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 경북의 언택트 관광지를 찾아
⑫ 무섬마을과 소수서원은 영주의 보물

외나무다리가 있는 영주 무섬마을의 밤 풍경.

안개와 외나무다리. 영주시 무섬마을을 떠올리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지는 2개의 잊을 수 없는 풍경이다.

기자가 영주를 여행한 것은 지금까지 모두 3번. 2012년엔 시인·소설가 20여 명과 함께 문학답사를 위해 찾았고, 지난 2019년엔 경북 지역 23개 시·군의 유명 관광지를 소개하는 기사를 쓰기 위해 방문했다.

최근 그곳에 다시 가본 이유는 앞선 2번의 여행을 통해 고색창연한 영주의 매력에 푹 빠졌기 때문이었다.

여러 종류의 나물로 맛깔나게 차린 저녁을 먹고 일찍 잠든 다음 날 새벽. 숙소를 나와 무섬마을을 느린 걸음으로 산책했다. 가장 먼저 여행자를 반긴 건 안개였다.

여자의 속눈썹을 적실 정도로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부드러운 안개. ‘무섬’이란 마을 이름은 ‘물 위에 뜬 섬’을 의미한다.

잔물결 치는 내성천(乃城川)의 고요함 속에서 마주하는 안개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히는 힘이 담겼다. 그 때문일까? 그날 영주 무섬마을의 풍경은 현실과 초현실의 사이에 있었다.

 

영주 남쪽엔 ‘무섬마을’
고풍스런 전통적 멋 간직한 38동의 가옥들
사대부가옥·문화재 등 선비 품격 고스란히
영주 북쪽엔 ‘소수서원’·‘선비촌’
조선 국보급 보물 간직한 최초의 사액서원
소나무 향기 속에서 선비 체험도 추억거리

◆ 무섬마을, 영주시 남쪽에 자리한 보물 같은 여행지

영주시 북쪽에 소수서원과 선비촌이란 이름난 관광지가 있다면, 영주 남쪽을 대표하는 보물은 누가 뭐래도 무섬마을. 가족 단위 여행객들은 물론, 젊은 연인들도 많이 찾고 드물지 않게 ‘나 홀로 여행자’도 눈에 띈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 편안한 여행지인 이 마을의 유래와 풍경을 ‘두산백과’는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水島里)에 위치한 전통마을로 국가민속문화재 제278호다. 무섬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의 우리말 이름.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의 3면을 휘돌아 흐르고, 안쪽으로 넓게 펼쳐진 모래톱 위에 마을이 똬리를 틀고 앉았다. 그 모습이 매화낙지(梅花落地) 또는, 연화부수(蓮花浮水)의 형상이라 길지(吉地) 중 길지로 이야기된다. 17세기 중반부터 사람이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저마다의 멋을 간직한 38동의 전통가옥이 고풍스러움을 자랑한다. 이중 16동은 지은 지 100년이 넘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옛 선비 고을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마을. 이곳에 세워진 김규진 가옥, 김위진 가옥, 해우당고택, 만죽재고택 등은 문화재이기도 하다.”

신발을 통해 발끝으로도 느껴지는 부드러운 모래의 감촉을 만끽하며 물가를 서성이던 때.

아직 아침잠이 많을 나이일 텐데 일찍 일어나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앞에서 밀어를 속삭이는 20대 중반의 젊은 남녀 한 쌍을 만났다. 분명 연인일 터.

멀찌감치 서서 둘을 바라보니 소곤소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꼭 잡은 그들 두 손의 온기가 아직은 차가운 초봄 새벽의 찬 기운을 멀리로 떨치고 있었다. 부럽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바로 전날 저녁엔 70대 노부부가 같은 자리에서 다정하게 앉아 있는 광경을 봤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엔 오랜 정(情)은 더욱 두텁게,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은 뜨겁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일까?
 

선비의 풍모를 닮은 소수서원 학자수 군락.
선비의 풍모를 닮은 소수서원 학자수 군락.

◆ 사랑 시를 떠올리게 하는 ‘무섬 외나무다리’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무렵. 기자가 20대에 읽은 잊을 수 없는 사랑 시(詩) 한 편이 영화 속 장면처럼 내성천 물결 위에 갑작스레 그려졌다. 서럽고도 아픈 옛이야기 같은 미당 서정주(1915~2000)의 ‘신부(新婦)’였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와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신부가 음전하지 못하다는 오해 탓에 사랑으로부터 도망친 신랑이 그 오해를 풀고 신부를 이해하기까지는 자그마치 반세기가 걸렸다.

서정주는 이 시를 통해 아무리 짙고 희뿌연 안개가 진실을 가리더라도 인간이라면 진실을 발견할 줄 아는 지혜로운 눈을 가져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닐지….
 

영주 북부의 보물인 소수서원 경자바위와 백운대.
영주 북부의 보물인 소수서원 경자바위와 백운대.

◆ 영주 북부의 보물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찾아

무섬마을의 안개와 외나무다리, 미당의 절창까지를 가슴에 담고 영주시의 북쪽을 향해 차를 몰았다.

나이 지긋한 영주시의 어르신들은 이렇게 말한다.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여기엔 당당한 자부심이 담겼다. 그들은 또 이런 말을 덧붙인다. “재물을 모으는 것보다 학식과 덕을 중요하다 여기며 사는 게 바람직한 인간의 길”이라고.

영주시 순흥면에 자리한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이런 영주시민들의 긍지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곳이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 사액서원이란 임금이 직접 편액을 써서 내린 사원을 지칭한다. 영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엔 소수서원에 관한 설명이 상세하게 쓰였다. 이를 간략하게 요약한다.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워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 됐다. 건립 당시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불렸는데,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해 소수서원으로 사액됐다. ‘소수(紹修)’란 명칭은 학문 부흥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원 안에는 강학당(보물 제1403호), 문성공묘(보물 제1402호)가 있고,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85호) 등의 유물도 소장돼 있다.”

머리를 맑게 해주는 소나무 향기가 여행자들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편안하게 하는 소수서원 일대를 천천히 거닐어 보았다. 수백 년 전 조선 선비들의 단아한 체취가 자연스레 느껴졌다. 이는 비단 기자 한 사람만의 감흥은 아니었을 것이다.

경자바위 아래 깨끗한 연못과 품격이 느껴지는 학자수(學者樹) 군락을 만나고, 숙수사지 당간지주까지 두루 돌아본 후 근처 선비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수서원과 연결된 선비촌은 앞서 말한 ‘영주의 선비정신’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기에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진 관광객들의 인기를 모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다수의 여행자가 모일 수 없는 상황이기에 예전의 ‘선비 체험’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 영주시 관계자의 이야기.

한국 유교문화의 중심지로서 그 정신을 잇고,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재현해 관광활성화를 모색하고 있는 영주시. 소수서원과 선비촌은 그 역할을 수행하는 ‘영주 북부의 보물’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영주시는 코로나19의 횡포가 온전히 사라져 무섬마을과 소수서원, 선비촌에 관광객들의 환한 웃음이 다시 꽃 필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날이 머지않아 오기를 영주시민과 함께 기원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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