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의 재스민과 커피나무가 어른거린다.

베란다를 트지 않기로 했다. 20년 된 아파트를 고치기로 하고 어디까지 손을 봐야 할까. 처음 시작은 싱크대였다. 오래 사용하다 보니 서랍에 손잡이가 빠져버렸고, 필름지도 벗겨져 원래 요리를 즐기지 않던 내가 더 부엌에 들어가기 싫어졌다. 또 책꽂이가 방마다 있으면서도 더이상 꽂을 자리가 없어서 서재도 새로 꾸미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해 도배와 장판, 화장실도 새로 하기로 하니 주위에서 시작한 김에 베란다도 확장하라고 부추겼다.

남편은 일어나자마자 베란다로 나간다. 꽃밭을 보러 가는 것이다. 아파트에 꽃밭이라니 거창하지만 거실에서 베란다로 나가면 화분이 쪼로롬이 반긴다. 봄 가을로 피는 재스민, 신혼 초부터 들여와 팔뚝만 해진 알로에, 100년에 한 번 꽃이 핀다는 소철이 천정까지 키를 높였고, 올망졸망 서로 키재기 하는 다육이와 난(蘭) 화분이 꽃 없이 잎만 올리고 있다. 그 옆에 봄에 새로 들여놓은 커피나무가 귀티나게 앉았다. 이 녀석들과 하나씩 눈인사를 하며 물을 주는 일이 남편의 첫 일과이다. 마당쇠가 마당 쓸듯이.

작은 공간이지만 아파트에도 마당이 필요하다는 게 우리 부부의 결론이었다. 트는 대신에 베란다로 나가는 새시를 새로 하는 걸로 갈무리했다. 커튼은 레이스로 달아 커피나무와 재스민이 어른어른 비쳐서 정원이 거실까지 확장된 기분이 들게 했다. 작은 정원이 주는 위안이다.

영국인들은 정원을 가꾸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자기가 꾸민 정원에서 마시는 오후의 홍차, 삶의 여유이다. 런던근교에 라우샴가든이라는 300년 전에 만든 풍경식 정원이 있다. 수목이 가진 고유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최소한으로 관리해 나가는 것이 풍경식 정원이라고 한다. 산책로를 따라가며 나무와 어울리는 조각이 군데군데 놓였고, 키가 큰 나무가 햇살에 그늘을 길게 늘일 때 반려견과 함께 거닐며 위로받는 곳이다. 그 정원을 둘러싼 담장이 하하(Haha)이다. 이름이 독특해서 자꾸 불러보게 된다. 부를 때마다 웃게 되는 힘이 있다. 정원을 가꾸며 나온 돌을 쌓아 만든 돌담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울타리가 풍경 속에 묻혀서 멀리서 보면 담장이 보이지 않아 담장 밖의 소들이 풀을 뜯는 게 정원의 일부분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주에 하하와 비슷한 담이 있다. 베케이다. 쟁기질하거나 밭을 매다가 돌이 나오면 하나둘씩 쌓다 보니 담장이 된, 할머니의 할머니들이 만들어 놓은 농사의 일부분이고 문화이다. 돌에 이끼가 가득 피어서 푸른색이었다. 돌 틈 사이에 풍란이 비집고 들어가 앉았고 넝쿨 식물이 담을 넘나들었다. 그 담을 따라 길에서 집까지 연결된 아주 좁은 골목 비슷한 길을 올레라고 한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 길로 봄꽃도 오고 갈바람도 들어온다. 서귀포에 베케라는 정원식 카페가 있다. 조금은 허물어진 베케를 향해 통창이 있어 손님들이 마주 앉기보다 베케를 향해 앉는다. 제주 습지에 잘 자라는 풀과 꽃을 심고 가꾸어 커피를 들고 나가 산책을 즐길 수도 있다. 아버지가 감귤밭으로 일궈 농사짓던 곳이라 창고였던 건물도 다 허물지 않고 산책로에 남겨놓아 그곳을 지날 때마다 아버지의 흔적을 느낀다고 한다.

김순희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도시에서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의 언어를 듣다 보면 이웃이란 낱말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정원을 꾸미는 일이 나 자신뿐 아니라 이웃과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 실린 거인의 정원이 떠올랐다. 담을 높이 쌓고 혼자만 아름다운 정원을 즐기려고 하자 그 정원은 1년 내내 겨울만 계속되었다는. 허물어진 틈 사이로 아이들의 발길이 닿자마자 정원에 새가 돌아오고 꽃이 가득 피어났다는 해피엔딩의 이야기였다.

우리 집 베란다가 하하와 베케이다. 봄부터 키운 땡초 세 그루가 가을걷이를 하려는 듯 잎끝을 말고 있다. 여름부터 가을 내내 혀끝이 알싸한 맛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따 먹고, 한두 개는 빨갛게 익혀서 꽃처럼 바라보기도 했더랬다. 화분으로 둘러싼 우리 집 담장, 사계절이 들고나는 베란다를 허물지 않고 놔두길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