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스케스의 ‘비너스의 단장’

스페인 바로크 미술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그의 독보적인 회화적 능력은 독특한 공간해석에서 발휘된다. 그림은 실제 대상을 보고 그렸든, 어떠한 장면을 상상해 그렸든, 2차원의 평면에 가상의 공간을 창조한다. 미술사 서적이나 미학이론을 공부하다 보면 ‘미메시스’(μιμησι<03C2>)라는 용어를 접하게 되는데, 그리스어로 ‘모방’이라는 뜻이다. 모방은 어떠한 대상을 진짜인 것으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그럴 듯하게 그리는 것으로 르네상스가 발명한 원근법도 공간에 대한 모방이라 할 수 있다.

동시대 대부분의 화가들이 현실을 모방하는데 몰두하고 있을 때, 벨라스케스는 그림 속 공간을 현실의 실제공간과 연결시킬 방법을 구상한다. 벨라스케스의 독특한 공간해석은 그의 대표작 ‘시녀들’에서 잘 관찰된다. 그림에 묘사된 공간은 스페인 왕궁 화가의 작업실이다. 벨라스케스가 커다란 캔버스를 세워두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가 시녀들과 함께 화가의 작업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공주와 그 일행들이 조금 놀란 듯 보인다. 화가가 국왕 부부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바로 후경에 걸려 있는 거울에 이들의 모습이 비취고 있기 때문이다.

벨라스케스 보다 200여 년 앞서 거울을 이용해 그림 속 공간과 실제의 공간을 연결시킨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 얀 판 에이크(1390∼1441)가 있다. 1434년경에 제작된 그의 대표작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에서도 거울이 사용되어 그림 밖 현실 공간을 비춰주고 있다. 그런데 두 그림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얀 판 에이크는 아르놀피니 부부를 앞에 세워두고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직접 모습을 그림에 드러내는 대신 벽에 걸린 작은 거울에 반사되어 보이도록 한다. 하지만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전혀 다른 구성을 보인다. 세워둔 캔버스 앞에 팔레트와 붓을 손에든 화가는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다. 화면 밖에는 국왕 부부가 그림의 모델을 서고 있고, 이들의 모습이 벽에 걸린 거울에 비춰져 있다. 다시 말해 그림 속 화가는 그림 밖 현실의 공간에 있는 펠리페 4세와 왕비를 그리고 있고, 현실 공간에 자리한 인물들의 모습은 거울이라는 장치를 통해 다시금 그림 속 공간으로 들어오는 한층 복잡해진 구성이다.

그림 속 가상의 공간과 국왕 부부가 위치한 현실의 공간 그리고 거울을 통해 비춰지는 현실의 공간. 공간의 확장과 확장된 공간의 재확장. 이렇듯 다양한 층위의 공간을 하나의 작품에 표현하는 것이 벨라스케스의 회화에서 찾을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이다. 거울을 이용한 회화적 공간 확장을 경험할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또 다른 대표작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비너스의 단장’이다.

옷을 입지 않은 비너스가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등을 보이며 침대에 누워 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심지어 관능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비너스의 모습이다. 큐피드는 거울을 세워 비너스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

매끄러운 살결의 비너스는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화면을 두 영역으로 나누고 있다. 이를 통해 화면에는 감상자의 시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비스듬히 누워있는 비너스는 거울로 시선을 던진다. 그런데 거울에 반사된 얼굴이 흐리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비너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큐피드가 들고 있는 거울의 각도로 미루어 짐작건대 화면 밖에서 그녀를 응시하는 감상자를 향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거울에 희미하게 반사된 비너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살짝 지으며 감상자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바로크 미술을 이끌었던 거장답게 비너스의 시선을 통해 그림 속 회화적 공간을 심리적으로 그림 밖 현실의 공간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