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올해도 어김없이 4·19가 돌아왔다. 요즘은 4·19 혁명기념일로 부르지만, 내게는 4·19가 익숙하다. 마치 5·18 광주 민중항쟁이나 5·18 광주 민주화운동보다 5·18에 친숙한 것처럼. 벌써 61년 전 일이 된 4·19. 나처럼 나잇살 먹은 인간에게도 60년 세월은 무겁게 다가온다. 하물며 요즘 20~30대 청춘들이야 무슨 말을 더하랴!

어떤 친구가 4·19 무렵 이영도 시인의 ‘진달래’와 ‘노찾사’ 가수 김은희를 소개한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맷등마다 그날 스러져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련(戀戀)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이호우 시조시인의 여동생이자 현대시를 썼던 이영도. 훗날 유치환과 주고받은 연서로 세상에 알려진 시인. 경북대 교수 몇 사람과 청도에 있는 두 시인의 고택을 찾았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허리춤까지 자라난 무성한 풀과 허물어져 가는 벽체와 달려드는 모기떼 등쌀에 쫓기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으니 말이다. ‘새마을운동’의 출발지를 자랑하는 일 말고는 문화와 예술에 담을 쌓고 살아가는 청도군수와 주민들….

여하튼 이영도의 ‘진달래’와 김은희의 노래는 각별하게 다가왔다. 그 후로 해마다 4·19가 오면 ‘진달래’를 틀어놓고 지내기 일쑤였다. 오늘 그 일이 다시 생각나 김은희 공연 실황을 찾아보았다. 1992년 ‘학전 소극장’에서 김은희 ‘진달래’는 시퍼렇게 살아서 극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처연하고 애절하여 우리의 내장 깊은 곳을 파고드는 김은희의 놀라운 가창력!

다시 세월이 흐른 2013년 12월 ‘윤선애와 친구들’ 공연에 동참한 김은희의 ‘진달래’를 들어본다. 20년 세월 지나간 시간의 흔적과 무게를 가까스로 견디고 앉은 김은희 ‘진달래’는 그저 단아한 소품으로 고요했다. 그렇다! 모든 것을 무화(無化)하는 거대한 시간의 수레바퀴 아래 김은희의 처절한 통곡은 여유로운 노랫가락으로 쓸쓸하고 허무하게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하기야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고도 남을 시간 아니었던가! 그래서일까, ‘패왕별희’의 정접의(程蝶衣)가 40년 가까이 변치 않는 목소리로 우희(虞姬)를 노래함은 영화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이 먹은 김은희를 이제는 조용히 놓아 보내기로 한다. 1960년이든, 1992년이든, 2013년이든, 2021년이든 혁명은 언제나 청정하고 청청(靑靑)해야 하기에. 세월과 더불어 늙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혁명과 변혁의 사변뿐이리.

어김없이 찾아온 4·19를 맞자니 흘러간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새삼스럽게 솟구친다. 그러나 그리움이 퇴색하지 않으려면 그것을 현재화해야 한다. 4·19에 새겨진 영혼과 정신을 반추하면서 그날 쓰러져간 영령들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4·19를 살리는 길은 4·19와 함께하는 일이 유일한 방도임을 확인하는 아침나절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