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손경찬의 대구·경북 人
등댓불 그리고 인생(人生) - 김동욱 화백

소의 일생을 생각하며 교감하다 소를 통해 인생을 이야기하는 주제를 떠올렸다는 김동욱 화백,

2021년 신축년(辛丑年) 새해는 흰 소의 해이다. 소를 그리는 화백이 있다. 소의 해를 맞아 안우(安友) 김동욱 화백을 만났다. ‘등댓불 그리고 인생’이라는 주제로 작품 전시 중이었다. 갤러리의 흰 벽에서 소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安友 화백은 소만 그린 것이 아니라 노을과 기도의 주제도 그렸다.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소재들이 ‘소와 노을과 기도’라는 세 가지 주제를 담고 있었다. ‘소 그리고 인생’이라는 첫 번째 주제에 소의 눈물이 있었다. 어머니 소의 눈물과 아버지 소의 눈물이 서로 다른 감정을 비추었다. 지켜주지 못한 아픔과 회한으로 얼룩진 후회를 말하는가 하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가시지 않는 절절한 아픔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림의 리얼리티가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소의 형상을 빌려 인생을 이야기한 지 40여 년이란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자신이 소인 듯, 소 아닌 듯, 소 같았다고 한다

화백이 소를 만난 것은 1975년이었다. 1981년 대학 졸업 작품전에 코뚜레 쓴 소를 처음으로 발표했다. 인생의 슬픔을 그리고자 했던 첫 시도였다. 코뚜레를 쓴 소는 평생 밭을 갈고, 짐을 지고, 일을 하다 죽고 난 후에야 코뚜레에서 해방된다. 코뚜레는 소의 굴레이고, 눈물이고, 고단한 삶의 고통이다. 코뚜레는 소를 그리는 작가에게도 고통이어서 그가 울 때 소도 울고, 그가 웃을 때 소도 웃는다. 첫 번째 작품 이후 화백은 더 이상 소의 코뚜레를 그리지 않았다. 소를 코뚜레에서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소를 그리게 된 계기가 있을 텐데요.”

“난 한 번도 소를 그린 적이 없어요.”

눈앞에 코뚜레를 한 소와 울고 있는 소, 웃고 있는 소, 어린 송아지를 거느린 소, 황혼을 배경으로 조용히 쉬고 있는 소의 그림이 갤러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데도 화백은 소를 그린 적이 없다고 한다. 그에게 소는 사람과 다름없고, 소 이야기의 역사는 그대로 사람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이어서 소를 그린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닐지. 화백은 소를 통해서 거짓과 편법이 가득하고, 상식과 정의가 무시되고, 부정부패가 얼룩지고, 배신과 싸움으로 얼룩진 인생사의 갈망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래서인지 소의 눈물이 우리네 삶의 역사만큼이나 굴곡지고 회한이 깊다. 소의 형상을 빌려 인생을 이야기한 지 40여 년이란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자신이 소인 듯, 소 아닌 듯, 소 같았다고 한다. 메시지대로 그림이 완성되는 동안, 소재의 내면으로 완벽하게 감정이 이입된 화백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함께 앓는다.

安友 화백은 ‘노을 그리고 어머니의 눈물’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어린 손주가 울고 있는 소 그림을 보고 무서워했다고 한다. 화백은 소의 모습이 아이의 생각 속에 슬프고 무서운 모습으로 각인되면 어쩌나 염려가 되어서, 이미지 전환을 위해 웃는 소를 그렸다고 했다. 웃는 소는 아이의 천진난만하고 행복한 웃음이었다.

두 번째 주제는 ‘노을, 그리고 인생’이었다. 화백은 노을에 관한 영감을 얻기 위해 제주도로 갔다. 화백은 매일 노을을 마주하며 얻은 영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노을이 화백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노을을 보고 있으면 앞만 보고 살아온 삶이 보이고, 희로애락의 삶이 그려지고, 함께 있어주지 못한 모든 이들과 지나간 시간이 보였다. 인생의 황혼과 접목된 노을 시리즈도 그렸다. 화백에게 노을은 그리움이고 퇴직 이후 살아가는 제 3의 인생을 뜻한다. 자기중심으로 살아오는 동안 소홀히 했고, 함께 있어주지 못했고, 그로 인해서 아픔을 겪은 이들을 등댓불처럼 지켜주고 보듬어주는 은퇴 후의 삶을 화백은 제 3의 인생이라고 말했다. 화백은 저녁노을과 마주하며 치유와 평온을 느끼고, 아침노을은 소망과 함께 영혼이 맑아지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노을 중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보았던 녹색의 아침노을이 있고 제주도 애월의 고내폭포에서 보았던 용틀임의 저녁노을이 있다. 나그네의 가슴에 형언할 수 없는 색조로 다가온 노을이었다.

노을을 배경으로 한 그림 중에 손이 있다. ‘노을 그리고 아름다운 황혼’의 연작으로 생의 희로애락이 담긴 주름진 손과 기도하는 손이 있다. 화백은 노을을 배경으로 한평생 헌신과 희생으로 살아오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이 보여주는 디테일한 삶을 그렸다. 기도하는 손과 생의 굴곡을 보여주는 주름진 손의 처연함이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가슴이 뭉클하다. 노동으로 쇠퇴된 손의 주름과 굵은 마디, 두드러지는 정맥까지, 화백은 이 땅에서 곡진하게 살아온 어버이들의 삶을 손의 형상으로 생생하게 그려냈다.
 

김동욱 화백이 화폭에 담은 소.
김동욱 화백이 화폭에 담은 소.

“손의 모델이 누구신가요?”

“제주도에 노을을 그리러 갔다가 생각하는 정원에서 만난 성범영 원장의 손에서 아버지의 인생 그림에 대한 영감을 얻었어요.”

제주도의 거친 바람으로부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돌담을 쌓고, 분재를 가꾸며 최상의 정원을 만든 사람. 화백은 폭포와 연못, 돌다리를 만들어 국가지정 민간정원 1호의 아름다운 정원을 만든 농부 성범영 원장을 언급했다. 주름으로 삶을 보여준 손의 주인이었다. 깍지를 끼고 있는 손의 침묵이, 그 실체가 보여주는 이상의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손은 잠시 머물다 가는 노을처럼 침묵으로 수많은 말을 했다.

安友 화백이 추구하는 세 번째 주제는 ‘기도 그리고 인생’이었다. 부모의 기도, 자식의 기도, 신을 향한 기도를 담은 그림에 색채가 없다. 기도 시리즈의 특이한 점이 바로 색채를 빼버린 거라고 했다. 색채가 들어가니까 현란하더라며, 메시지 전달을 위해 오로지 목탄만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화백은 예전에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언급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 기도하는 사람은 약한 것이 아니라 강한 사람이다. 늘 기도하는 사람은 담대하고 평온하다. 너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라.” 기도 시리즈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거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죽은 예수를 안고 통곡하는 피에타의 성모 그림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산다면서도 사실은 제 뜻대로 산다며, 화백은 기도 시리즈에 인간의 편협한 이기심과 간절한 기도를 동시에 담았다고 했다. 눈물에 슬픔의 눈물이 있고 감격과 은혜의 눈물이 있듯이 기도 역시 제각각의 색채를 담은 여러 가지 기원이 담겨 있다.

죽은 아들을 안고 절규하는 성모의 그림 앞에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화백은 영성으로 승화된 고결한 마리아의 모습보다 아들의 죽음을 마주한 인간적인 어머니로서 절규하는 성모를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어머니. 미켈란젤로 이후 수많은 화가들이 여러 가지 형상의 피에타를 만들어냈지만,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다. 고통과 부활! 그림 속의 성모는 인간답게 괴로운 울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화백은 어쩌면 가장 외로운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게 되는 절대적인 순간의 간절함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손때 묻은 성경처럼 인간의 역사에 남는 하나의 현상인 듯.

미술학도 시절에,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목장에서 노니는 소를 보았다고 했다 특별한 자기만의 주제를 갖고 싶었고, 일생 동안 어떤 주제를 표현할까 고민하던 때에 소의 어진 눈망울을 보았다고. 그날 소의 일생을 생각하며 교감하다 소를 통해 인생을 이야기하는 주제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린 첫 번째 작품이 ‘인생은 코뚜레의 슬픔 같은 것’이라는 일하는 소의 그림이었다. 일하는 소는 코뚜레를 씌운다. 코뚜레를 쓴 소는 일생 동안 노동의 고통에 시달리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코뚜레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인간의 생애 또한 온 힘으로 일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멍에 쓴 소의 슬픔과 뭐가 다를까. 코뚜레를 쓴 소의 그림이 ‘소 그리고 인생’을 그리게 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그 후로 화백은 코뚜레를 씌운 소를 두 번 다시 그리지 않았다. 소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긴 생의 여정을 돌아보듯 갤러리를 한 바퀴 돌아온 끝에 만난 작품이 ‘소 그리고 웃음’이었다. ‘소 그리고 인생’의 시작이 코뚜레를 쓴 소와 ‘아버지의 눈물’이었다면 갤러리를 한 바퀴 돌아와 만난 작품은 웃고 있는 소였다. 다분히 의도적일 테지만 작품의 배열이 고단한 인생 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벙긋 미소를 짓는 소가 앞서 보았던 노동의 고단함과 어버이의 슬픔, 기도와 절규와 같은 삶의 고단함을 말끔히 걷어주었다. 화백과 인사를 나누고 갤러리를 나오며, 인생의 마지막에 활짝 웃는 것이 바로 모두의 바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