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해파랑길 포항 구간

해파랑길 15코스 ‘발산2리’
해파랑길 15코스 ‘발산2리’

살다보면 나침반이 있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갔지만 아닐 때가 있고 잘못 간다고 여겼던 이들이 뒤늦게 보면 제대로 가고 있다. 갈팡질팡할 것 없이 나침반만 보고 걸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평온할까. 문득 삶이 흔들린다 싶을 때 바다로 방향키를 잡아보는 건 어떨까. 오랫동안 천천히 걸어보면 더 좋겠다. 바다라는 푸른 나침반과 동행하는 해파랑길이라면 더더욱 좋겠다.

해파랑길은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이어지는 770㎞ 길이다. 국내 최장의 트레킹 코스로 산티아고 순례길과 비슷한 거리다. 모두 50개 코스며 영남과 강원지역 12개 도시를 지난다. 포항 구간은 13코스부터 18코스까지로 100㎞에 이른다. 포항은 가장 긴 해파랑길을 가진 도시다.
 

부산~강원도 고성까지 국내 최장 트레킹 길
50코스 중 13코스서 18코스까지 100㎞ 구간

첫 시작 13코스는 양포항서 장기바닷길 둘러
구룡포서 호미곶 해맞이광장까지는 14코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네 구간이 완공되면서
걷기 편안해진 15코스는 겨울에도 걷기 좋아
16코스는 연오랑세오녀 먹바우 등 볼거리 즐비

용한리 해변가 17코스는 국내 3대 서핑 성지
18코스 칠포~화진에는 곳곳마다 전망대 조성

해파랑길 14코스 ‘호미곶’
해파랑길 14코스 ‘호미곶’

□ 장기 바다와 구룡포의 아름다움 품은 13∼14코스

해파랑길 포항 구간의 시작은 양포항이다. 청어잡이 배들이 줄지어 서있고 선박 사이로 강태공들이 낚싯대를 드리우는 항구다. 해파랑길 초입에서 거대한 물고기 떼가 발길을 붙잡는데 이후에도 가끔 보게 되는 방어 양식장이다. 관리인의 말을 들어보니 방어는 워낙 예민한 어종이라 인적이 드문 곳에서 키우지만 해파랑길이 생기는 바람에 길가에 나왔다고 한다. 자연스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지면서도 100마리는 족히 넘어 보이는 방어를 보는 재미에 자주 걸음을 멈췄다. ‘창바우 마을’을 지나면 육당 최남선이 조선 10경으로 꼽은 ‘장기 일출암’에 이른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바위에는 생수가 솟아난다고 해서 ‘날물치’, ‘생수암’으로도 불린다는데 물이 맑아서 여름에는 물놀이객 차지가 되었다. 그에 비해 장길리 복합낚시공원에 있는 ‘보릿돌’은 낚시꾼들 차지다. 갯바위 모양이 보리같기도 하거니와, 보릿고개 시절 바위 아래 미역으로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보릿돌까지 이르는 200m의 교량에는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

해파랑길 13코스에서 장기 바다의 매력에 빠졌다면 14코스는 구룡포 차례다. 용 열 마리가 승천하다가 한 마리는 바다 속으로 떨어지고 아홉 마리만 하늘로 올랐다는 구룡포에서 한반도 지도에서 호랑이 꼬리 끝에 해당하는 호미곶까지. 곳곳에 유명한 명소들을 보석처럼 박아놓은 말이 필요 없는 길이다. 시작지점은 구룡포항. 관광객 대부분이 일본인 가옥거리로 향하기에 해파랑길은 한산하다. 항구를 벗어나 골목을 걷다보면 구룡포만의 독특한 건축물이 눈에 띈다. 관광지의 인위적인 느낌이 싫다면 북적거리는 골목을 조금 비켜나서 걸어도 좋으리라.

구룡포해수욕장을 지나 얼마나 걸었을까. 누군가 도로에 크게 써놓은 ‘길이 없음’이라는 글귀를 무시하고 해파랑길 표지판만 믿고 걷다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비가 온 뒤라 바다로 흐르는 민물이 불어난 탓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비탈진 암석이 위험해 보였다. 결국 언덕 위 차도로 올라가야 했기에 좁은 골목을 헤매다가 우연히 풍경 좋은 명당을 만났다. 간혹 길을 잃기도 하고 둘러가기는 해도 바다를 나침반 삼으면 돌아갈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골목길을 걸을 때보다 지도를 덜 보게 되고 산길보다 마음이 느긋하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호미곶을 일곱 번이나 답사했다는데 둘러가는 것쯤이야. 그렇게 걷다보면 선물 같은 풍경이 또 펼쳐진다. 막대 모양 돌을 켜켜이 쌓아올린 듯한 바위, 구룡포 주상절리다. 관광객들은 주상절리 앞에 경외심을 담아 조약돌을 탑처럼 쌓고 간다. 1억 년의 시간을 간직한 바위를 보며 걷다보면 멀리서 호미곶 등대가 깜빡이고 ‘상생의 손’이 손짓을 한다.
 

해파랑길 15코스 ‘흥환리’
해파랑길 15코스 ‘흥환리’

□ 노을 명승지 즐비한 15∼16코스

해파랑길 15코스(호미곶 해맞이광장~흥환보건소)와 16코스(흥환보건소~송도해수욕장)는 해파랑길 전 구간 가운데 유일하게 남쪽으로 향하는 길이다.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독특한 지형에 위치한 까닭이다. 이 때문에 동해지만 바다를 붉게 적시는 노을 명승지가 많다. 바다 위로 떠오르고 지는 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도시가 또 있을까.

최근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 완공되면서 걷기는 더 편해졌다. 둘레길이 조성되기 전 15코스는 여간 힘든 길이 아니었다고 한다. 해안둘레길 개통 후 포항은 해안길이 아름다운 도시로 거듭나는 중이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의 주요 구간은 네 곳으로 해파랑길과 진행 방향은 반대다. 해병대 상륙훈련장과 도구해수욕장,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을 연결하는 ‘연오랑세오녀길’이 소박하지만 정돈이 잘 된 길이라면, 동해면 입암리에서 흥환어항까지 이르는 ‘선바우길’은 볼거리가 화려하다. 모감주나무가 유명한 ‘구룡소길’은 자갈길과 산길이 섞여있어 힘들지만 지도에 없는 신비스러운 바위를 만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상생의 손이 반기는 ‘호미길’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겨울에 걷기 좋은 여행길이다.

25㎞에 이르는 해안둘레길을 모두 걷기 힘들다면 ‘선바우길’만 걸어도 좋다. 데크길을 따라 걷는 6.5㎞ 구간으로 한 시간 반이면 둘러볼 수 있다. 신생대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기암괴석이 많아 해안둘레길의 백미로 꼽힌다. 우뚝 선 바위인 ‘선바우’는 모래와 자갈을 썩은 독특한 모양으로 벼락을 맞아 지금처럼 아담해졌다고 한다. 거대하고 흰 바위 ‘힌디기’ 앞에는 늘 사람들로 붐빈다. 힌디기의 큰 구멍 앞에서 소원을 빌면 부자가 된다는 전설 때문이다. 용왕과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는 바위섬 ‘하선대’는 갈매기들만 노닐고, 연오랑과 세오녀를 태우고 갔다는 검은 바위 ‘먹바우’는 금방이라도 바다로 나아가려는 모양새다. 세상에 어느 유능한 석공을 데려온들 이처럼 조각할 수 있을까. 바람과 파도와 시간이 빚어낸 석조 예술품에 심취해 걷다보면 시간 가는 걸 잊을 정도. 데크길 아래로는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투명한 바닷물이 찰랑거리고 청각이며 우뭇가사리를 줍는 사람도 많다.

해파랑길 13코스 ‘장길리’
해파랑길 13코스 ‘장길리’

□ 17코스 죽천 용한리는 국내 3대 서핑 성지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완주하고 다시 북쪽으로 나침반을 놓으면 송도와 영일대, 칠포해수욕장에 이르는 17코스와 마주한다. 포항시민이라면 굳이 해파랑길 트래킹이 아니더라도 출퇴근길이나 친구를 만나러 간다거나 산책을 하면서 오가는 생활 속 길이다. 길이라는 것이 있어서 걷기도 하지만 걷는 이들의 바람이 모여 만들어지기도 한다. 언젠가 여남갑 등대를 보며 해안길을 걷다가 길이 막혀 돌아선 적이 있다. 지금은 여남동 둘레길이 뚫리면서 해변이 깔끔해졌다. 산책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길이 생겨서 좋다고 입을 모은다. 사람이 길을 만들지만 길은 더 많은 사람을 부르는 힘이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바다와 가까이 사는 건 행운이다. 조금만 움직이면 과메기와 멸치가 꾸덕꾸덕 말라가는 덕장을 볼 수 있고, 새벽 바닷가에서는 부지런한 어선들이 쏟아놓은 싱싱한 횟감을 살 수도 있다. 생선을 손질하는 인부들 곁을 맴맴 돌며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살찐 고양이들을 보는 것도 즐겁다. 여남 멸치 덕장에서 전어며 어린 돔, 전갱이 등을 바로 썰어서 파는 회를 산 적이 있는데, 서너 명 먹을 양이 만 원에 불과했다.

영일만항 인근 용한리 해변은 17코스를 걷는 젊은 도보객들에게 소위 핫플레이스다. 강원도 양양, 부산 송정과 더불어 국내 3대 서핑 성지로 불리면서 전국에서 서퍼들이 몰려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도보여행자는 무거운 배낭을 잠시 내려놓고 서핑을 즐긴 뒤 다시 길을 떠난다. 길에서의 자유를 온전히 만끽하는 여행자들이다.

해파랑길 18코스 ‘오도리’
해파랑길 18코스 ‘오도리’

□ 호랑이 등을 오르는 17∼18코스

포항시는 해파랑길 17~18코스를 ‘영일만 북파랑길’로 다듬었다. 송도에서 송라 지경리까지 39.2㎞ 구간으로 ‘영일대길’, ‘주상절리길’, ‘조경대길’, ‘용치바위길’ 모두 4코스다. 한반도 지도에서 ‘호랑이 등’에 해당하는 구간이어서 ‘호랑이 등오름길’이라고도 한다. 자연훼손을 피하기 위해 기존의 백사장과 기암괴석, 군부대 이동로를 살리고 필요한 구간에만 데크길을 설치했다. 모래와 자갈 해변이 길게 이어진 곳을 제외하면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18코스(칠포~화진) 가운데 칠포에서 오도까지는 ‘동해안 연안녹색길’이라는 이름이 하나 더 있다. 과거 군사보호구역으로 해안경비 이동로를 트레킹 코스로 정비했다.

경치 좋은 곳마다 전망대가 조성돼 여행자들이 쉬어가기도 좋다. 칠포해수욕장 근처 해오름전망대는 철망 아래로 철썩이는 파도가 짜릿하다. 100m가 넘는 ‘이가리 닻 전망대’ 선두에 서면 미지의 바다로 항해하는 선장이 되어 볼 수도 있다.

7번 국도를 자주 다니지만 도로에서의 풍경과 해파랑길의 풍경은 다르다. 포항의 하재영 시인은 “바다는 넓은 귀를 가졌다”고 했다. 바다의 귀에 온갖 시름을 소근 대며 걷다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시인도 경험했을 터. “어떤 슬픔도 씻어주며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어주는 동해”는 해파랑길에서만 느낄 수 있다.

해파랑길 포항 구간을 마무리하던 날은 비바람이 거셌다. 화진해수욕장을 가로막은 육군훈련장 탓에 자꾸 뒤집히는 우산을 부여잡고 경적을 울리는 차를 피해 걸어야 했다. 그럼에도 최근 군사시설 철거를 협의 중이라는 소식에 다시 걸을 날을 기다린다.

해파랑길을 걷는 동안 햇볕이 좋은 날도 있었지만 바람이 거세거나 비가 내리는 날도 있었다. 바다는 늘 한 가지 표정으로 맞아주지 않는다. 물결이 비늘처럼 간지러운 날도 있지만 모든 걸 집어삼킬 듯 파도가 성난 날도 있었다. 그렇기에 아는 길이어도 늘 새로웠다. 그러니 당신도 조금만 나와 보시라. 나침반을 놓을 세상이 넓어진다. 가까이에 바다가 있고 길이 있다. 해파랑길이 있다.

<사진/안성용>

글/배은정 

방송작가,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에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