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문화의 상징과 공간 (12) 장기

장기읍성
장기읍성

장기읍성 동문까지 승용차의 왕래는 비교적 자유롭다. 동문에 올라서면 저 위로 산 능선에서 흘러내린 성곽이 마치 꾸물거리는 뱀의 몸통처럼 아래쪽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 같다. 이곳에 유배자들을 관리하는 현청이 있었다. 현청의 동문에는 조해루(朝海樓)란 누각이 있었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조선 십경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유명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성곽 위에 배일대(拜日臺)라 적힌 바위가 동쪽 바다를 보고 앉아 있다. 장기 현감이 매년 정월 초하룻날 조정의 임금을 대신해서 해맞이했다고 전해오는 유물이다. 다산 정약용도 이곳에서 ‘동문에서 해 뜨는 것을 바라보며’라는 시를 지었다.
 

경성 중심으로 3천리 떨어진 빈해각관 고을
우암 송시열·다산 정약용 등 조선조 유배객들 
하루 95리 걸어 9일 하고도 반나절 만에 도착
동생·아들·손자에 노복까지 대동한 우암
유배생활 4년동안 명저 ‘주자대전차의’ 등과 
300수 시·글 남기고 노론파 문하생도 배출
18년간의 유배생활 시작지가 된 장기현서 
다산은 7개월간 한방치료책 등 다양한 저술
그물제작법 가르치고 가뭄 대비책까지 전수
송시열의 정치소신·정약용의 실용정신 등
지역에 남긴 문화자산 ‘유배문화체험촌’으로 

장기읍성
장기읍성

□ 조선조 500년 동안 220여 명의 유배객 거쳐가

성곽을 타고 남문지에 올라서면 저 아래 현내뜰과 신창리 바닷가, 그리고 고개 넘어 양포항이 시야를 확 트이게 한다. 동남쪽 계원리 복길봉수와 동북쪽 모포리 뇌성산 봉수대가 기하학적으로 읍성으로 연결된다. 바다에서 침입하는 적들을 대비했던 선조들의 지혜가 이 성의 입지를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보면 장기면의 전체 입지는 삼면이 육지이고 한면이 바다에 인접해 있는 연해(沿海) 고을임을 실감할 수 있다.

조선시대 유배지의 장소와 거리를 책정한 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에 따르면 장기는 경성을 중심으로 유 3천리 지역에 해당하는 빈해각관(濱海各官:서울에서 30개 역 밖에 있는 바닷가) 고을이었다. 그래서일까.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같은 석학들을 비롯해 조선조 500년 동안 220여 명의 유배객이 이곳을 거쳐 갔다. 조선시대 장기로 오는 유배길은 영남대로를 이용했다. 한양-덕풍-경안-유춘-가흥-죽령-영주-안동-상주-함창-의흥-신령-영천-경주-장기로 연결되는 이 길은 서울에서 860리이다. 유배인들은 하루 95리를 걸어 9일 하고도 반나절 만에야 이곳에 도착하였다. 왕위 승계와 이에 수반된 당쟁, 그리고 사화와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이들이 최종적으로 도착해서 신고식을 했던 읍성 바로 아래 장기초등학교가 있다. 그곳이 우암의 적거지였다고 전한다. 우암이 직접 심었다는 교정의 은행나무가 오늘따라 더 무성하다.

 

송시열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은행나무
송시열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은행나무

□ 우암, 제2차 예송 논쟁에서 패해 1675년 장기로 이배

우암 송시열과 장기의 인연은 어땠을까. 우암은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1675년 정월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5개월 후인 6월 10일 윤휴가 조사기, 이무 등과 함께 우암을 원악지(遠惡地)로 옮기기를 청하여 장기로 이배(移配)되었다. 장기에 도착한 우암은 장기성 동문 밖 마현리 사인(士人) 오도전 집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로부터 1679년 4월 10일 거제도로 귀양살이를 옮기기까지 우암은 4년여 이곳 사람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살았다.

우암은 동생들은 물론 부실(副室)과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함께 데리고 왔다. 이는 비록 유배객의 몸이지만 가족과 노복까지 대동할 정도여서 당시 우암의 입지를 반증하고 있다. 우암의 가솔들은 술을 빚어 모포리에 열리는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조선조의 관리나 지식인들은 유배지에서 학문적 업적을 쌓는 일이 많았다. 이황과 이이는 물론이고 정약용과 박세당 등 실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4년간의 장기현 유배생활 중에 우암은 수많은 저작을 했다. 우암의 장기 배소에는 수백 권의 서책이 비치돼 있었고, 독서를 하는 여가에 시를 짓기도 했는데, 이들 원고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상자 속에 간직했다.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라는 명저뿐 아니라, 1675년 6월에는 취성도(聚星圖)를 제작했다. 또한 이곳에서 ‘문충공 포은 정선생신도비문’ 외에 300수 내외의 시와 글을 지어 다양한 심회를 형상화했다.

우암 거소 주인이었던 오도전은 4년간 열심히 우암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장기현의 훈장이 되었다. 우암이 장기를 떠난 후 28년 만에 우암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오도전, 오도종, 황보헌, 이동철, 오시좌, 김연, 서유원, 오도징 등 장기 향림들과 대구의 구용징, 전극화 등이 주축이 돼 죽림서원을 건립하였다. 이들은 장기에서 노론 인맥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인맥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까지 존속되었다. 죽림서원에는 우암의 영정과 문집, 그리고 이곳에 유배를 왔다가 객사한 퇴우당 김수홍의 문집이 있었지만 서원이 훼철된 후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시대의 거물인 우암이 장기에서 4년간 머물었다는 것은 장기뿐만 아니라 영남 지역 전체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았다. 한양에서 무수한 고관과 학자들이 장기까지 찾아와 우암에게 문안을 올린 것은 물론 학문을 전수받기를 간청했다. 우암과 그 후학들의 영향으로 학문을 숭상하고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 풍토가 지역 곳곳에 조성되었다고 해도 결코 넘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신창리 바닷가
신창리 바닷가

□ 다산, 신유박해 사건에 연루돼 1801년 장기로 유배

우암이 장기를 떠난 지 126년 지난 무렵, 다산이 장기로 유배를 왔다. 다산의 18년 유배생활의 시작지가 바로 장기현이다. 다산은 1801년 1월 19일에 터진 신유박해 사건에 연루돼 1801년 2월 27일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그해 3월 9일 장기에 도착한 다산은 읍성 객관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저녁 무렵 다산은 관리에게 인솔돼 장기읍성 동문으로 나와 마현리 구석골 성선봉의 집에 도착해 그곳을 거처로 삼았다.

당시 다산이 관리를 따라 나왔던 동문은 지금 장기읍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조해루가 있던 곳이다. 그때 다산이 걸어 내려온 길은 지금도 거의 남아 있다. 장기향교에서 동문을 거쳐 면사무소로 내려가는 길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황사영 백서사건 연루 의혹으로 그해 10월 20일 다시 서울로 압송되기까지 7개월 10일(220일) 동안 장기에서 머물렀다.

장기에 온 다산은 틈나는 대로 장기읍성의 동문에 올라 해돋이를 구경하거나 가까운 신창리 앞바다에 나가 어부들이 고기 잡는 걸 바라보기도 했다. 마을사람들이 보리타작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담배 농사 짓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바닷가에 갔을 때는 처음으로 해녀의 물질을 구경했으며 오징어와 물고기를 보고 험한 정계에 뛰어들어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처지를 우화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장기천을 따라 신창리 바다 쪽으로 녹음벽수의 장기숲이 펼쳐져 있었다. 다산은 그 숲길을 걸으며 자신의 처지를 시로 형상화하기도 했다.

 

장기향교
장기향교

다산은 유배지에서의 한을 좌절과 절망으로 보내지 않았다. 불행한 역경을 불굴의 투지와 학문연구, 시작에 전념해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 10장 등 60제 180여 수에 달하는 주옥같은 시를 창작했다. 효종이 죽은 해의 효종의 복상 문제로 일어난 서인과 남인의 예론 시비를 가린 ‘기해방예변(己亥邦禮辯)’, 한자 발달사에 관한 저술인 ‘삼창고훈(三倉詁訓)’, 한자 자전류인 ‘이아술(爾雅述)’ 6권, 불쌍한 농어민의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는 ‘촌병혹치(村病惑治)’등의 저술도 이곳에서 남겼다. ‘촌병혹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병이 들어도 의서와 약제를 알지 못하여 치료하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간단한 치료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그 당시 장기의 풍속은 병이 들면 무당을 시켜서 푸닥거리만 하고, 그래도 효험이 없으면 뱀을 먹고, 뱀을 먹고도 효험이 없으면 그냥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런 불쌍한 백성들을 살려내기 위해 ‘본초강목’ 등을 참고하고 자신의 경험을 종합해 간단한 한방치료책을 지은 것이다. 다산이 이 책을 짓게 된 동기와 내용이 일부 적힌 서문에는 여건상 참고할 의서들이 부족한 탓에 귀양살이가 풀려서 더 많은 의서들을 참고할 수 있다면 ‘혹(惑)’이라는 글자를 뺄 수 있다고 했다. 귀양 온 자신의 처지를 잊고 백성들의 생명구제를 위해 의서를 저술한 그의 뜻은 깊고도 높다. 이 귀중한 책이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옥에 갇혔을 때 분실되었다고 한다. 시와 저서 외에 장기에서 고향의 아들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가 전한다.

다산은 장기에서 시와 저술 활동만 한 게 아니었다. 실학자답게 어부들이 칡넝쿨을 쪼개 만든 그물로 고기를 놓쳐버리는 것을 보고 무명과 명주실로 그물을 만들 것을 권고하고,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소나무 삶은 물에 그물을 담궜다가 사용할 것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 개천에 보를 만들어 가뭄에 대비하는 방법도 전수했다고 한다.

 

유배문화체험촌
유배문화체험촌

□ 우암과 다산의 유배길, 유배문화체험촌으로 연계돼

우암 송시열의 유학에 기반한 정치 소신과 다산 정약용의 실학적 실용과 애민사상은 장기고을을 학문과 교육, 효와 충과 예가 실천으로 역동하는 고을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 오늘날의 장기는 어떤가. 전시대의 유배 역사를 이어 쌓으며 새로운 기질과 문화를 생성시키고 있었다. 유배 문화에 대한 지역민들의 생각과 그를 재현하려는 노력은 ‘장기 유배문화체험촌’이라는 결과물로 재현되었다. 앞으로 이 공간은 유배와 문학에 대한 종합적인 지식, 정보 습득의 전문 공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는 찾는 사람들의 숫자와 호응도로 예견할 수 있다. 우암과 다산의 장기 유배길은 ‘장기 유배문화체험촌’과 연계해 성찰과 삶의 활력을 되찾게 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다가오고 있다.

<사진/안성용>
 

이상준 향토사학자
이상준 향토사학자

글/이상준

향토사학자, 수필가,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제9회 애린문화상 수상, 저서 ‘장기고을에 가면 조선왕조 500년이 있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