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사 침계루와 반야교. 석남사는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석남로 557에 위치해 있다.

떠나는 가을이 아쉽다. 일주문 안에는 늦가을 풍경이 전하지 못한 인사를 부여잡은 채 우리를 기다린다. 초췌한 계절의 끝자락과 잔뜩 흐린 하늘,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약간의 고독과 우수가 실려 있다.

유모차를 탄 손녀의 손에 들려진 나뭇잎 하나, 돌 지난 아이가 한참을 들여다보고 코로 가져가 냄새도 맡는다. 그리고는 손에서 놓지 않는다. 이 작고 아름다운 교감을 바라보며 모든 생명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대화를 나누다 수시로 찾아드는 적적함에 가끔은 까칠한 허공을 응시할 수 있어서 좋다.

곧게 뻗은 700m의 거리가 지겹지 않다. 누구나 자연 속에 서면 몸과 마음은 넉넉해지고 상대의 마음을 살필 줄 아는 배려심도 생긴다. 몸살과 감기 기운으로 힘든 몸을 추스르고 나온 나도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겸허해진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계절을 즐기며 반야교를 건넌다.

석남사는 통도사의 말사로 헌덕왕 16년(824년), 최초로 우리나라에 선을 도입한 도의 선사가 호국기도도량으로 창건한 선찰(禪刹)이다. 창건 당시 화관보탑(華觀寶塔)의 빼어남과 각로자탑(覺路慈塔)의 아름다움이 영남 제일이라고 하여 석남사(碩南寺)라 하였다고 한다. 가지산의 별명이 석안산(碩眼山)이기 때문에 석안사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뒤 몇 번의 중수를 거치고, 6.25전쟁 이후에 폐허가 되었던 절을 1957년 비구니 인홍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크게 증축하여 비구니 수도처로서 각광 받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최대 규모의 비구니 종립특별선원으로 정수원, 금당, 심금당 등 세 곳의 선방에서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고 있다. 정수원은 여느 선방처럼 동안거와 하안거 결제, 해제를 지키지만 금당은 해제가 따로 없이 수좌 스님들이 모여 정진하고 있으며 심검당은 노스님들이 자유롭게 수행한다고 한다.

누하진입식으로 침계루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석가탑을 닮은 삼층 석가사리탑이 크지 않은 마당을 지키며 우뚝하다. 스리랑카 스님이 가져온 사리를 모셔놓은 대석탑이다. 대의 선사가 세웠다는 소석탑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극락전 쪽으로 돌아가면 만날 수 있다. 연륜이 쌓인 탑은 뒤로 보이는 선방 때문인지 정숙한 여인과도 같은 품격이 흐른다.

작지 않은 사찰이지만 전각의 위치나 정원의 짜임이 빈틈없이 아름답다.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영남 9봉 중 가장 높다는 가지산이 넉넉하게 절을 품어 주어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아늑하고 평화롭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절은 한 순간도 흐트러짐 없이 조용하다.

대웅전 뒤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도의국사의 사리탑이라고 전해지는 보물 제 369호 승탑이 나온다. 정갈하게 비질이 된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 스님 한 분이 정원에서 풀을 뽑으며 통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멀리 사는 스님과 안부 인사를 나누는 흔하디흔한 대화가 마음을 아리게 한다. 육신을 절집에 가두고 사는 스님들의 절제된 삶 속에 녹아든 각별한 동료애가 유난히 애틋하다.

삶은 인연의 늪이며, 대부분의 인연은 그리움을 동반한다. 마음속에 달처럼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 가을 마음껏 그리움에 젖어들고 싶다. 젊은 날, 친구와 둘이서 탑돌이를 하던 승탑이 변함없이 거기 그 자리에 서 있다. 그 때는 재미삼아 해보던 탑돌이였다. 문득 내 생활 반경에서 사라진 친구의 소식이 궁금하다.

나이가 들수록 만남이 조심스럽다. 친한 벗을 잃고부터는, 남은 인연조차 이별의 무게로 클로즈업 될 때가 있다. 삶의 터전이 바뀌면서 새로운 범주의 사람들을 알게 되고 친분 있게 지내던 사람들과는 소원해졌다. 소식이 뜸하거나 끊어진 인연들도 나뭇잎 지고 새잎 돋듯 무탈하게 지내기를 기도한다.

두 손을 모으고 마음도 모아 탑돌이를 한다. 하나씩 떠오르는 인연들, 그들과 가장 아름다웠던 한 때를 떠올리고 싶은데 서둘러 꿰맨 상처자국처럼 기억하고 싶지 않은 흔적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좀 더 사랑하고 배려하지 못했던 시간들도 보인다. 젊은 날엔 인연의 귀함을 몰랐다. 아둔했던 나에게 지혜의 눈은 언제나 한발 늦게 찾아오는 모양이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사색에 잠겨 승탑을 돌고 있는데 딸이 손녀를 안은 채 내 뒤를 따른다. 성큼성큼 따라오는 딸의 건강한 발길에 묻어나는 소원들, 해맑게 웃는 손녀의 하얀 앞니에 머무는 계절은 얼마나 눈부신가. 소소하고 작은 것들이 아름다운 날, 나를 성장시켜 준 모든 인연에 감사하며 탑돌이를 마친다.

반야교를 건너 내려오는데 계곡에 홀로 앉아 있는 한 남자가 쏠리듯 눈에 들어온다. 남자의 가슴 속으로 하염없이 가을이 쌓인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하얀 수첩이 눈길을 끈다. 그는 분명 시인이거나 시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계절의 품에 영혼을 맡기고 앉아 있는 그에게 훌륭한 시적 영감이 내려앉기를 기도한다.

남과 나를 향해 마음이 모아지는 계절, 가을은 무언지 모를 허전함을 남긴 채 기러기 날아가듯 또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