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바라본 경주 구황동 지석묘 인근 풍경.

“신라” 하면 떠오르는 도시는 당연히 “경주”일 것이다. 경주는 월성, 동궁과 월지 등 궁궐은 물론이거니와 대릉원에는 높디높고 크디큰 신라시대 고분이 자리하고 있다. 이뿐이겠는가? 신라시대 유일한 별을 관찰했다는 첨성대, 9층목탑이 위엄있게 자리했을 대사찰 황룡사, 지금도 법등을 이어져 오고 있는 유명한 불국사, 분황사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문화유산이 자리한 곳이다. 그렇다보니 “경주=신라”로 통하게 됐다.

그러나 경주지역에 신라가 자리하기 전부터 경주에는 선사시대 경주사람들이 살아왔다. 사람이 불을 이용하기 시작한 구석기시대에서 빗살무늬토기를 만든 신석기시대를 거쳐 무문토기를 만들고 청동을 다루기 시작한 청동기시대에도 말이다. 천년고도로 알려진 경주에선 천년보다 더 오랜 기간 청동기시대 경주 사람들이 살아왔다. 잘 알려져 있지 않았을 뿐이다.

청동기시대는 학자마다 견해의 차이는 있으나 보통 기원전 13~10세기에 시작됐다. 이 시기에는 농경이 본격화 되면서 한곳에 머무는 정주취락이 증가하고 무문토기와 각종 마제석기가 널리 사용된다. 물론 시대명이 말해주듯 청동기 제작기술이 발달하면서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도끼 등 각종 무기류, 의기류 등이 등장한다. 청동은 구리(80~90%), 주석(10~20%), 납, 아연 등을 섞은 합금으로 당시 이러한 주조술은 매우 고도화되고 혁신적인 기술이었을 것이다. 아마 사람들은 박물관에서 그리고 역사책에서 한손에는 비파형동검을 다른 한손에는 팔주령(청동방울)을 들고 반짝반짝 빛나는 청동거울을 목에 건 청동기시대 사람을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이 지니기에는 매우 고가의 상위 1% 사람들이 지닐 수 있는 귀중품이었다고나 할까?

경주지역에도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사람들이 거주했던 주거지, 사후에 묻힌 무덤 그리고 간절한 소망을 기원했던 의례유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주거지는 방형 또는 원형의 구덩이를 판 후 나무기둥을 세우고 풀 등의 초본류로 지붕을 이어 집을 짓고 살았는데 주로 구릉이나 하천 근처에서 확인된다.

경주 인동리·금장리·신당리·충효동·용강동·모량리 등지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조사됐다. 양북면 봉길리 13-1번지 유적에서는 비파형동검이 출토되기도 했다. 무덤으로는 석장동 876-5번지에서 묘역을 표시한 지석묘와 화장묘로 추정되는 수혈이 확인된 바 있는데 수혈 내부에서 목탄과 인골편이 확인됐다. 의례관련 유적으로는 화곡리에서 청동기~통일신라시대 제단이 확인된 바 있다.

정여선학예연구사
정여선학예연구사

최근의 발굴조사 중에서 주목되는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경주문화재연구소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에서 공동으로 조사한 경주 구황동 지석묘가 있다. 구황동 지석묘는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에 위치하는데 아마 이들 사찰은 잘 알고 있어도 그 사이에 커다란 상석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의 육안조사를 통해 청동기시대 지석묘의 상석으로 여겨져 왔을 뿐이다. 사실 진흥왕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신라 사찰사이에 청동기시대 상석으로 추정되는 50톤 이상의 큰 돌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2005년 분황사 발굴조사 중 청동기시대 석관묘 3기가 확인됐고, 내부에서 마제석창과 석촉이 출토된 적이 있다. 또한 신라시대 원지(園池)로 분황사 동쪽에 위치한 구황동 발굴조사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도 확인된 적이 있다. 즉, 신라시대 사찰이 들어서기 전 이 일대에는 이미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증거가 남겨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 중 하나가 지금도 야트막한 잔디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구황동 지석묘이다.

구황동 지석묘는 지난해 5월부터 여름이 끝나가는 그 해 8월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에서 공동 발굴조사를 했다. 과연 이 큰 돌의 정체는 무엇일까에 대한 많은 궁금증을 갖고 시작한 발굴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돌이 드러나고 그 아래로 돌을 받친 작은 돌(지석)이 확인됐고, 주변에서 청동기시대 무문토기편이 확인된 것이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추정만 됐던 큰 돌이 청동기시대부터 이 자리에서 꿈적하지 않고 세월을 버텨온 것이다. 또한, 돌 주변으로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석렬이 상석을 따라 방형으로 돌아가는 양상이 확인됐다. 청동기시대 경주사람들이 만든 커다란 돌이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큰 돌의 존재만이 아니라, 신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망을 비는 신성한 장소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황룡사와 분황사를 답사하게 된다면 꼭 한 번쯤은 사찰 사이 벌판에 오롯이 서있는 구황동 지석묘에 들러 청동기시대 사람과 신라시대 사람을 상상해 보는 기회를 가져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