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 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한국은 제1공화국이었던 이승만 정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크게 네 번의 민주항쟁을 겪는다. 첫 번째가 1960년 4·19혁명이다. 그 해 이승만정권의 3·15부정선거로 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국민까지 확대된 반독재투쟁으로 민주주의 혁명의 뿌리였다. 두 번째로 1979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유신독재에 저항해 10월 16일부터 5일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이다. 셋째가 1980년 5·18광주민주항쟁이다. 전두환과 육사출신 하나회의 신군부가 일으킨 12·12 군사반란이 성공하여 이들이 정치실권자로 떠오르자 광주지역 대학생들이 5월 18일에 김대중 석방과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해제를 외치며 일어나 수 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유혈항쟁이었다. 네 번째가 1987년 6월에 일어난 6·10민주항쟁이다. 서울대 학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연세대 이한열의 죽음이 동기가 된 이 시위로 인해 6월 29일에 당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서 정권교체의 계기와 민주화를 이루는 디딤돌을 만들었다.

이 민주항쟁과정에서 1986년 초부터 북한의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삼은 남한의 반체제 학생운동세력인 주사파가 학생운동과 노동 운동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주사파는 학생운동에서 대학별로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를 조직하여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을 바탕으로 자민투를 앞세워 1987년 주요 대학들의 운동권을 장악한 뒤 각 대학의 학생회까지 장악해 일반학생까지 반미투쟁과 혁명투쟁에 동원하는데 성공했다. 이 학생들이 1987년 선봉에서 6·10항쟁을 이끄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한국의 체제를 붕괴시키고 사회주의혁명을 이루려는 운동권의 다수파로 민족해방(NL)의 한 분파이다.

노동운동분야에서는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와 이후 국회의원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와 그 정당을 지지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확립되어 김대중 정권이 출범하자 활동무대가 확대되고 주도권도 더욱 강화됐다. 이들이 본 한국사회의 기본모순은 한국 민중과 미국 간의 민족모순과 한국 민중과 자본계급 간의 계급모순으로 분류해 두 모순 가운데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민족모순으로 정한 뒤 반미투쟁과 사회주의혁명을 위해 민족해방투쟁부터 우선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의 이중성은 한국사회의 특징이다.

일부는 전향했지만 지금처럼 운동권 출신들이 정치권 중심에 전면적으로 진출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가 없다. 민주화 과정에는 진정한 민주화세력이 있는 반면, 체제전복(顚覆)으로 사회주의혁명을 목표로 하는 세력도 있다. 30년 세월을 거쳐서 지금 우리사회의 기득권층이 된 과거 386운동권의 위선이 드러나고, 그들의 사고방식이 내세우는 정치적 정당성도 사라졌다.

그릇된 도덕적 우월의식이 자기성찰을 방해해 부끄러움마저 없어졌다.

그들은 지금 기득권층에서 민주유공자로 둔갑하여 권력의 중심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역사의 무게를 기억한다면 국민들의 냉철함만이 우리사회에서 가짜들을 솎아낼 수 있다. 나라의 흥망이나 참 민주주의는 결국 성숙한 국민들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