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암 극락전과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진 바위. 염불암은 대구 동구 도학동 124에 위치해 있다.

가을이 오고 있다. 폭염과 폭우를 피해 산사를 찾아다니던 지난하던 여름은 잊고, 어느덧 새로운 계절 앞에서 나는 또 설렌다. 풍요와 감사함으로 물결치는 계절이다. 매표소를 지나 동화사 산내 암자들이 모여 있는 길로 접어들자 울창한 숲 그늘이 이어진다. 휴일 뒤의 숲은 지친 기색도 없이 평온하다. 잘 닦여진 길조차 서로를 포용하며 숲의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다.

부도암을 지나자 숲은 더욱 고요하다. 가끔씩 배낭을 메고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시끌벅적한 말소리와 배가 터질 듯 불룩한 배낭이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 그들이 누리는 수확의 즐거움이 내 눈에는 다람쥐의 먹잇감을 뺏는 탐욕으로 비쳐져 씁쓸하다. 나는 묵묵히 산길을 오르고 그들은 더 큰 만족감을 얻기 위해 숲을 헤치며 사라진다.

인드라망의 그물 같은 인연과 관계 속에 존재하는 삶, 그들이 주운 도토리는 어떤 통로를 거쳐 내 입을 즐겁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나침은 부족함보다 못하다 했던가. 누군가에게는 채우지 못해 안달하는 삶이 또 누군가에게는 비우지 못해 괴로운 게 인생이다. 아름다운 소유, 그것은 인간이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이며 딜레마이다.

숲은 도토리 줍는 사람들로 떠들썩하다 다시 조용해지기를 반복한다. 그래도 가을햇살이 비쳐드는 숲은 그 자체만으로 자비롭다. 천천히 걷는 발걸음 사이로 번뇌는 사라지고 진정한 자유가 물결친다. 몸과 마음이 한없이 가볍다. 이 평정심과도 같은 마음, 아라한의 상태가 이와 같지 않을까?

염불암은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경순왕 2년(928년)에 영조선사가 창건한 염불암은 동화사 부속암자이다. 고려중기에 보조국사가 중창한 후 여러 차례 중창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는데 나는 초행길이다. 다리가 아파오자 수없이 떨어진 도토리들이 사랑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도토리를 줍는다. 이내 주머니가 가득하다. 해찰하는 즐거움에 빠져 있을 때 산 위에서 차 한 대가 내려오다 멈춘다.

“내가 주우려고 봐둔 도토린데 다 주워가면 안 돼요.”

창문을 열고 농담처럼 건네시는 스님의 미소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탐욕에 눈 먼 몰지각한 사람으로 비쳐진 건 아닐까. 그런데도 사람을 무안케 하지 않는 스님의 너그럽고 재치 있는 화술이 고맙고 향기가 되어 머문다. 산 아래로 사라지는 차를 바라보며 뒤늦게 염불암 스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토토리를 줍고 버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염불암이 보인다. 암자는 가을 햇살 속에서 눈이 부시도록 환하다. 팔공산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절,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낮은 감탄사가 자꾸만 터져 나온다. 역사의 깊이가 느껴지는, 소박하면서도 정겨운 사찰이다.

인적 없는 경내에는 약수 떨어지는 소리만 가득하다. 작은 극락전은 단청이 벗겨져 고졸미가 흐르고, 그 뒤쪽에는 대구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과 보살좌상이 새겨진 커다란 자연석이 두 손을 모으게 한다. 한 승려가 바위에 불상을 새길 것을 발원하자 안개가 7일 동안이나 낀다. 그 후 바위 양쪽에 불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문수보살이 조각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또한 불상이 새겨진 바위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염불암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마당을 서성이며 암자의 풍경을 마음에 담는다. 극락 전 앞에는 보조국사가 쌓았다는 청석탑이 유리보호막 안에 애처로이 서 있다. 세월의 흔적은 마음을 여미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극락전 법당으로 들어서는데 마룻바닥이 삐걱이며 고통을 호소한다. 세월의 무게조차 기도가 되어 숙연해지는 순간이다. 수많은 불자들의 염원이 실렸을 마룻바닥 위에 내 작은 기도도 더해진다.

손때 묻은 카펫에서 어느 불자의 노고와 정성이 보인다. 이곳에서는 평범하고 작은 것들이 더 마음을 끈다. 오늘은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위해 기도하리라 마음 먹고 백팔 배를 하는데 허리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신기하다. 합장을 할 때까지만 해도 불편했는데, 이런 것을 두고 부처님의 가피라고 하는 것일까?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마당 한켠에 한 됫박 정도의 도토리가 수행하듯 몸을 말리고 있다. 농담처럼 던지던 스님의 말씀이 떠올라 가슴이 훈훈해진다. 포행 중에 틈틈이 주워 모으신 듯하다. 도토리묵을 좋아하는 스님과 왠지 잘 어울리는 염불암이다. 탱글탱글하게 쑤어진 도토리묵이 공양으로 올려질 걸 생각하니 더 정감이 간다.

다람쥐와 도토리를 나눠 먹는 염불암의 소박한 살림, 지나침이 없는 소유는 보는 이조차 겸허하게 만든다. 그 소박함 속에는 염불암의 오랜 기도와 여유로움이 서려 있다. 처음 와보는 절이지만 포근하고 신뢰감이 간다. 작은 도토리가 나를 염불암으로 이어준 것인지도 모른다.

염불암 옆 동봉으로 가는 등산로는 휴면 기간이다. 자연도 인간도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몇 차례의 태풍과 자연재해들로 마음을 졸이고 있는 지구촌, 그런데도 삶의 방식은 바뀔 줄을 모른다. 우리는 좀 더 천천히 갈 수 없을까?

이 가을에는 소유욕에 물든 일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풍요로움을 느끼고 싶다. 특유의 떫은맛이 감도는 도토리묵 같은, 그런 소박한 즐거움을 누려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