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렬도가 그려진 항아리 출토 모습.
행렬도가 그려진 항아리 출토 모습.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2014년부터 현재까지 8년째 한 기의 신라고분을 발굴 중이다. 바로 쪽샘 44호 적석목곽묘이다. 지름 약 30m로 중형급에 해당하는 무덤인데, 연구소에서 2007년 폐고분(廢古墳·무덤인지 아닌지 조차 불분명한 상태의 무덤)상태인 것을 처음 확인하고 2014년부터 정밀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작년 연말 출토유물과 무덤의 구조 등 그간의 발굴성과에 대한 대대적인 현장공개회가 온라인으로 진행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 발표 이전인 2019년에도 주목할 만한 유물에 대한 공개가 있었다. 소위 ‘선각문(線刻文·토기 표면에 여러 가지 그림을 선으로 새긴 무늬) 장경호(長頸壺·목이 긴 항아리)’가 바로 그것이다. 선각문 장경호에는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다양한 모습의 인물, 동물 등이 새겨져 있었고 전체적인 그림의 내용이 마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행렬도(行列圖·왕이나 귀족들이 말이나 수레를 타고 호위 군대를 거느린 채 나들이하는 모습 등을 그린 그림)를 닮아 있었다.
 

행렬도가 그려진 위치.
행렬도가 그려진 위치.

44호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돌무지덧널무덤)의 북쪽 호석(護石·둘레돌) 바깥으로는 큰 항아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것이 확인되었는데, 무덤 축조가 완료된 후 일정 기간 동안 후손들이 무덤에 찾아와 제사를 지냈던 흔적이다. 커다란 항아리 외에도 작은 항아리와 접시, 흙으로 만든 방울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제사에 쓰고 그대로 버리고 간 것이다.

그런데 이 유물들 가운데 장경호 한 점이 완전히 파괴된 채 파편으로 확인되었다. 파편을 하나하나 세척하고 복원해보니 놀라운 모습이 드러났다. 말 탄 사람, 활 쏘는 사람, 춤추는 사람, 멧돼지, 사슴, 호랑이 또는 개 등이 확인되었다. 이외에 다양한 기하학적 문양도 새겨져 있었다. 최대한 복원을 시도하였지만, 아쉽게도 문양은 전체의 절반 정도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신라에서는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놀라운 그림이었다.

신라에서는 토기 표면에 다양한 문양을 새긴 것이 확인된다. 주로 기하학적 문양이나 말 문양, 사람 문양을 비교적 간단하고 반복적으로 표현한 것이 일반적이다. 일종의 패턴 문양처럼 토기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44호에서 출토한 선각문 장경호는 신라는 물론이고 주변 가야, 백제 지역에서도 확인된 바 없는 상징적 유물이다.
 

토기에 그려진 신라 행렬도.
토기에 그려진 신라 행렬도.

44호 출토 선각문장경호는 용기의 추정 복원 높이가 약 40cm 정도 되는데, 문양은 주로 장경호의 목 부분(頸部)부터 몸통(胴體部)까지 걸쳐 있으며, 총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 부분은 다시 2단으로 나눠지는데, 팔 벌린 사람 또는 나무를 형상화한 기하문이 반복적으로 그려져 있다. 몸통 부분에는 파도나 구름을 형상화한 기하문이 반복해서 그려져 있다. 주된 문양은 모두 어깨 부분에 그려져 있는데, 다양한 동물, 인물들이 복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먼저, 말을 탄 인물과 말들이 행렬하는 장면이 상하 2열로 표현되었다. 말의 머리 부분에는 갈퀴를 의도적으로 묶어서 뿔처럼 묘사하였다. 그 뒤로 2명의 사람이 있는데 바지와 치마(또는 두루마기)를 입은 것이 표현되어 있고, 옷소매가 늘어진 모습에서 고구려 무용총의 춤추는 사람 모습과 매우 흡사한 장면이다. 다시 그 뒤로는 활을 쏘는 사람, 암수 사슴, 멧돼지, 호랑이 또는 개로 추정되는 동물들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수렵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맨 마지막에는 말 탄 사람과 그 옆을 따르는 개와 같은 동물이 표현되어 있다. 말 탄 사람은 모든 문양들 중에서 가장 크게 그려져 있어 이 행렬의 주인공으로 추정된다.

심현철 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심현철 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전체적인 문양의 내용은 화면상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하는 행렬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말 탄 인물이 있고, 기마행렬과 무용(舞踊), 수렵(狩獵) 등의 내용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행렬이라는 큰 주제를 바탕으로 무용, 수렵과 같은 내용을 포함시킨 복합 구성인데, 신라 회화 관련 자료 중에서는 최초로 확인된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선각문 토기보다도 회화성이 우수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무용, 수렵 등의 내용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내용 구성과 많이 닮아 있어 신라와 고구려의 교류 관계 등을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밖에는 신라인의 사후 관념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으며, 문양의 내용 구성이나 표현방식 등이 새롭게 확인되어 신라 회화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

이렇듯 이 선각문장경호가 가지는 의미는 특별하다. 비록 전체의 절반 정도 밖에 확인되지 않아 많이 아쉽지만, 깨어진 모든 파편이 확인되어 완전한 형태로 확인되었다면 지금까지 확인된 모습 외에 또 어떤 내용들이 그려져 있었을지, 우리 모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