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엔데의 ‘모모’

독일 작가인 미하엘 엔데(1929~1995)는 1973년 ‘모모’를 쓰면서 일약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동화작가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는 동화를 통해 화폐와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 사회를 풍자했다.

요즘엔 스마트폰만 켜면 그 속에 들어 있는 시계 앱으로 전 세계가 시간대에 따라 똑같은 ‘시간’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러니,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는 패션 아이템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시간은 더 이상, 시계의 태엽과 톱니바퀴가 째깍 거리는 소리의 감각으로 실감되는 것이 아니라 12과 12, 합쳐서 24라는 큰 숫자와 60의 작은 숫자,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는 동기화된 시간 감각에 대한 확신으로 체감된다. 각자가 갖고 있는 조금은 다른 시간의 리듬을 상징했던 시계의 재깍거림,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생기는 서로의 시간의 차이에서 오는 일종의 여유는 이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시간에는 본래 눈금조차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하루만큼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하는 자연의 변화도 존재하고, 하루, 또 하루가 쌓여 생기는 계절의 변화와 함께, 1년, 2년의 시간적 흐름도 존재하며, 인간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 ‘나이’라는 형식으로 한 해 씩의 시간이 지나간다는 식으로 시간을 감각한다는 형식은 물론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존재해왔다.

인간은 이처럼 자연이 부여하는 시간 감각 외에 또 다른 제도적인 시간 감각을 만들어낸다. 하루의 시간에 눈금이 생겨서 오히려 그 눈금의 형식이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사건에 선행하고, 365일이 1년이 되어, 달력이나 일력의 형식이 오히려 계절의 변화에 선행한다. 게다가 도무지 시작을 알 수 없었던 인류의 최초에 기원을 잡아, 그 기원으로부터 하나하나 쌓아나가 인류 문화의 시작에서부터 2021년에 이르는 하나의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이를 통해, 인류는 한 시간이 가지고 있는 노동력이라는 관점으로 노동의 시간을 화폐 가치로 환산할 수도 있게 되었고, 인류의 기원으로부터 한 방향으로 진보해 나가는 미래에 대한 전망 역시 가질 수 있게 된다.

작가 미하엘 엔데가 쓴 ‘모모’는 이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근대적인 시간성에 대한 우화이다. 어느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모모에게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하듯, 나이를 묻지만 모모는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 모모에게 있어 시간은 그저 자신이 가진 넘쳐나는 재산일 뿐, 자기를 증명하는 정체성의 형식이 아니다.

그러다가 모모가 정착한 이 마을에 갑자기 회색 신사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시계와 달력으로 시간을 재고 동기화하는 것을 넘어서, 시간에 화폐적 가치를 부여하여 시간의 가치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이런 ‘시간도둑’들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보낸 시간은, 사실은 노동을 해서 벌 수 있었던 얼마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돈’이 되면,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시간에 대한 감각은 사라지고, 시간과 맞바꾸어 교환된 ‘돈’만이 남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휴식이나 놀이 같은 시간의 허비가 실은 벌 수 있었던 ‘돈’에 대한 기회비용이었다는 죄의식이 남게 된다. 그 죄의식 속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거나, 누군가를 따뜻하게 바라보거나, 길가에 피어 있는 꽃냄새를 맡거나 하면서도 그것이 생산적인 시간인가 아니면 낭비하는 시간인가 생각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시간을 자신이 가진 재산처럼 써서 감옥에 갇힌 모모가 그곳을 탈출하는 과정은 물론 동화적인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에게 시간은 규칙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무한한 재산이다. 우리가 지금 보내고 있는 한 시간은 ‘시급’이라는 화폐의 가치가 모두인 가치가 아니라 무엇이든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의 시간이다. ‘모모’는 바로 그런 우리가 잃어버렸던 시간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