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농밀한 어둠이 내려앉은 깊은 밤의 영일대해수욕장.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7월 말을 지나 8월 초순이다. 무더위는 한국 어느 곳에서도 피하기 어렵다. 이 기간은 한국 사람의 절반이 여름휴가를 떠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산과 계곡으로의 피서도 좋다. 하지만, 대부분의 휴가객들은 ‘피서’라고 하면 가장 먼저 푸른 파도 넘실대는 바다부터 떠올린다. 한국인들은 특히 여름날의 바다를 좋아한다.

‘코로나19 사태’가 한국을 뒤덮기 전 경상북도와 강원도, 부산의 해수욕장엔 해마다 수십 만 명의 인파가 북적였다. 바로 지금 이 시기 즉 7월 말, 8월 초가 그랬다.

다시금 재확산 추세를 보이는 코로나19의 위험성을 감지한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포기하고 국내 해변으로 휴가를 떠나고 있다.

천정부지로 오른 항공료와 높아진 외국에서의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 위험성이 비교적 안전한 한국 바다로의 여행을 선택하는 이유일 터.

영일대해수욕장과 칠포해수욕장을 비롯한 포항의 해변과 영덕과 울진 등 경북 일대 해수욕장을 지나는 도로는 주말과 평일 할 것 없이 정체가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해변마다 넘쳐나는 휴가객과 짜증스런 날씨에도 바다로 향하는 가족과 연인의 얼굴은 환하고 발걸음은 가볍다. 이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온전한 휴식을 누린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 아닐까.

 

‘갯마을 차차차’·‘동백꽃 필 무렵’ 등
드라마 유명세 힘입어 ‘포항 해변'
올 여름 힐링 휴가지로 인기몰이
도심 한복판 위치 영일대해수욕장
긴 백사장·다양한 편의시설 ‘매력'
파도 소리 여운 오롯이 느끼려면
장기 신창리 해변 야간산책도 좋아

□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는 낮의 바다도 좋지만…

지난 7월 31일 서울에서 긴 시간을 운전해 연인과 함께 포항으로 휴가를 온 K씨를 월포해수욕장에서 만났다.

“1년 내내 도심에서 직장과 집만을 오가는 서울 사람들에겐 포항의 푸른 바다가 마치 꿈속 이상향 같이 느껴진다”는 그는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와 ‘동백꽃 필 무렵’을 보며 올여름 휴가지로 포항을 선택했다고 한다.

월포 해변 일대는 ‘갯마을 차차차’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탔다. 드물게 파도타기가 가능한 한국 해변으로도 이름이 높은 월포해수욕장은 물론, 인근 청하시장에도 드라마 제작의 흔적이 남아 있어 젊은 여행자와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실제로 그날 월포해수욕장엔 100여 명 가까운 이들이 파도타기를 즐기고 있었다. 초보부터 전문가 수준까지 다양한 서퍼(surfer·파도타기 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월포해수욕장엔 파도타기가 처음인 사람들을 위한 강습소와 장비대여점이 만들어져 있다. 비단 여름만이 아닌 겨울에도 적지 않은 서퍼들이 월포 해변을 찾는다는 게 파도타기 장비대여점의 설명.

시내 한가운데 자리한 영일대해수욕장 역시 포항으로 여름휴가를 온다면 빼놓을 수 없는 방문지 중 하나다.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이나 강릉 경포대해수욕장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접근성이 좋고, 각종 편의시설도 잘 준비돼 있다. 2km 가까운 긴 백사장과 다양한 형태의 카페와 주점, 한식부터 일식, 거기에 이탈리아 요리까지 두루 즐기는 게 가능한 영일대해수욕장은 수심이 낮아 어린아이들이 물놀이를 즐기기에도 그저 그만이다.

영일대 해변에서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는 건 한국 사람만이 아니다. 적지 않은 외국인들도 구릿빛으로 몸을 태우며 공놀이를 하는 모습을 바닷가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국적 풍경까지 선사하는 것.
 

고요함 속에서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는 경험을 해볼 수 있는 장기면 신창리 해변.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고요함 속에서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는 경험을 해볼 수 있는 장기면 신창리 해변.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 북적이는 한낮의 해변이 아닌 고요한 밤바다에선…

취향과 성향의 문제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다. 8월 초순 한낮의 바다는 관광객과 여행자들이 북적일 수밖에 없다.

인파 넘치는 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 한낮의 해변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낮의 바다에선 찾아보기 힘든 고요와 한적함을 원하는 여행자가 있다면 밤바다로의 산책을 권해보고 싶다.

‘코로나19 사태’가 있기 전이다. 필리핀 보라카이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눈처럼 곱고 하얀 모래가 깔린 보라카이 화이트비치의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전 세계에서 온 여행자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수영을 하거나, 요트를 빌려 먼 바다로 나가 시원한 바람을 맞거나, 비치발리볼을 구경하거나, 선탠을 하거나…. 낮의 보라카이 해변은 수천 명의 인파로 시끌벅적했다.

바로 그 해변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한 건 혼자서 산책을 나간 밤바다에서였다. 자정을 넘긴 시간, ‘언제 이곳이 그렇게 북적였던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용한 밤의 해변은 고요함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선물해줬다.

낮에는 들리지 않던 파도소리가 너무나 선명했고, 물결에 부딪쳐 속살거리며 굴러가는 조그만 자갈까지도 눈에 들어왔다. 나 홀로 원시의 풍경 속에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쓸쓸했지만, 그 쓸쓸함이 좋았다.

연이어 오래 전에 읽은 이성복(70)의 시 ‘바다’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런 노래다.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
눈앞을 가린 소나무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 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아직은 초저녁이라 해변에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아직은 초저녁이라 해변에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밤의 해변

‘바다’라는 제목을 달고도 바다가 아닌 ‘서러움’에 포커스를 맞춘 이성복의 시는 인간의 본질이 결국은 희열이 아닌 슬픔에 있다는 걸 문학적으로 형상화 한 절창이다.

파도를 서러움으로 인식할 수 있는 건 시인만의 능력이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이라고 왜 밤바다를 보는 저마다의 감상이 없겠는가? 고요한 밤의 해변은 누구에게나 시적 영감을 주는 힘을 가졌다.

영일대해수욕장과 월포해수욕장도 다를 바 없다. 휴가객이 북적거리는 낮의 해수욕장을 피해 밤늦은 시간 해변을 거닐어본다면 한낮엔 듣지 못했던 바다의 소리와 인파 속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미세한 움직임을 만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지난밤 영일대해수욕장을 거쳐 카페 거리가 형성돼 있는 여남동까지 방파제를 따라 30분쯤 걸었다.

인적이 드물어진 그곳엔 열대야임에도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었고, 물새 몇 마리가 졸고 있었다.

24시간 문을 여는 편의점에서 커피 하나를 사들고 한참 동안 일렁이는 바다의 조용한 몸부림을 바라본 시간. 낮의 해변에선 맛보지 못한 충일감이 몸을 감쌌다.

소설가 장정일은 ‘누군가의 춤추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건 그 사람의 영혼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썼다. 이걸 이렇게 바꿔 말해도 좋을 듯하다. “밤의 바다를 응시한다는 건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영일대해수욕장의 밤보다 더욱 농밀하고 원시적인 밤 풍경을 원하는 여행자도 있을 법 하다. 그렇다면 포항 장기면 신창리 해변으로 야간 산책을 가보면 어떨까 싶다.

인적은 더 드물고, 바다와 백사장이 들려주는 여름밤의 소리를 더 미세하게 포착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신창리 해변이다. 때론 무서우리만치 고요하고 괴괴한 어둠도 그곳에서라면 낭만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아름다움과 낭만은 한낮의 해변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가슴 속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밤바다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하는 2022년 여름휴가를 계획해보는 것도 나쁜 선택이 아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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