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대수필가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벌써 한해가 끝나가는 동지다. 태양이 돌아가는 황도 길을 24개로 나눈 절기 중에서 스물두 번째, 태양이 가장 남쪽에 위치하여 그림자가 가장 길다. 또 1년 중 밤이 가장 길어 ‘호랑이가 장가드는 날’이라고도 하는 절기이며 이제까지 커져 왔던 음기가 다하고 양기가 새롭게 부활하는 날이라 역(曆)의 시작으로 보고 아세(亞歲) 또는 ‘작은 설’로 삼았다고 한다.

동지에는 여러 가지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궁중에서는 군신과 왕세자가 모여 회례연을 베풀었고 관상감에서는 달력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으며, 민간에서는 며느리들이 시집의 여자들에게 버선을 지어 바치는 헌말(獻襪)이라는 것도 있었고, 뱀 사(蛇)자를 쓴 부적을 거꾸로 붙여 잡귀를 막는다고 빌기도 했다. 그러나 민간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절식(節食)인 팥죽을 쑤어 먹는 것이 제일 보편적인 풍습이다. ‘동지 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라는 말이 있으니 안 먹고 한 살 덜 먹어볼 수도 있을까.

어릴 때 기억이 아스라하지만, 따뜻한 방에 둘러앉아 할머니 옆에서 하얀 찹쌀로 만드는 구슬만한 새알심을 갖고 놀았고 어머니가 부엌에 내려가 펄펄 끓는 팥물에 넣어 질퍽한 팥죽을 끓여오면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추운 겨울날 어머니는 그 팥죽을 몇 그릇 떠서 마루의 쌀 뒤주와 우물가 장독대 위에 놓고 정성스럽게 빌던 모습들도 이제는 잊혀져가는 기억들이다.

근래 팥죽을 직접 끓여 먹는 가정은 많이 줄었겠지만, 요즈음 과거의 기억을 그리워하며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젊은 층의 레트로(retro) 취향으로 복고풍이 서서히 고개를 드는지 골목마다 팥죽을 만들어 파는 가게도 늘고 팥 생산량도 많이 증가했다고 한다.

팥은 붉은색 곡식이다. 붉은색은 음기를 쫓는다고 하여 남은 팥죽을 대문이나 구석진 벽에 던지면서 귀신을 쫓아 재앙을 면한다고 “고시내~ 고시내~” 하며 외치기도 하셨던 어른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서 들리는 듯하다.

붉은 팥은 약효도 크다고 한다. 해열과 산후통증, 부종에도 좋고 이뇨와 혈액순환에도 좋다고 하니 올해는 역병으로 고통 받고있는 외로운 취약계층 노인들에게도 팥죽을 갖다 드리며 온기를 느끼게 하는 것도 좋으리라.

그런데 올해 동지는 음력 11월 7일 초순에 들어있어 ‘애동지’다. 애동지에 팥죽을 쑤면 아이들 피부에 물집이 생겨 나쁘다는 속설이 있어 팥죽을 안 쑤고 팥 시루떡으로 먹곤 했지만 지금과 같은 역병이 창궐한 때에 팥죽 한 그릇씩 나누어 먹고 건전한 마음으로 이겨내 보자.

정갈한 동짓상 위에 팥죽과 동치미를 차려 놓고 가족의 건강과 새해의 운수 대통을 빌었듯이 코로나19의 악귀가 국민의 마음과 생활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는 이번 동지에는 가족 모두 모여 앉아 정성스레 하얀 새알심을 만들고 붉은 팥을 갈아 만든 팥죽을 먹으며 병마를 내쫓고 송구영신을 기원하고 싶다.

그리고 동짓날에 따뜻하면 이듬해 질병이 들고, 춥고 눈이 오면 다음 해 풍년이 온다고 했으니, 마침 영하권으로 내려가고 있는 요즈음 흰 눈발 기다리며 날씨가 춥다고 불평하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