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문화재연구소의 신라 속 ‘숨은그림찾기’

과거 경주 월성 성벽 아래 교동패총을 조사하는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경주와 신라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며 ‘수수께끼 가득한 보물창고’ 같은 공간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본지는 올 한 해 공동 연중기획으로 신라와 경주의 비밀을 풀어가는 칼럼 연재를 진행한다.

사학자와 신라 연구자로 구성된 필진들이 ‘선사시대의 경주’에서부터 ‘신라의 왕실문화와 불교문화’ ‘신라 역사 속 인물들’까지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관심과 격려를 기대한다. /편집자 주

사람들은 아직 집을 짓지 않았고, 평생의 정착지를 정하지 않았다.

바람과 물을 따라,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동하며 살았다.

점차 생존과 더 나은 삶을 위해 주변 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강과 바다는 마실 물과 음식을 얻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비와 홍수의 피해가 적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을 중심으로 생긴 울타리는 그 안과 밖의 경계가 되었다.

울타리 안의 사람들은 무리지어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역사가 시작되었다.

신라가 태동하기 전, ‘신라 땅’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 가장 이른 사람의 흔적은 안동시(와룡면 태리, 마애리)에서 확인되었고, 약 4만 년 전부터다. 동해안과 낙동강을 중심으로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이동하며 머물렀던 흔적이 확인된 것이다. 그들은 정형화된 형태의 도구를 돌로 만들어 냈다. 대표적으로 주먹도끼는 좌우, 앞뒤가 대칭을 이루고 끝 부분이 뾰족한 형태인데, 찍거나 자르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후,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도구들은 점차 크기가 작아지는데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포항·대구·성주 등 넓은 범위에서 보인다. 경주지역에서는 감포읍의 대본리에서 확인된다. 그들은 여전히 집을 짓지 않고 이동하였으며, 토기(土器)를 만들지 않았다.

석기시대 사람들의 시간은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흘렀다. 그리고 신석기시대로 지칭되는 문화적 변화는 3만 년이란 시간이 더 흐른 뒤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은 집을 짓고, 불을 이용해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흙 그릇을 굽고, 사후 세계를 위한 무덤도 만들기 시작했다. 그 흔적은 동해안을 따라 강원도에서부터 이어졌으며,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대구·청도·김천 지역, 형산강을 중심으로 한 경주지역 곳곳에서 확인된다.

경주지역에서도 동해안의 봉길리·대본리, 형산강 북천에 맞닿은 황성동, 남천에 맞닿은 교동 등 그 분포가 넓다. 우리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시간의 흐름을 그들이 남긴 토기를 통해 찾아내곤 한다. 경북과 경주에서는 흙을 덧대어 그릇을 장식한 비교적 이른 시기의 덧무늬 토기부터, 빗살무늬를 선으로 그어 만든 토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늬를 긋거나 장식하지 않은 신석기시대 마지막 토기의 형태가 연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시간은 신석기시대의 시작과 끝, 그리고 다시 청동기시대로 이어진다.

최문정학예연구사
최문정
학예연구사

그럼에도, 지금까지 드러난 석기시대 문화는 매우 단편적이다. 이러한 파편으로 남겨진 흔적으로 석기시대와 신라 문화와의 연속성을 도출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석기시대의 경북 그리고 경주로 대표되는 지역에서는 동해안·남해안·내륙에서 이어지는 문화의 흐름들이 공존하였고, 나아가 독특한 문화 형태를 띄기도 했다는 점이다.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등의 지리적 한계는 어쩌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동해와 남해를 통해, 그리고 산 너머 내륙에서 전해지는 문화를 온전히 받아드렸고, 또 환경에 적응시켜나갔다. 이러한 교류와 확산이라는 거대한 흐름의 한 조각을 우리가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경주지역의 신석기시대의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월성(月城)’의 가장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일제강점기 1915년 동경제국대학 인류학 교수였던 도리이류조(鳥居龍藏)가 ‘경상북도 경주 반월성대하(半月城臺下)’에서 석기시대 유물층을 확인했다는 기록이 최초다. 이후 그 ‘월성’을 중심으로 신라가 이루었던 찬란한 문화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월성에서 처음 확인된 가장 아래층의 문화는 잊혀져갔다.

역사가 기록되기 전의 시대. 선사(先史)시대의 경주는 여전히 그 실체가 선명하지 않다. 하지만 ‘가장 처음’의 흔적을 찾고 연구하는 일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부터 이어질 ‘신라에 대한 모든 이야기’보다 4만년이 앞선 시간이, 또 1만년이 앞선 시간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신라인’들이 그러하였듯, 또한 오늘날의 ‘우리들’이 그러하였듯 대륙과 해양, 그리고 또 다른 문화의 흐름 한 가운데 서있었다. 그 시작점에 있었던 사람들을 기억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