많으나 상훈법에 따른 제약과 공훈을 욕심내는 후손으로 비춰질까봐 재심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대한민국 역사에 영원히 남을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에 선친의 독립운동 사실 중 만주 의성에서의 기록들이 공훈록에 등재되지 못하여 유족으로서 죄송하고 안타까운 심정이다.

공훈법이 개정되어 독립유공자의 공훈에 정당한 평가를 해주기를 바라며 독립운동으로 피폐해진 가문의 명예를 되찾으려는 유족들의 간절한 바람이 회한으로 남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경우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