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갈수록 대전에 오가는 횟수가 빈번해진다.

어머니, 아버지 만나 뵙고 점심이나 저녁 식사라도 같이 해보자는 것이다. 1, 2주일에 한 번 이렇게라도 하고 나면 그 사이에 장남 된 마음이 한결 안정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주 대전에 가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사실, 대전 집에 들어서자마자 내 마음은 벌써 고등학교 동창생 병수나 또 승진 같은 친구들한테 가 있기 일쑤다.

-논산에서 서대전역까지 얼마나 걸려? 오늘 한 번 대전 나들이 할 수 있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기 전에 나는 얼마 전에 논산으로 이사 간 승진을 호출한다. 오랜만에 한 번 대전 나들이를 해보라는 것이다. 혼자 살 집을 찾아 논산으로 내려간 지 하마 1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흔쾌히 동의해 오는 승진을 대전 옛날 중구청 거리 옆에 진로집으로 오라 하고 이번에는 친애하는 병수를 찾는다.

-승진이도 온다구? 그려, 알았어.

병수하고는 매일같이 전화통 붙들고 삼십 분씩 떠들어 대는 사이, 오늘 비도 오는데 승진까지 합류한 게 차라리 이색적이다.

비 오는 진로집에 모여 앉은 세 사람, 둘은 아직까지 홀아비 신세, 오징어두부 두루치기에 보문산 막걸리 놓고 앉아 우리 셋만 있는 듯 떠들어댄다.

승진한테 병수는 꽃씨를 좀 달라 했던 모양이다. 승진은 이 나라 산이란 산은 안 다녀본 데 없는데, 논산 집 마당에 채송화, 백일홍, 해바라기에 사루비아까지 심었는데, 깨며 상추는 또 얼마나 생명력이 드센지 뜯어도 뜯어도 끝없이 솟는단다. 홀어머니 모시고 혼자 사는 병수네 집도 마당 있는 집, 가시오가피 나무가 멋지게 자랐다. 뒷곁으로, 담벼락 밑으로 밭을 일궜는데, 뭐든 병수 손에 걸리면 제대로 안 자라는 것들이 없다.

셋이 모여 떠들다 보니 화제가 어느새 정치 쪽으로 향하는데, 승진은 박 전 대통령을 어찌나 좋아 하는지 기가 막힐 지경이고, 병수는 또 현 대통령을 은근히 쎄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또 나대로 생각 없는 건 아니고.

밖에서는 휴일의 비가 내리는데, 우리는 갑론을박을 하다 말고 막걸리를 부딪치며 서로 웃는다. 사실 우리 사이에서는 그 견해차이라는 것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다. 우리한테는 그렇게 해서 생기는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으니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의식보다는 기질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을 믿는다. 우리는 의식을 넘어 친구로 남을 수 있다.

이런 날, 비가 내리니, 참 좋다. 이 비는 꼭 옛날 우리가 어렸을 때 맞으며 낄낄거리던 그 비인 것만 같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