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잘 옮긴 영해향교와 혁명가 이필제

옮겨온 영해향교.

영해와 평해의 해(海)는 바다해지만 물산이 풍부하고 바다처럼 넓다는 의미도 포함될 것이다. 비록 평해와 영해가 울진과 영덕으로 편입되었지만 넓고 크기로는 한 수 위다. 영해도 큰 고을로 넓고도 넓은 벌판과 물산이 풍부하여 그만큼 수탈도 많이 당하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조선을 뒤흔든 이필제의 난이 일어난 영해였다.

영해의 향교도 좋은 위치로 잘 옮겨 오늘날 문화 전달의 매개체 역학을 하기에 좋은 장소로 손색이 없다.

#. 설레임 안고 가는 영해 향교와 관아

사람도 매력이 있어야 설레임이 있듯이 지역도 마찬가지로 말 못할 아픔이나 굴곡진 변곡점이 있어야 애착이 가고 이끌리게 된다. 영해는 지금은 면으로 격하되었지만, 원래 고구려의 우시군(于尸郡)이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는 유린군(有隣郡)이 되었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년) 예주(禮州)로 시작하여 1259년(고종 46년) 잠시 덕원소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다시 예주로 잠시 환원했다가 1310년(충선왕 2년) 영해부로 강등되어 약 600여년 장구한 세월을 이어오다 1896년 영해군이 되었다. 오늘날 영덕군으로 편입되어 영해면이 된 것은 1913년이다. 모순된 봉건사회와 외세에 저항한 영해의 기질이 곳곳에 흐르고, 고택들이 즐비한 인량 전통마을과 괴시리 전통마을이 숨 쉬고 있어 더욱 발걸음 가볍게 영해를 찾았다. 평지에 자리 잡은 영해면은 군 단위의 읍 모양 넓게 펼쳐져 있고 로터리가 그 옛날 영광의 흔적을 안고 영해 3·18 독립만세운동 기념탑과 의연하게 길손을 맞이하고 있었다.

옮겨온 영해향교에 갔다. 산언덕에 넓게 자리 잡은 영해향교는 향교로서의 권위와 격이 풍겨 마음이 즐거웠다. 초라한 영덕향교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건립시기도 고려시대인1346년에 지어졌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은 조선 중기 1529년(중종 24년)이었다. 건물도 당당하여 한껏 권위를 세우고 있었다. 건물 자체를 보고 즐기는 맛이 차곡차곡 채워졌다. 길고 넓게 두른 담장도 노목이 품어내는 연륜과 주고받으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향교에서 내려다본 영해는 큰 고을이었다. 우측 발아래는 영해의 옛 이름 예주생활관 건물이 위용을 자랑하고 담장 끝에 고목의 앙상한 가지는 허공에 맨살을 드러낸 채 파란 하늘과 속삭이고 있었다. 사람 없는 영해향교를 찬찬히 둘러보고 옛 영해부 관아가 있던 영해면사무소로 발길을 돌렸다.

옛 관아(영해면사무소)는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야트막한 산언덕 읍성 안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거의 없애버려 옛 관아 건물은 흔적도 없다. 다만 정문 우측에 조금 남아있던 책방관사(부사의 보좌가 살던 곳)를 복원해 놓았다. 읍성의 흔적도 거의 없고 높게 쌓은 축대는 일본성 같은 기분이 든다. 정문 들어가 왼쪽 끝에는 영해부사와 군수 했던 관리들이 자기를 잊지 말라는 공덕비, 그것도 영원히 잊지 말라는 오매불망비가 즐비하다. 이들은 얼마나 선정을 베풀었을까? 아니면 얼마나 수탈했을까?

 

영해향교 담장과 앙상한 고목.
영해향교 담장과 앙상한 고목.

#. 백성의 고혈을 짜는 관리들

영해관아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지만 150년 전 어마어마한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800년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 꽃을 피우던 정조가 죽자 12살 어린 순조가 등극하고 외척 안동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1860년대는 민란의 시대라 할 만큼 혼란스러웠는데 임술민란으로 통칭되는 1862년(철종 13년) 진주 단성에서 시작하여 전국에 37회나 일어났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서양세력의 각축장으로 변하는 암울한 위기의 연속이었다. 관찰사와 수령은 돈과 뇌물로 사고팔아 심할 때는 부임도 안했는데 또 다른 부임자가 오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돈과 뇌물로 벼슬하면 온갖 명목으로 수탈하는 탐관오리해야 본전을 찾는다. 더 착취하여 큰 뇌물로 더 큰 벼슬을 하였고, 과거도 대리시험에 온갖 부정으로 세도가들이 독차지했다.

이 시기에 태어난 이필제(1825~1871년)는 봉건사회의 모순을 몸소 겪고 자란다.

1860년 4월에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1823~1863년)는 1863년(철종 14년) 11월20일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경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합송되어가는 길목인 조령 초곡에 수 천 명의 동학교도들이 햇불을 들고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본 38살의 이필제(본명 이근수)는 동학에 입교한다. 이필제는 교주 최제우가 처형당한지 7년째 되는 1871(고종 8년)년 3월10일 밤 9시 600여명의 동학도인과 농민이 교조신원과 관의탐학을 규탄하고자 탐관의 소굴로 알려진 이곳 영해부관아를 포위했다. 한밤중에 갑작스런 군중의 침입에 당황한 포졸들의 발포로 1명이 죽고 1명이 부상당했지만 관아를 점령했다. 이필제는 도망가던 영해부사 이정을 붙잡아 관아 뜰에 꿇어앉히고 죄를 물었다. “….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탐한 죄”등등을 꾸짖었지만 끝내 반성하지 않자 죽였다. 소를 잡아 나누어먹고 탈취한 관아의 돈 140을 자신들의 경비 40냥을 썼고, 100냥은 영해읍 5개동에 헐벗은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정부에서도 어떤 적인지도 몰라 당황했고 이웃고을의 수령들은 영해봉기에 두려움에 떨며 모두 다 도망갔다. 이필제는 어떤 연유로 영해까지 와서 혁명을 하게 되었는가?

 

영해부의 책방관사.
영해부의 책방관사.

#. 혁명가 이필제

1825년(순조 25년)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에서 시골양반으로 태어난 이필제는 1860년 진천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무과에도 합격했으나 관직은 없는 선달로 충청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세상물정을 몸소 체험하면서 변혁의 불길을 당기고 있었다. 1850년 25살에 외가인 경상도 풍기에 갔을 때 헌헌장부에 학식이 뛰어나 외삼촌 안재벽, 안재억은 풍기 서부면 교촌에 사는 이름난 선비 허선에게 소개시킨다. 허선은 이필제의 시 ‘남정록’을 보고 “…. 대양국(大洋國·서양나라)은 오래지 않아 천하를 소동시켜 우리에게 심한 독을 끼칠 것이다. 서쪽으로 대양을 누르고 북쪽으로는 흉노를 막는 일이 그대에게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원컨대 그대는 자애하여 늙은이의 말을 노망들었다 하지 말고 진충보국하여 큰 공훈을 세우라”고 극찬한다. 조선시대 포도청에 관한 기록 ‘우포도청등록’에 전한다. 이리하여 이필제는 자신이 진인 즉 메시아로 정감록의 정도령을 자임하며 이때부터 나라를 바로잡고 북벌하여 중국까지 정벌한다는 꿈을 키워간다.

 

영해관아 축대.
영해관아 축대.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명나라 태조(주원장)도 거지 아이 300명으로 일을 일으켰느니, 사람의 일은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1천명의 군사로 동쪽으로는 일본 대마도를 치고, 서쪽으로는 중국을 쳐서 한 달 안에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허무맹랑하다고 할 수 있지만, 1842년 아편전쟁 당시 영군은 20척 함대에 4천군사로 4억 중국을 제압했으니 큰 꿈을 꾸는 혁명가에게는 망상이 아니다. 이런 이필제가 어떤 연유인지 1859년(철종 10년) 4월에 영천으로 귀양와 1860년 1월에 풀려난다. 1869년 진천거사를 계획했다가 밀고로 실패하고, 12월에는 남해거사를 준비하다 여의치 않아 포기한다. 다음해 1870년 2월 28일 산청 덕산 에서 사람들을 모아 진주관아를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기로 했는데 밀고하는 자가 있어 진주봉기는 실패하고 영해로 온다. 1871년 2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찾아온다.

이필제는 “한 번 선생(최제우)의 수치를 씻고 창생의 재앙을 구하고 이어 중국에서 왕조를 창업하는 것입니다…. 스승께서 동쪽에서 받았으므로 그 도를 동학이라고 하였으니, 동(東)은 동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영해는 우리의 동해입니다. 3월 10일이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이니 그 날에 거사하겠소.”

이필제는 북벌보다는 교조신원에 비중을 두어 무력봉기는 반대했지만, 봉기할 것을 결심하여 동학교도들이 대거 모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영해관아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주민들의 호응이 없어 관군의 공격을 피해 일월산으로 향했다. 조령 초곡에서 단양을 중심으로 거사를 준비하다가 거사 직전 조령별장의 수색으로 피했다가 1871년 8월 2일 문경에서 체포되어 12월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교수형을 당하였다.

 

영해부사 군수들의 선정비.
영해부사 군수들의 선정비.

그에게 자금을 보내주고 후원해준 공주부호 심홍택(沈弘澤)은 포도청 심문에서“우연히 그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는데, 언어와 거동과 풍채가 과연 훌륭하여 평생 처음 보는 뛰어난 남자였다. 이런 인품과 기질로도 ‘출신’의 이름을 면치 못하는 것이 실로 가긍하여 천금을 아끼지 않고 도와준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요, 그 사람을 깊이 아꼈기 때문이다.”했다. 심홍택은 매맞아 죽었고 아들 심상학은 옥에 갇혔다.

뛰어난 문장솜씨에 시도 잘 지었고, 나라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고, 반듯한 용모와 기개로 믿음을 얻었고, 탁월한 용병술과 인품으로 모든 사람을 이끌었던 이필제는 봉건의 모순을 타파하고 동양의 황제가 되려는 큰 야망을 품은 탁월한 혁명가였다. 영덕의 의병장 신돌석 장군도 (당시에는 영해)서 태어나 큰 영향을 받았고, 동학혁명을 이끈 전봉준도 자신의 자를 이필제가 이름 썼던 명숙(明叔)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해관아는 영의정 허적(1610~1680년)이 경상도 관찰사 때 영해에 순찰 왔다가 객사에 머물면서 원통하게 죽은 16살 과거급제자가 몽달귀신으로 나타나 원한을 풀어주는 이야기기 있다. 밀양에 원통하게 겁탈당하고 죽은 아랑의 이야기같이 전국에 비슷한 몽달귀신 이야기가 비슷하다. 우리 시대도 이런 몽달귀신이 많이 나와 법의 이름으로 온갖 조작을 하여 원통하게 죽은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었으면 좋겠다. 백두산 기행과 동경기행을 쓴 당주 박종도 이곳 영해에 16년 귀양와 죽었다. <끝> /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