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10월 2일은 노인의 날이다. 국군의 날과 개천절 사이에 끼어서 대중의 관심과 거리가 먼 날이기도 하다. 어느 날짜에 노인의 날이 잡혀도 주목받지 못할 것이다. 노인 홀대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에서 나이 든 보안관 벨은 말한다. “개 목걸이를 목에 두르고 알몸으로 거리에 뛰쳐나가야 사람들의 이목을 겨우 끌 수 있어. 늙은이들에게는 누구 하나 관심 없잖아!”

영화에서 나온 이야기지만 정곡을 찌르는 얘기다. 그래서 한국의 여성 노인들은 기를 쓰고 염색을 한다. 90을 넘긴 노파들이 까만 머리를 하고 다니는 품새는 여간 민망하지 않다. 파 뿌리처럼 허연 머리의 영감과 아스팔트처럼 새까만 머리의 여성 노인의 변주는 우울하다 못해 희화적이다. 이런 현상의 배후에 노인 배척과 무시와 경멸이 자리한다.

세상 모든 게 돈과 아파트, 청춘과 건강, 넷플릭스 드라마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나만의 착시인지 모르지만, 요즘 노인들은 무참한 시절을 살아간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은 요양원에 감금(!)돼 있다. “군대 훈련소, 고아원, 정신병원과 함께 감옥과 요양원은 사회와 단절된 전체적인 기관의 전형이다.” 서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2015)의 지은이이자 하버드 의대 교수인 아툴 가완디의 지적이다.

가완디에 따르면 요양원은 병든 부모를 위한 시설이 아니라, 그들의 자식들을 위한 시설이다. 몸과 정신이 성치 않은 부모를 요양원에 입원시키고 자식들은 그날부터 자유를 만끽한다. 돈을 냈으니 내 일은 끝났다는 홀가분한 표정이다. 그날부터 노인들은 감옥의 수인들처럼, 정신병원의 환자들처럼, 군에 입대한 신병들처럼, 고아원의 원아처럼 감시와 지시와 통제와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한다.

몸이 성한 부모 역시 1년 내내 희망 고문에 시달린다. 이번 생일에는, 올 추석에는, 혹시 설에는 자식들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기대에 기대서 살아간다. 해가 지고 나면 절대고요 속에 빠져드는 시골 마을의 밤을 지키는 것은 텔레비전과 희미한 가로등과 풀벌레 울음소리뿐. 자다 깨다 하면서 노인들은 선잠 끄트머리에서 새벽의 여명이 희미하게 밝아오는 것을 느끼며 겨우 몸을 일으킨다.

드물게 울리는 휴대전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기대하는 눈빛이 역력하지만, 이내 깊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올 뿐이다. 지역소멸과 지방대학 위기가 ‘저출산 고령화’와 더불어 언론에 떠다닌다. 지난 15년 동안 225조, 한 해 평균 15조를 쏟아부은 저출산 대책은 어리석은 몽상으로 끝났다. 오지 않은 아이들과 오지 않을 아이들을 향한 기성세대의 눈물겨운 노력은 허공의 메아리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더욱 노인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허망하게 사라진 출산 대책이 아니라, 시퍼렇게 살아있는 노인들의 문제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과 그들한테 부족한 것을 찾아서 효과적인 대책을 하루속히 마련해야 한다. 몽상 속의 아이가 아니라, 현실의 노인을 돌아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