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작가, 성추행 파문 후 5년만에 신작 시집 ‘구시렁구시렁 일흔’ 출간
‘희노애락애오욕’ 등 담은 140여 편
독자들 곁에 있고 싶은 간절함 전해

박범신 작가. /은행나무 제공

“시인답게 사는 게 내 평생의 꿈이었지요. 산문의 세계는 기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어 차마 마주 보기 두려웠어요. 그래서 나는 내 혼의 체형에 맞는 비애의 안경을 만들어 쓰고 세상을 보았으며 그 안경 너머의 세계를 오직 기록하며 살아왔어요. 그게 지금은 정한으로 남는군요. 나는 왜 행복한 이들의 이야기를 쓰지 못했을까.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존재하긴 존재하는가. ”- ‘꿈’ 중에서

소설 ‘은교’의 유명 작가 박범신(75)의 신작 시집 ‘구시렁구시렁 일흔’(창이있는작가의집)이 출간됐다. ‘구시렁구시렁 일흔’은 희(喜)·노(努)·애(哀)·락(樂)·애(愛)·오(惡)·욕(欲)·그 너머·소설 등 9가지 주제에 140여 편의 시가 담겼다.

박범신 작가는 ‘시인을 꿈꾸었던 작가 박범신의 두 번째 시집’이라는 표지글에서 “본래 ‘시인’인 나를 지금이라도 부디 ‘시인’으로 너그럽게 받아주세요”라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은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를 상호 연관시켜 그가 나타내려는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발로라 할 수 있다.

박범신은 오랫동안 소설 문단을 대표해온 인기 작가 중 한 명이다. 1973년 등단해 시적인 문체와 젊은 감수성으로 대한민국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최고 작가의 자리에 올랐지만 2016년 성추행 의혹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작품인 이번 신작 시편들은 대부분 성추행 파문 이후 소설을 쓰지 않고 지내온 시간의 정서와 사유를 응축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박범신은 이번 시집은 독자들에게 일일이 손으로 편지를 써서 전하는 자신의 심정을 담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슬픔에만 침윤해 있었던 건 아니고, 그 과정을 통해 나의 인생과 문학을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박 작가는 청년작가와 노인의 위험한 틈새, 거기에서 절로 비어져 나온 오욕칠정의 얼룩들을 나의 항아리에 담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시집을 통해 독자에 대한 고마움과 독자곁에 있고 싶은 간절함을 전했다.

박범신 작가.  		       /은행나무 제공
박범신 작가. /은행나무 제공

박 작가는 “작가이름 48년, 돌아보면 매 순간이 얼마나 생생한 나날이었던가. 매일 캄캄한 추락 매일 환한 상승의 연속이었다”며 “그 생생한 경계의 먼 길을 함께 걸어준 수많은 독자에게 엎드려 고마울 뿐이다”고 밝혔다.

이어 “바라노니 이제 사랑하는 당신들 곁에서 다만 ‘구시렁항아리’로서 깊고, 조용하고, 다정하고, 어여쁘게 늙어가고 싶다”라며 “사람으로서의 내 남은 꿈이 그러하다”(‘제목 이야기’)고 덧붙였다. 그는 또 “시인답게 사는 게 내 평생의 꿈”이었다며, 소설 쓰기의 두려움을 함께 드러냈다. “나는 상처받았고, 그것들은 내게 잔인하고 비루한 폭력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그것들에 저항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은 스스로 상상력의 우물을 닫아버리는 자멸적 반역이었다는 걸 이해해달라고 말하진 않겠”다며, “좀 더 시간이 필요한 일”일 거라고 속마음을 내비쳤다.

박범신 작가는 충남 논산에서 출생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된 이후 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한국작가회의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고향인 논산 ‘와초재’에서 지역민들과의 교류와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대표작은 ‘은교’, ‘겨울환상’, ‘나마스테’, ‘소금’, ‘겨울 강 하늬바람’, ‘더러운 책상’등이 있다. 등단 30주년 기념 시집이 있긴 하나 정규 시집을 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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