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소설 형식을 빌려왔을 뿐 철학 에세이로 봐도 무방합니다. 쿤데라식 소설 문법에 익숙하지 않는 독자는 한없이 꼬리 무는 철학적 연상에 당황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작가는 스토리텔링에 충실하고, 독자는 그것을 자기 식으로 해석할 때 안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런 소설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소설 문법과는 다른 그 방식은 지나치게 독자의 사유를 간섭하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과도한 풀이와 친절로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맛에 매혹을 느껴 확고한 독자들이 모여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비나와 프란츠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인 토마스와 테레사보다 훨씬 공감 가는 캐릭터입니다. 그들 역시 토마스나 테레사 못지않은 각각 가벼움과 무거움의 상징이지요. 제목처럼 이 소설은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무거움’도 그만큼 언급됩니다.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우연과 운명의 소산물로 기능합니다. 서로 동경하거나 파행하는 상호 관계적 성격을 띱니다.

엄숙주의를 경멸하는 사비나의 삶은 한없이 가볍습니다. 데모대의 행진 대열에 끼는 삶이 그녀의 현실입니다. 그러면서도 공산주의와 민주화 운동 모두에 냉소적입니다. 반면, 유럽표 샌님인 프란츠는 서재에서 고뇌할 때 가장 현실적이지요. 책상물림 프란츠 눈에는 운동, 혁명, 행진 등 모두가 순수한 열정으로 비칩니다. 모험과는 거리가 먼 그에게 자유로운 사고를 지닌 사비나야말로 꿈의 세계이지요. 사비나에게 몰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때 배반을 택하고 새로운 자유를 찾는 게 사비나식 삶이구요.

사심 없이 가벼운 사비나의 눈에는 삶 이면의 불합리와 부조리가 너무 잘 보입니다. 배반이 어울리는 사비나는 입버릇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투덜거립니다. 사비나가 얻은 결론은 부조리한 키치적 삶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진실하다는 것이지요.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은 그 자체가 우연이며, 영원회귀로의 그 행진이야말로 인간사의 영원한 숙제라고 보는 것이지요.

키치(Kitsch)는 한마디로 ‘저속함’을 말합니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 이후 그것은 ‘삶을 바라보는 가짜의 태도’로까지 영역을 확대합니다. 쿤데라 식으로 이해하자면 키치는 싸구려 잣대로 공감대를 유도하는 유치한 놀음이자, 우연하고 당위적인 실체를 위선적인 미적 가치로 환원시키려는 모든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레닌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습니다. 카레닌은 테레사가 키우는 개입니다. 토마스와 처음 만날 때 들고 있던 책이 안나 카레니나였는데 묘하게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못 가본 길에 대한 아쉬움은 누구나 있습니다. 제 경우 그것은 동물을 키우는 것에 관한 것인데,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시간을 상상하면 어깻죽지에 날개가 돋는 듯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루기 힘든 그야말로 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을 돌보기엔 성정이 게으른데다, 비염이니 알레르기 체질이니 하는 핑계마저 마련되어 있으니까요. 평생 함께하지 못할 그들에게 마음만은 함께 할 때가 많습니다.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
소설가

카레닌으로 대표되는 개의 사랑은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애초에 뭔지 모르고 사랑을 합니다. 계산 따위나 기브앤테이크가 없는 절대적 그 무엇이지요. 괴롭히지도 않으며,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기대조차 없습니다. 저울질도 탐색도 없으며 파괴와 집착과도 거리가 멉니다. 거기 그대로 변함없이 있을 뿐이지요. 가변하는 인간은 누구보다 그걸 잘 압니다. 그리하여 이 불변하는 개에게 해줄 수 있는 위대한 축복은 안락사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요. 믿음이 보장되지 않는 인간끼리는 할 수 없는 최대의 선물인 카레닌의 안락사. 죽음으로써 시퍼렇게 살아있는 카레닌의 순정을 목도하는 것은 이 소설의 덤이구요.

테레사의 사랑은 의심하는 순정이고, 욕망하는 관계이며, 질척이는 무거움입니다. 이 모든 원인 제공자는 바람둥이 남편 토마스이지요. 하지만 그 누군들 무거움의 껍질을 벗고, 세파에 스스로를 가볍게 내던지는 그를 원망할 수 있을까요. 사랑의 과정에 치졸함과 실패가 따르는 건 인간사 가벼움에 어쩔 수 없는 항목 아니던가요. 이 또한 영원 회귀이자 불변진리이지요. 이런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작가는 상징적 의미로 카레닌을 등장시킨 것 아닐까요. 끝까지 무거움과 가벼움의 숙제로 독자를 고급한 심란 속으로 몰아가지요.

거대한 돛 달린, 무거움과 가벼움이 출렁거리는 삶의 요트에 오르는 일이야말로 인간이 감행해야 할 영원회귀의 목록 중 하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