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동궁과 월지에서의 신라 왕들

신라 왕들이 삶의 한 부분을 보낸 공간 동궁과 월지. 이제 그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동궁과 월지는 여전히 유적으로 남아 통일신라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삽화 이건욱

동궁과 월지는 신라의 왕과 왕자, 귀족들의 생활공간인 동시에 그들이 국빈과 연회를 열던 장소였다.

사철 내내 희귀한 짐승이 뛰고 새가 날며 온갖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던 곳이었고, 통일신라 예술의 정점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건축물과 조각, 예술품들이 가득한 미려한 정원이기도 했을 동궁과 월지.

여기서 신라 왕들은 구체적으로 뭘 했을까? 궁금증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멀리는 1천350년, 가까이 잡아도 1천 년 이전의 아득한 역사에 대한 호기심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일 터.

월지와 동궁은 각종 고문헌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다. 때로는 짤막하게, 어떤 경우엔 그보다 상세하게. 그 사례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동궁과 월지는 어떤 곳들을 포함한 영역이었는가를 알아보자.

 

건국 초기 문무왕 14년에 조성
고대왕국 신라의 권위를 높이고
왕자를 교육하는 귀한 공간 역할

이후 문성왕·헌안왕에 의해
보다 아름답게 다시 만들어졌고
왕과 귀족·외국 사신들 연회 펼쳐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
고려 태조에게 천년사직 바치며
굴욕적 접대한 공간이기도

태조 왕건에게 신라 멸망 이후
천년고도 경주, 동경(東京)으로 격하
조선시대엔 경상도 감영 소재지로
임진왜란 이후엔 대구로 감영 옮겨
일개 부(府)로 명맥만 겨우 유지

한국고대사탐구학회가 발행한 김병곤의 논문 ‘신라 동궁의 역할과 영역-임해전 및 안압지와의 상관성을 중심으로’에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5년간의 시차를 두고 건립되고 동궁 관련 명문 유물이 다수 출토된 안압지와 임해전을 동궁 부속 시설로 이해한다.

또한 ‘삼국사기’ 직관지에 따르면 동궁 부속 관서로 동궁아, 어룡성, 세택, 급장전, 월지전, 승방전, 포전, 월지, 용왕전 등이 있는데 안압지의 신라시대 명칭을 월지로 간주하고 월지전, 월지악전은 안압지 관리 부서로 그리고, 급장전과 포전은 안압지와 임해전에서 개최된 연회를 지원하는 부서로 보았다.

그 결과 안압지 주변 일대는 물론 ‘신번동궁세택’명 청동접시 등이 수습된 인왕동 왕경 유적 일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동궁 영역으로 추정하기에 이르렀다. 동궁은 태자의 권위를 드러내며 독자적인 주거 공간의 제공과 군왕에 어울리는 자질 향상을 위해 각종 교육을 실시하는 장소였다.”

‘삼국사기’에 여러 차례 언급되는 동궁과 월지

적지 않은 부속 건물을 두고 철저한 관리를 통해 고대왕국 신라의 권위와 위상을 높였던 것과 더불어 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왕자를 교육하는 귀한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던 동궁과 월지.

그곳이 어떤 변화 과정과 사건을 겪었는지 추정해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고문헌이 ‘삼국사기’다.

이희준의 논문 ‘동궁과 월지 동편 신라왕경 유적의 조성 시기 및 성격 검토’에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월지 관련 언급을 보기 좋게 정리한 표가 실려 있다. 다음은 그걸 다시 요약한 것이다.

△문무왕 14년 2월(674년) 궁 내에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이한 금수를 길렀다.

△문무왕 19년 8월(679년) 동궁을 짓고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지었다.

△효소왕 6년 9월(697년)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경덕왕 11년 8월(752년) 동궁아를 설치하고 상대사 1인, 차대사 1인을 두었다.

△혜공왕 5년 3월(769년)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소성왕 2년 4월(800년) 폭풍으로 인해 나무가 부러지고 기왓장이 날아가고 임해문과 인화문이 파괴되었다.

△애장왕 5년 7월(804년) 임해전을 중수하고 새로 동궁 만수방을 지었다.

△헌덕왕 14년 1월(822년) 동복 아우 수종을 부군으로 삼고 월지궁에 들였다.

△문성왕 9년 2월(847년) 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하였다.

△헌안왕 4년 9월(860년) 왕이 임해전에 군신을 모았다.

△경문왕 7년 1월(867년) 임해전을 중수하였다.

△헌강왕 7년 3월(881년) 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연이 무르익자 왕이 거문고를 타고 좌우에서 노래를 부르며 매우 즐겁게 놀고 파하였다.

△경순왕 5년 2월(931년) 고려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수도 근방에 이르러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백관과 더불어 교외로 나와 맞이하고 궁으로 들어와 마주 대하며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예우하고 임해전에 모셔 연회를 베풀었다.

간략하게만 봐도 자그마치 250여 년의 세월, 10명이 넘는 왕이 고문헌 속에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역사를 볼 때 동궁과 월지는 통일신라의 번성과 쇠락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을 것이다.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만들었고, 이후 많은 왕들에 의해 낡고 허물어진 건물을 고쳤던 때를 거쳐 새롭게 등장한 왕국 고려에 의해 국운이 기울던 시기까지 신라의 역사와 함께 한 게 바로 동궁과 월지다.

통일신라 왕들의 환희와 고통 지켜봤을 공간

통일신라를 완성한 문무왕은 무열왕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유신 등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제압한 그는 당나라 세력까지 축출한 탁월한 전략가인 동시에 동궁과 월지의 건설을 명령한 통치자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시작된 월지와 동궁의 역사는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부침(浮沈)을 거듭한다.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효소왕은 원선, 당원과 같은 나이 많은 대신들의 도움으로 안정적인 국정을 유지했고, 할아버지가 만든 월지의 근사한 건물에서 신하들에게 화려한 잔치를 열어줄 수 있었다.

소성왕은 800년 음력 6월에 왕위에 오른 지 2년도 되지 않아 사망한다. 그가 죽던 해에는 전과 달리 잦은 기상 이변이 있었고, 그로 인해 월지와 동궁의 일부가 파손되기도 했다.

소성왕의 맏아들이었던 애장왕이 이를 중수한 것은 동궁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아버지를 기억 속에서 불러내기 위한 행위이기도 했을 것 같다.

7세기에 만들어진 동궁과 월지는 9세기에 이르러서도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등에 의해 보다 아름답게 다시 만들어졌고, 여기서는 왕과 귀족, 외국 사신들의 크고 작은 연회가 펼쳐졌다.

신라의 제49대 왕인 헌강왕은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한 번 본 글귀는 모두 입으로 읊을 수 있을 정도로 명석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왕이 된 후에도 문화와 예술에 기반한 정치를 펼친 그는 신명도 남달랐던 듯하다.

최고 권력자가 월지의 근사한 풍경을 보며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헌강왕의 기질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일부 사학자들은 그를 두고 “사회적 안정과 풍요로움을 누렸으나, 중앙 귀족들과 함께 향락적 문화를 즐기는 데만 몰두하고 신라 하대 사회의 불안정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는 비판적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

동궁과 월지에 관련된 ‘삼국사기’의 언급 중 가장 비극적인 건 경순왕 때의 기록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927년부터 935년까지 왕위에 있었던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바친 왕’이라는 불명예스런 사실은 경순왕에 관한 역사적 평가를 인색하게 만들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56대 992년간 지속됐던 고대왕국 신라는 사라졌다.

만약 동궁과 월지가 살아 숨 쉬는 생명체였다면 경순왕이 고려 태조를 비롯한 다른 나라 병사들을 신라의 선대왕들이 아꼈던 공간에 초청해 굴욕적으로 접대하던 모습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을까.

빛과 어둠, 햇살과 그림자가 공존했던 신라의 역사. 동궁과 월지의 역사 역시 장구하고 드라마틱했던 신라사(新羅史)의 주요한 한 부분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인간은 사라져도 신라 유적은 여전히 남았으니…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신라사 총론’은 경순왕대의 신라 멸망과 그 이후를 이렇게 쓰고 있다.

“935년 경순왕이 반란국가의 하나였던 신흥 고려 태조 왕건에게 천년 사직을 바친 뒤 신라 역사의 위용과 그 찬란했던 문화는 한국인의 뇌리에서 차츰 잊혀져갔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천년 고도 경주는 동경(東京)으로 격하되었지만, 그래도 3경의 하나로 중시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가 되면서 8도의 하나인 경상도 감영의 소재지로 다시 격하되었다가 그나마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에는 대구로 감영이 옮겨짐에 따라 일개 부(府)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후략)”

1천 년 가까이 이어지던 고대왕국 신라의 역사가 종말을 고하기 4년 전인 931년 동궁과 월지에서 이뤄졌던 경순왕과 왕건의 만남. 이는 기나긴 우리 역사 속에 존재하는 행운의 하나였을까? 아니면 불행한 사건이었을까? 누구도 쉽게 대답을 내놓을 수 없는 질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등장하는 왕들 외에도 ‘아름다운 화원’ 동궁과 월지에서 기쁨과 슬픔을 맛보며 제 삶의 한 부분을 보낸 신라의 왕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최상위 권력자였지만, 태어나고 성장하고 쇠하고 결국에는 소멸하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의 환희와 고뇌를 오롯이 기억하는 건 이제는 유적으로 남은 동궁과 월지가 아닐지.

취재를 위해 동궁과 월지를 여러 차례 찾았다. 그때마다 실감했다. 인간의 유한함과 시간의 무한함을. 또한 진지하게 생각했다. 역사의 연구와 복원이 왜 중요한 것인가를.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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