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우물쭈물하다 보니 10월이 코앞이다. 한 해의 4분의 3이 스러지고, 마지막 사분기가 얼굴을 내밀려는 참이다. 참 빠르구나, 하는 볼멘소리가 튀어나올 판이다. 시간은 절대적으로 흘러가지만, 그 속성은 상대적이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간은 무연하고 냉정하게 전진 운동한다. 시간은 불가역적이어서 역행하는 법이 없다.

시간은 절대성을 가진 비정한 속성의 소유자이되, 그 본성 가운데 하나는 지극한 상대성을 본질로 한다. 똑같은 길이의 시간이라 해도 그것을 감촉하는 인간의 내면에 따라 시간의 길이가 다르게 측정된다. 원증회고(怨憎會苦)로 강제된 만남의 시간과 애별리고(愛別離苦)로 인한 이별의 짧은 시간은 길이가 사뭇 다르다.

휴일 하오의 토평(土平) 너른 들에는 생명으로 가득하다. 벼가 머리를 숙이며 바람에 사각사각 소리 내며 흔들린다. 생명을 다한 연밭의 큼지막한 연잎들이 누렇게 시들어간다. 빨간 우렁이알들은 다가올 한로(寒露)와 상강(霜降)을 알지 못한 채 말라가고 있다.

철모르고 피어나는 사위질빵과 개망초, 여뀌가 바람에 살랑이고, 먹을 것을 찾는 백로 무리의 울음소리 허공에 들린다. 창공을 홀로 날아가는 가창오리의 귀소(歸巢)가 쓸쓸하고, 알맹이 없는 우렁이 껍데기 문득 망연하다. 이제 막 자라나는 호박의 여린 이파리와 제철 만난 갈대와 억새꽃이 얼려 춤춘다.

잿빛 구름장으로 뒤덮인 창공에는 굉음을 내며 하늘길 질주하는 비행기 대열이 길손의 발길 붙든다. 아, 저 길은 서울 쪽이고, 저 길은 부산 쪽이네, 혼잣말하는 사이 굉음이 사라진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의 사이와 거리가 제법이다. 들리지 아니하면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 듣지 못하는 것이 육근(六根)의 기본 원리라지만, 새삼스러운 시절이다.

어떤 생명은 가을에서 봄으로 달리고, 어느 것은 겨울을 대비한다. 가을바람 속에서 혹자는 지나간 여름을 추억하고, 누군가는 다가올 겨울의 설한풍을 예감한다. 서로 다른 시공간 감각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과 인연을 만들고 살아간다. 거기서 옳고 그름을 나누고 분별함은 어리석은 노릇이다. 다름을 인정하면 그만 아닌가?!

아주 젊은 날, 세상과 일대일로 정면 대결하려 했던 그 기막힌 시절을 돌아보곤 한다. 아주 아름다웠던, 극히 무모해서 두렵기까지 했던 그 시절을 모두 보내고 백로와 추분에 어울리는 나이를 먹은 지금, 지난날들을 새삼 돌이켜보는 것이다. 하지와 소서 대서는 물론 삼복의 찌는 듯한 열기로 세상과 맞섰던 기막힌 시절을 돌아보곤 한다.

생명에 내재한 생로병사의 이치를 너무도 늦게 체득한 자의 안타까움 같은 것을 돌이키는 것이다. 그러하되 어쩌랴?! 삶의 본성과 주어진 숙명이 그러할진대 무던히 수긍하고 받아들일 일이다. 10월은 또 10월대로 아름답고 풍요로울 터. 따사롭고 온유한 얼굴로 10월을 맞이하려 한다. 어서 오너라, 너 10월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