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면 주고받는 수첩들.

수첩을 선물 받았다. 초록색 표지의 스프링 형식이었다. 손바닥만 한 공책을 보니 또 다른 공책이 떠올랐다.

남편과 연애 시절이었다. 삐삐로 소식을 전하던 시절이었지만 내겐 그런 거 하나 가질만한 경제력이 없었다. 그래서 매일 보는 사람이었지만 편지를 썼다. 하지만 보내면 늘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저 스프링 공책이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적어 주고 다음 만날 때 써서 가지고 오라고 했다. 안 썼다면 나오지 말라는 반협박을 얹어 주었다. 1년 동안 연애하며 그렇게 손바닥만한 공책 한 권을 주고받았다.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아들과 책꽂이를 정리하다 그 스프링 달린 공책을 보게 되었다. 이게 뭐지 하며 들쳐 본 아들이 큰소리로 읽어주기 시작했다. “H에게” 아들이 첫 구절을 읽으며 닭살 돋는다며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웃는다. 가로등을 배추꽃으로 표현한 남편의 편지, 글씨도 궁서체로 반듯하게 썼다.

아들도 오래도록 ‘모태 솔로’이더니 군대를 다녀와서 연애를 시작했다. 과 후배와 캠퍼스 커플로 한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20대를 데이트도 하며 좋은 사람도 만나 편지도 보내라고 등을 떠밀었다.

아들의 눈에 나이 든 엄마와 아빠가 닭살 돋는 편지를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가 보다. 또 휴대전화를 몸에 붙이고 다니며 카톡으로 빠르게 마음을 전하는 시대이니 이렇게 종이에 글을 써서 주고받는 연애가 신기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라떼는 말이야, 꼰대처럼 우리 때는 단짝 친구와도 비밀노트를 주고받았고, 위문편지도 쓰고, 일기장에 자물쇠도 달아놓고 썼다는 ‘썰’을 풀었다. 이런 게 진짜 연애지 하며 뻐겼다. 아들은 아버지의 연애편지와 아버지 얼굴을 번갈아 보며 키득거렸다. 그런 아들을 향해 묵묵히 책 정리만 하던 남편이 한마디 던졌다.

“나도 내 손을 찍고 싶다.”

/이규헌(포항시 북구 장성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