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핀 백일홍.

친구가 보내온 사진 한 장, 이태리타올에 ‘다 때가 있다!’라는 글귀가 적혔다. 몸에 끼인 때와 삶에 걸쳐진 시간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말이라 슬쩍 웃음이 난다. 때는 때 맞춰 씻어내야 하니 더 적절한 표어 같다.

시시때때로 꽃이 핀다. 대한민국은 꽃공화국이라고 할 만큼 일 년 내내 다른 도시에 뒤질세라 꽃축제가 이어지고, 카페도 커피 맛보다 정원에 핀 꽃이 더 손님을 불러들인다. 수국 맛집, 야생화 맛집, 해바라기 맛집에서 찍은 사진들이 sns를 통해 내게 당도한다. 꽃공화국 시민답게 보는 즉시 길을 나선다.

꽃의 절정을 보러 갔다. 백일동안 붉은 꽃이라 백일홍이라 이름 붙여진 배롱나무 군락지 명옥헌에 가려고 새벽길을 나섰다. 포항에서 담양까지 이동 거리가 만만치 않다. 고속도로에 올라서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나선 길이니 가보자하고 대구를 지나 전라도 경계선에 들어서니 다행히 서서히 비의 양이 줄었다. 담양은 가로수조차 배롱나무라 길 양옆으로 마중 나와 붉게 손을 흔들며 우리를 맞았다. 명옥헌 주차장에 내리자 보슬비가 오락가락했다.

비를 흠뻑 머금은 정원이 더 붉었다. 꽃잎에 물방울이 맺혀서 색을 더 진하게 만들었다. 정원 연못에 떨어진 꽃잎이 한가득 떠다녀 꽃무늬 카펫을 덮은 듯했다. 나무에 열린 꽃이 반, 세찬 비에 떨어진 꽃이 반이었다. 떨어진 꽃이 비 덕분에 오래 촉촉하니 제모습 그대로였다. 비가 와서 꽃의 절정을 보는 게 어려울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8월 중순의 강렬한 햇살을 비가 가려주어 꽃을 더 오래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좋은 풍경을 보러 매년 가자고 손가락 걸며 약속했다.

벌써 4년 전 일이 되어버렸다. 3년 전에는 나서다가 어긋나 대구 화목정 백일홍을, 다음 해는 안동 병산서원 백일홍으로 대신했다. 지난해 이맘때의 백일홍이 절정이었으니 하고 찾아가면 한철이 이미 지난 끝물이다. 며칠 더 먼저 와보리라 하고 다음 해 오늘 찾아가면 봉오리가 미쳐 열리지 않기 일쑤다. 절정인 날에 걸음 하기가 내 마음처럼 쉽지 않다. 그나마 집에서 가까운 곳은 때를 맞추기 쉽다. 8월에 들어서면서 오며 가며 살펴볼 수 있어서다. 명옥헌의 경험으로 비가 오는 날이면 얼른 길을 나서리라 마음먹고 기다렸다.

올해 점찍어 둔 곳은 종오정이다. 조선 영조 때 학자인 최치덕의 유적지이다. 영조 21년에 돌아가신 부모를 모시려고 일성재를 짓고 머무를 때, 학문을 배우려고 따라온 제자들이 글을 배우고 학문을 닦을 수 있도록 귀산서사(龜山書社)와 함께 건립한 것이다. 8월이면 연못에 연꽃이 한껏 꽃대를 올리고 둘레에 백일홍이 가지를 늘어뜨려서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소나기 예보가 있던 주말 오후, 비가 아직이지만 집을 나섰다. 천북쪽 하늘이 뿌옇게 보였다. 넓은 들에서는 소나기가 몰려오는 것이 보인다. 어릴 적엔 들 끝에서 달려오는 소나기보다 걸음이 느려 힘껏 달려가도 집에 다다르기 전에 몸이 흠뻑 젖곤 했다. 이젠 천리마 같은 차를 가졌으니 소나기를 따라잡기도 하고 비를 피할 수도 있다.

천북 무궁화 가로수가 끝나는 지점에 길섶으로 들어서면 금방 종오정이 나타난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붉은 백일홍이 가득한 고택이 눈에 들어오고, 꽃소식을 들은 사람들로 작은 동네가 수런거렸다. 집 주변으로 보랏빛, 분홍빛의 어린 배롱나무도 색을 보태고 있었다. 연꽃은 아직 절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연못 옆에 까치발을 한 백일홍은 홍조 가득한 새색시처럼 바알갛게 가지를 물들였다. 그 아름다움에 화룡점정을 우리가 도착하기 직전에 소나기가 찍어두었다. 화라락 떨어진 꽃잎으로 꽃그늘이 가득 만들어졌다. 흠…. 깊은 호흡으로 잠시 꽃멍을 때렸다.

돌아오는 길에 서산을 보니 언제 비가 왔나 싶게 노을이 진다. 시(時)를 맞춰 갔더니 때마침 뭉싯한 구름이 꽃처럼 붉어지는 하늘에 시(詩)를 적는다. 장관이다. 다 때가 있다. /김순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