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청송 진보향교와 백호서당

세번이나 옮긴 진보향교.

청송 진보는 우여곡절이 많은 묘한 곳이다. 진보현, 진보군으로 독자적인 행정체제를 지속하다가 마지막에 청송군으로 편입되어 지금은 한적한 면 소재지로 남아있는 곳이다. 한때의 영화는 추억과 잔영이 남듯이 진보 곳곳의 문화유적이 그 옛날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우선 행정단위에 있는 국립 관학인 향교가 있다. 그 향교는 진보의 변천만큼이나 사연도 많아 몇 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백호서당도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어 1989년에 임하댐 상류 반변천 산기슭 위에 옮겨지었다.

 

왕평 이응호의 ‘황성옛터’ 노래비.
왕평 이응호의 ‘황성옛터’ 노래비.

#. 진보는 어떤 곳인가

청송 진보는 사면이 산으로 쌓여있는 분지형이라 강원도 양구의 펀치볼의 축소판 같다. 아무리 번성했던 고을도 행정단위가 축소되어 관청이 옮겨가면 잔영만 남는다. 진보현으로 영화를 누렸지만 청송으로 편입되어 면으로 쪼그라졌다. 강물이 흐르면 그 주위는 퇴적물이 쌓여 비옥한 옥토가 되고 인근에 산이 있으면 땔감으로 밥을 짓고 난방을 하였던 것이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라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다. 통일신라 신문왕 때 전국을 9주5소경을 설치할 때 청송지역은 상주와 명주(강릉)에 분할 예속되어 있었고 757년(경덕왕 16년) 전국 주현의 대대적인 명칭변경 때 칠파하현은 진보현으로 되고 이때 진보현은 문소군으로 편제된다. 신라 말에 강성해진 지방호족의 연합체인 고려시대에 청송지역의 대표적인 호족은 선필과 홍술이다. 진보현의 촌주 홍술은 922년(태조 5년) 고려에 귀부했고, 왕건은 그를 문소군으로 파견해 의성부성 주장군으로 삼고 후백제를 방어하게 한다. 고려시대 지역 토성의 대표적 인물이 청송 심씨 심홍부와 진성(진보)이씨 이자수 등이 있다.

조선시대는 청송군과 진보현 두 고을로 존속하다가 1418년(세종 즉위년) 진보현 속현 청부현은 소헌 왕후 심씨의 본향이라고 청부현과 진보현 두 고을 명칭 한자씩 따서 청보군으로 승격한다. 그러나 진보현 백성들이 관아가 멀어 불편한 점이 많다는 청원으로 송생현과 합쳐 청송군이 되고 1459년(세조 5년)에는 세조의 어머니 소헌 왕후 심씨를 기리기 위해 청송을 도호부로 승격하고 1423년(세종 5년) 현으로 독립한 진보현은 1474년(성종 5년) 고을 사람이 현감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폐현되어 청송도호부에 편입된다. 1478년(성종 9년)에 복구되어 이어오다 1895년(고종 32년) 2차 갑오개혁 때 효율적인 지방통치를 위해 23부제(府制) 실시할 때 진보현이 진보군으로 개편된다. 1914년(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전국 부, 군의 통폐합에 따라 진보군은 갈기갈기 찢겨 청송군에 편입되어 완전 소멸된다. 남면은 청송군 파천면 일부로 편입, 북면은 영양군의 남면, 영양면, 입압면의 일부로 편입, 동면은 영양군 석보면, 동면의 낙평리는 영덕군 지품면으로 흡수된다. 오늘날 진보는 상리면, 하리면, 서면을 보듬고 청송군 진보면으로 겨우 이름만 남았다.
 

진보출신 소설가 김주영의 객주문학관.
진보출신 소설가 김주영의 객주문학관.

#. 청송서 진보 가는 길

청송서 국도31번 타고 진보로 가는 길은 왼편에 맑게 흐르는 용전천을 끼고 가다 산길로 접어들면 길가에 왕평 이응호(1908~1940)의 ‘황성옛터’의 노래비가 소나무 숲에 서있다. 황성옛터는 한국인 최초의 작사, 작곡 가요이고 왕평은 1930년대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중심인물이었는데 공연장에서 연기하다 쓰러져 33살에 죽었다. 영천이 고향인데 아버지가 사는 이곳 파천면 송강리 수정사 입구 산기슭에 묻혔다.

진보 중심부 들어가는 완만한 능선에 진보 출신 소설가 김주영의 ‘객주문학관’이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격상으로 8월 25일부터 별도 해제시까지 휴관한다는 플래카드가 선명하게 붙어있다. 그 옆에는 ‘객주’의 소설가 김주영 제22회 만해 문예대상 수상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만 바람에 휘날린다.

협소한 청송읍 보다 넓은 평지의 진보는 소도시 같은 분위기다. 왕건 영정을 모시는 사당에 갔다. 주위의 큰 고목들이 진보의 녹슬지 않은 역사를 말해준다. 들어가는 출입문에는 사람 없고 왕거미 줄이 얼굴에 달갑지 않은 촉감으로 맞이한다. 건물 안에는 영정도 위패도 없었다. 왕건의 겉옷에 두르는 붉은 띠가 바람에 날려 이곳에 떨어진 것이 신령스럽다고 지었단다. 옆에는 인조 잔디 깔린 체육시설에 아래를 볼 수 있는 전망대 데크를 해놓았다. 아래는 영양에서 흘러온 반변천이 안동 임하댐으로 향하고 강 건너 광덕산 아래 진보향교와 광덕마을이 보이고 오른쪽 저 멀리는 검은 마음의 범죄자를 수감하는 이름도 유명한 청송교도소가 아스라하게 보인다. 녹색우 거진 산천에 교도소의 하얀 건물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저 속에 갇혀있는 분들이 저 하얀 건물같이 하얀 마음 되길 바란다. 강가에 움푹 파인 물가에 혼자서 낚싯대 드리운 사람은 무엇을 생각할까?

반변천을 가로지르는 긴 광덕교 건너자마자 왼편에 길게 이어진 뚝 길은 소도시 시골전원의 오솔길 마냥 낭만이 흐른다. 강변의 초가을 상큼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 것도 괜찮고 벚꽃 피는 봄이나 익어가는 가을날은 더욱 낭만일 것이다.

우측마을 길 따라 구불구불 들어가면 길 왼편에 송만정(松巒亭)고택이 길손을 반긴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의병장과 창녕 화왕산 전투에서 뚜렷한 공을 세웠던 송만 권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863년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북부지방의 양식대로 건물이 온통 감쌌지만, 대청마루 2칸에 좌우에 방을 넣고 그 앞에 누를 한 칸씩 지은 대단한 낭만과 매력이 넘친다.
 

임하댐 수몰로 옮겨온 백호서당.
임하댐 수몰로 옮겨온 백호서당.

#. 진보향교와 백호서당 그리고 급발진 차

진보향교는 송만정에서 조금 더 오르면 마을 끝 산기슭에 있다. 시내 중심부에 있어야 할 향교가 외진 곳에 있으니 서원같이 느껴졌다. 대문에 진보향교 글씨의 먹물이 빛바랜 만큼이나 향교도 기능 잃고 있다. 진보향교는 1440년(태종 4년)에 창건했다고 여러 기록이 나오는데 1440년은 세종 23년이라 어느 하나가 오기다. 1694년(숙종 19년) 광덕산 기슭으로 1882년(고종 18년) 구읍으로 1886년(고종 23년) 현재의 위치로 세 번이나 옮겼던 것이다. 외삼문, 강학공간의 중심대는 명륜당과 동, 서재가 있고, 내삼문과 대성전이 남아있다. 대성전에는 제향의 공간이니 공자를 위시한 중국의 성현들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명륜당 앞 좌우에 동서재가 있는데 진보향교는 명륜당 뒤에 있어 특이하다. 명륜당에는 “충(忠)과 의(義)의 뜻을 새기다” 플래카드가 빛바랜 향교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하나 없는 향교에 온갖 풀벌레 우짖는 소리와 가느다란 바람 소리 뿐이다. 발아래 땅에는 수많은 개미가 소리 없이 열심히 가고 있었다.

향교를 둘러보고 향교 앞에 있는 잘 손질해놓은 대문 없는 고택으로 들어갔다. 주인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덕광임업’회사를 경영하는 젊은 주인 권상희 대표였다. 집안의 고택을 구입했고 수리하여 고택체험 숙박으로 할 계획이란다. 고택은 이런 젊은이들이 많이 살아야 활기차고 생동감이 있다.

다시 광덕마을로 나와 북쪽마을 오른쪽 기슭에 귀암 권덕조의 뜻을 기리는 정자에 갔다. 숙부인 충재 권벌에게 배웠고 아들이 송만 권준이다. 방치되어 퇴락할 때로 퇴락한 모습이다. 건물은 찌그러지고 풀들이 무성한데 후손들이 세운 송덕비는 선명했다.

내려와 산 고개 넘자 세장마을이 나온다. 마을입구에서 좌회전하여 조그만 다리를 건너 산길로 접어들었다. 이정표에는 1.5km라고 새겨져 있다. 산 중턱 시멘트 길에 몇 개의 다리를 건너자 강(반변천) 언덕 위에 옮겨온 백호서당이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강 아래를 보니 염소들과 거위들이 바위를 놀이터 삼아 한가롭게 놀고 있었다.

서당 문은 열려 있고 풀은 무성하고 사람 하나 없는 서당에 올랐다. 힘 있고 품격 있게 잘 지었는데 원장도 유생도 없어진 빈 공간에 산새들만 구슬피 울고 세찬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강 건너 저 멀리는 진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호서당 누에서 바라본 진보 풍경.
백호서당 누에서 바라본 진보 풍경.

백호서당은 숙종 때 유학자 존재 이휘일(1619~1672)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당시 청송 현감 조명협의 발의로 영남유림과 진보향중에서 1757년(영조 33년)에 건립한 것이다. 임하댐 수몰로 1989년 상류인 이곳에 옮겨온 것이다. 존재 이휘일의 어머니는 최초의 한글 음식요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이고, 아버지는 석계 이시명, 동생은 퇴계 학통을 적통으로 이어받은 갈암 이현일이다. 흐르는 강물과 백호서당을 뒤로하고 진보 시내 전통시장에서 소설 속의 ‘객주’를 생각하며 보부상들도 먹었을 소머리국밥을 맛있게 먹었다.

청송, 진보를 답사하고 와서 일요일 오후에 핸드폰과 지갑을 잃어 버렸다. 지갑보다 전화번호와 사진자료 많이 있는 핸드폰이 문제였다. 핸드폰에 찍어왔던 신문연재 사진이 없어 난감했고, 더구나 월요일은 신문연재 마감 날이라 사진만 찍으러 청송으로 다시 갔다. 백호서당 사진 찍고 시동 걸고 출발하는데 차가 손살 같이 달린다. 브레이크를 꽉 눌렀는데 힘없이 쑥 들어가고 어디를 박고 멈춰야 했다. 오른쪽은 까마득한 낭떠러지고 중간에 시멘트창고 건물 앞에는 목재 파레트가 쌓여있어 거기에 박았다. 차는 멈췄지만 심하게 찌그러졌다. 아직 신문에 보낼 사진을 찍으러 청송까지 가야했다. 마침 주인이 와서 상황을 보고 몇 번이나 천만다행이라고 하시면서 어머님과 밭일 하다가 평소 같으면 이 시간(오후 4시정도)에 오지 않는데 오늘은 어머님이 ‘야야 집에 가봐라” 하시어 왔단다. 외딴집 주인 권오찬님은 법 없이도 살 착한 분이고 고마울 따름이다. 자차보험 있어도 부담금 50만원과 차 수리 이틀 렌트비 20만원 주었다. 급발진은 현대차하고 하란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