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 소설가 황석영과 도구해수욕장을 떠올리다(하)

황석영 소설 ‘몰개월의 새’ 공간적 배경인 포항시 동해면의 풍광.

1960년대 베트남으로 보낼 군인들을 훈련시키던 장소 인근에는 현재 ‘몰개월 비행기공원’(포항시 남구 청림동)이 들어서있다.

줄을 지어 늘어선 비행기를 보며 떠올리는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기자의 경우엔 베트남 하늘을 날아다니며 그 양을 측정할 수도 없는 네이팜탄과 고엽제(枯葉劑)를 쏟아 붓던 미국 공군 폭격기가 가장 먼저 그려진다.

전쟁은 의도하지 않은 수천수만의 개별적 죽음을 부른다. 총알과 폭탄에는 눈이 달리지 않았기에 여자와 아이들도 피해가지 않는다.

바로 그 전쟁이란 괴물이 발광(發狂)하는 베트남의 정글로 떠나야할, 이제 겨우 소년의 티를 벗은 갓 스물한두 살의 군인들.

‘골목 안’에서 함께 살아온 청년들을 향한 몰개월 여자들의 연민은 또래 청년들에게 맞춤법 틀린 편지를 쓰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날들은 끝 간 데 없는 폭음과 발버둥을 동반한 눈물. 그러나, 그런 격정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래와 같은 순정 또한 존재했다. 소설 ‘몰개월의 새’ 중 가장 낭만적인 서술이다.

“물 좀 마시면서 드셔요.”

하면서 물을 따르고 미자는 저도 김밥 한 덩이를 집어먹었다.

“밥에 뜸이 좀 덜 들었죠? 꼭꼭 씹으면 괜찮아요.”

나는 찍소리도 없이 오랜만에 포식을 했다. 물을 마시고 나서 쑥스러워진 내가 물었다.

“장사는... 안하구...”
“낮에두 하나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내 언제... 찾아가지.”
“이따가 담치기해서 나오세요. 밤참 해놓을게요.”
 

낯선 인도차이나반도로 떠나야 하는 군인들
눈물 지으며 손 흔들어주던 ‘골목 안’ 여인들
웃음과 눈물… 골목에서 함께 했던 젊은날의 순정

▲가난하고 슬픈 사람들에게도 연정은 있으니

시인 김정환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성으로서의 삶, 그 막장에 도착한’ 몰개월의 여자들이라고 왜 순정이 없었겠는가.

무너지는 농촌공동체의 마지막 시대를 살았던 그녀들 또한 듬직한 남편 곁에서 아침저녁으로 상에 올릴 반찬 걱정을 하고, 자신이 낳은 아이들의 학급 등수 걱정을 하며 살고 싶었을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이치다.

붕괴한 ‘골목’이 만들어낸 서글픈 군상들. ‘몰개월의 새’가 빛나는 지점은 바로 그 ‘서글픈 군상’들에게도 꿈이 있음을 눅눅하고 어두운 문장으로 밝힌다는 것이다.

‘연애 비슷한 만남’이 지속되던 어느 날, 미자는 한 상병을 자신의 방으로 부른다. 이날 동그란 눈이 예쁜 ‘빠꿈이’ 미자는 닳고 닳은 홍등가(紅燈街) 작부가 아닌 부끄러운 새 신부로 한 상병을 맞는다. 고운 속옷을 준비한 초야(初夜)의 처녀처럼. 이런 문장이다.

우리는 같이 술청 뒤꼍에 있는 관(棺)만한 방으로 스며들었다. 신문지로 바른 벽이 군데군데 떨어져서 흙덩이가 드러나 있었고, 천장 바로 아래 널빤지로 선반을 가로질러놓았는데 그 위에는 빠꿈이의 찌그러진 밤색 트렁크가 얹혀 있었다. 미자가 내 군화를 얹었다. 벽에는 붉은색 잠옷이 걸려 있었다. 미자는 푸우, 하고 웃었다. 어깨를 위로 쑥 올리면서 빠꿈이는 웃었다. 목침 위에 더께로 앉은 촛농 사이에 몽당초가 밝혀져 있었다. “초가 다 타면 자요.”

하지만, 개인의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역사란 없다.

그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1932~1959)나 체 게바라(Che Guevara·1928~1967) 정도가 아니라면.

또한, 곁에 두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곁에 둘 수 있는 연인이란 지극히 드물고도 드문 법이다. ‘몰개월의 새’가 쓰인 시대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포항 도구해수욕장으로 불리는 바닷가 근처 빨래터. 속옷을 치대던 미자는 ‘골목 바깥’ 사람들의 결정으로 인해 ‘골목’을 떠나 이국의 전장으로 가게 될 한 상병에게 ‘내가 얼마나 당신을 아끼는지’ 거칠게 고백한다.

여기서 “한 번 자줄게”라는 말은 “당신을 내 목숨 이상으로 사랑해요”로 들린다. 맞다. 신경림 시인의 진술처럼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집에 갔었다며요?”
“응... 우리 내일 모레 떠난다.”
“밥 먹었어요?”
하다가 미자는 얼른 속옷 나부랭이들을 대야에 챙겨 넣었다.
“한 상병, 서울에... 좋은 사람 있어요?”
“있었는데 시집 갔더라야.”
“저런... 그럼 허탕쳤겠네.”

(중략)

“왜 웃어?”
“가엾어서.”
“안됐지 뭐...”
“뭐가....”
“사는 게 그냥, 다... 내일 밤에 나와요 꼭. 한 번 자줄게”
 

지난 세기 파월장병 훈련장이었던 도구해수욕장. 요즘은 거기서 해병대 캠프가 열리기도 한다. /경북매일DB
지난 세기 파월장병 훈련장이었던 도구해수욕장. 요즘은 거기서 해병대 캠프가 열리기도 한다. /경북매일DB

▲세상에 ‘유치한 인생’이란 없다

마침내 훈련을 마친 청년들이 몰개월을 떠날 날이 왔다. 가속화하는 ‘골목’의 붕괴를 안타까이 바라보며 물설고 낯선 인도차이나반도로 떠나야 하는 젊은 군인들.

기괴한 죽음의 향기를 몸에 묻히고 떠나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건 ‘골목 바깥’의 사람들이 아닌 가난한 몸을 아프게 부대끼던 ‘골목 안’ 여자들이었다. 해서, 이 장면에선 눈물 냄새가 난다. 영화라면 클라이맥스다.

‘안개가 부연 몰개월 입구에서 나는 여자들이 길 좌우에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 모두들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꽃이며 손수건이며를 흔들고 있었다. 수송대열은 천천히 나아갔다. 여자들은 거의가 한복 차림이었다. 병사들도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뛰어서 쫓아오는 여자들도 있었다. 나는 트럭 뒷전에 가서 상반신을 내밀고 소리 질렀다. 미자가 면회 왔을 적의 모습대로 치마를 펄럭이며 쫓아왔다. 뭐라고 떠드는 것 같았으나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얀 것이 차 속으로 날아와 떨어졌다. 내가 그것을 주워들었을 적에는 미지는 벌써 뒤차에 가려져서 보이질 않았다. 여자들이 무엇인가를 차 속으로 계속해서 던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무수하게 날아왔다. 몰개월 가로(街路)는 금방 지나갔다. 군가 소리는 여전했다.’

남중국해 한복판을 항해하는 군함에서 “당신, 기어코 쓰러지지 말고 살아 돌아와요”라 적힌 ‘하얀 것’을 펼쳐본 주인공 나(한 상병)의 심경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보면 아득해지는 마음을 숨길 수 없다.

‘골목’에서 살았던 미자는 ‘골목’을 떠나 ‘전쟁의 광기(狂氣)’에 섞여들 한 상병에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조잡한 오뚝이를 선물했다. 쓰러지면 쓰러짐의 탄성으로 일어나고, 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황석영의 1976년작 ‘몰개월의 새’는 이미 반세기 가까운 옛적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 세월동안 ‘골목 안’의 우리는 ‘골목 바깥’으로 나왔는가? 이 엄혹한 질문에 누가 있어 “그렇다”고 함부로 대답할 수 있을까.

젊어서, 그 젊음으로 인해 더 아팠던 군인과 여자들이 살았던 동네 몰개월. 오늘은 도구해수욕장에서 날아온 새 한 마리가 몰개월 인근 동해면과 청림동 하늘을 우울하게 날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새’는 자유와 탈속(脫俗)의 은유였다.

‘골목’으로 상징되는 이미 멀어져간 공동체의 꿈.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했던 웃음과 눈물의 날들. 황석영은 소설의 마지막을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끝낸다.

40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 읽어도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절창(絶唱)이다. 맞다. 예나 지금이나 “인생에서 유치한 일이란 하나도 없다.”

‘작전에 나가서야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중략) 몰개월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임을 내가 눈치 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몰개월을 거쳐 먼 나라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었던 일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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