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덕여왕릉.

여성의 삶이 점점 주목받는 사회이다. 하지만 여전히 역사나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며 제 몫을 다해온 여성들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에 우리 지역을 살다간 유·무명 여성들의 발자취를 따라 소회를 풀어가는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연구자들이 닦아놓은 연대기식 여성사가 아니라 그 숨결을 찾아나서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을 김살로메 작가가 들려줄 예정이다. 여성들이 걸어간 길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는 장이 될 것이다. 독자들의 관심과 격려를 바란다. /편집자주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완벽한 객관성이란 없다. 명확한 잣대가 있는 게 아니라 서술자가 취하는 이데올로기의 방향에 따라 그 관점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진실은 하나지만 기술되는 내용은 주체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진덕여왕에 대한 연구자들의 기록을 대할 때 독자로서의 입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짧은 재위 기간에 반비례라도 하듯 국제 정세의 역동성에 휘말린 여왕의 시간을 살펴본다. 여왕이 남긴 오언율시 ‘태평송(太平頌)’을 통해 여성 리더로서 느꼈을 고충을 공감하고 싶었다.

여자가 왕이라는 이유로 당나라는 선덕여왕에 대해 트집을 잡았다. 이 기회를 이용해 상대등 비담이 난을 일으켰지만 김춘추·김유신에 의해 십여 일만에 반란은 진압되었다. 와중에 선덕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고, 여왕의 사촌인 승만 공주가 왕으로 추대 되었다. 성골 출신 마지막 왕인 진덕여왕(재위 647~654) 7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국제적 정세 한가운데서 고군분투했을 여왕을 생각하며 능 가는 길을 재촉했다. 경주 현곡의 야산, 오솔길을 따라 200여m를 올랐다. 초행의 객이 감행하기에는 다소 외진 구릉에 햇살을 받은 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봉분 허리를 감싼 둘레돌 사이사이에 듣던 대로 돋을새김한 십이지신상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이러한 무덤 양식은 8세기 이후의 것이기에 이곳이 진덕여왕의 무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태평송에 나타난 역사적 의미와 여왕의 인간적인 고뇌를 짚어보는 데에 방해가 되지는 못했다.

당시 국제 정세는 위급했다. 조여드는 백제의 공격에 조정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전쟁마다 김유신의 연승으로 이어졌지만 국권을 수호하려면 당과의 협력은 필수였다. 진덕여왕은 김춘추를 비롯해 유능한 인재들을 사신으로 보내 당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당의 의관을 좆았고, 태화(太和)라는 독자적 연호가 있었음에도 당의 연호와 책력을 따를 만큼 당 체제를 적극 수용했다. 즉위 4년인 650년, 백제와의 승전보를 알리려 춘추의 아들인 법민왕을 당 고종에게 파견하면서 지어 보낸 시가 그 유명한 ‘태평송’이다.

‘높디 높은 황제의 포부 빛나도다. 전쟁을 그치니 천하가 안정되고, 전 임금 이어받아 문치를 닦으셨네. (중략) 계절마다 기후가 고르고, 해와 달은 만방을 두루 도네. 산악의 정기 어진 재상 내리시고, 황제는 신하를 등용하도다. 선대왕들 한 덕을 이루니, 길이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
 

진덕여왕릉으로 가는 길.
진덕여왕릉으로 가는 길.

더할 나위 없는 아부로 가득한 내용이다. 후대인으로 가슴이 아픈 것은 여왕이 손수 시를 지은 것은 물론 비단을 짜고 수까지 놓았다는 점이다. 삼단 콤보로 행한 이 굴욕적 외교 방식은 주체적 여성 시각으로 볼 때 치욕에 가까운 방식이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당시 천자국을 향했다지만 진심에서 나온 방식은 아닐 것이다. 섬세한 여성성을 외교에 적극 차용할 수밖에 없었던 진덕여왕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러한 여왕의 외교술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는 이도 있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외교적 수사였음을 적극 변호하고 싶다. 풍전등화의 국운 앞에 실체 없는 명분이 무슨 소용일 것인가. 국제적 제휴의 손길이 필요했던 여왕으로선 그보다 나은 실리적 외교법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김살로메 소설가
김살로메 소설가

여왕의 이런 정성이 당 고종을 감동시킨 것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 실제 당 고종은 여왕의 죽음 앞에 예를 갖춰 애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시늉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확실한 태도를 취하는 방식, 현명한 소통법이 아니었을까.

살다보면 굴욕이 최선의 공격일 때도 있고, 치욕이 최상의 전략일 때도 있다. 굴욕 없이 피는 꽃이 어디 있으며, 낮아짐 없이 펄럭이는 깃발이 어디 있을까. 하산 길, 왕릉 동쪽으로 ‘동녘골’ 저수지가 보였다. 혹시라도 진덕왕의 흔적을 느낄 수 있을까 싶어 못 주변을 살폈다. 구체적 실체는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바스락바스락 무언가 교감을 원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한겨울 얼음장 조이는 소리였다. 마치 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옥좌의 부담감을 감내해야 했던 한 여인의 뒤늦은 고백처럼 그 소리, 귓전에 오래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