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손경찬의 대구·경북 人
자연염색박물관 김지희 관장
일본 오사카서 태어나 여덟살 무렵 창원으로 이주
명주 길쌈하던 어머니 영향으로 관심 가지게 돼
서울대 응용미술학 전공 후 도쿄대서 염직 공부
대가대 공예과 교수 맡아 자연염료 연구에 매진
2005년 퇴임 후 사재로 우리나라 최초 박물관 개관
만자 초화문교힐 등 다양한 쪽빛 무늬 천 전시 등
무궁무진한 자연염색의 매력 알리기에 앞장

어머니가 하얀 천에 쪽물을 들이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는 김지희 관장.

파계로를 따라 가면 자연염색박물관 표지판이 보인다. 좁은 샛길로 접어들어 푸른 들녘과 밭고랑 사이의 질서정연한 간격을 보며 길 끝까지 간다. 박물관은 인근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김지희 자연염색 명인이 나와서 반겨주신다. 체험실 입구에 노랗게 마른 홍화가 평상에 가지런히 누워 있다. 홍화 꽃을 보고 싶으면 두어 가지 들고 가서 씨를 털어보라는 말에 체면 차리지 않고 꽃망울이 선명한 가지 하나를 골랐다. 아름다운 홍화의 개화가 기대된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흰옷을 즐겨 입었다. 끊임없이 일손을 요구하는 흰옷을 감당 못한 여인들이 승복에 잿물을 들이듯 염료를 생각해내기에 이르렀다. 여인들은 자연에서 얻은 염료에 흰 천을 담가 색을 들인 후에 옷을 지어 평상복으로 입었다. 옷을 입다 색이 희석되면 뜯어서 염색한 후에 다시 옷을 지었다. 옛 여인들은 자연에서 찾아낸 염료를 옷감에도 입히고 음식에도 입히는 지혜를 발휘했다. 진달래 꽃잎으로 화전을 굽고 뿌리와 가지로 염료를 내는 비법을 어떻게 찾았을까. 치자의 노란 물을 음식에 사용하는 법은 또 어떻게 알아냈는지.

“박물관을 언제 열었어요?”

“2005년에 대구가톨릭대 교수직에서 퇴임하고 사재를 털어서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염색박물관을 지었어요.”

명인은 열악한 한국의 염료세계를 넓게 확장하고, 평생을 기울여 배우고 연구해온 염료의 지식과 경험을 후학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박물관을 지었다고 했다. 직접 뛰어다니며 배우고 익힌 것을 후학들에게 넘겨주고 싶다는 말씀이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온 이의 삶을 대변하고 있었다.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밭이었다고 한다.

“여기다 쪽씨와 홍화씨를 뿌려 가꾸었어요.”

일년초는 그때그때 심지 않으면 단절된다며 그 연세에도 밭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 우리의 어머니들이 살아오신 것처럼 명인의 어머니도 누에를 길러서 명주실을 뽑고, 길쌈으로 명주를 짜내고 염색까지 할 때, 명인은 옆에서 거들고 배우며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고 했다. 어머니가 하얀 천에 쪽물을 들이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며, 풀물에 담갔다 꺼내면 하얀 천이 놀랍게도 초록으로 물든 후 파랗게 변하는 모습이 너무나 신비로웠다고 한다. 어머니와 길쌈하던 노인들이 모두 명인의 스승님이셨다.

 

“거듭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우리만의 것, 자신만의 것이에요.

제자들이 그걸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명인이 된 것도 하늘의 뜻,

내가 알고 있는 좋은 기술을

후학들에게 모두 가르쳐주고

가야 하지 않겠어요"

“어린 시절을 어디서 보냈어요?”

“오사카에서 태어나 여덟 살까지 살았어요.”

일본에서 여덟 살까지 살다 창원 덕산에서 살았다며, 숲이 가깝고 들판에 온통 야생초가 자라고 있어서 일찍부터 자연을 가까이 하고 살았고, 공예과 염색 담당교수로 연구소에 계시며 우리 것에 대한 탐구와 연구를 하고 산 덕분에 자연염료의 세계에서도 토속적인 분위기를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 때문에 활동도 못 하시고, 시간을 어떻게 보내세요?”

“그림을 그려요.”

초등학생일 때 수채화를 그려 유네스코 상을 받았고, 고등학교에서 미술실기대회에 나갔고, 서울대학교에서 응용미술학을 전공했으니 그림에 애착을 가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자연염색 명인으로 살아온 과정이 있으니 마지막으로 평생 연구해본 학문과 경험을 살려 후진들이 자연염색의 세계를 길이 보전할 수 있도록 연구의 사료를 남기는 일도 중요하다며, 자연염색 명인 ‘김지희’만의 책을 낼 의지를 내보인다.

1979년에 김지희 명인은 석사를 마치고 일본 동경대학교 대학원 연구원으로 염직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올 때 쪽씨 다섯 알을 가져왔다. 본래 우리 것이었던 쪽씨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나라가 온갖 풍파를 다 겪느라 남아 있는 게 없었네요.”

“일제식민지와 6·25 같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전통은 무너지고 아름다운 우리 것이 정체성을 잃으며 사라졌어요.”

험난한 세월은 고전 대대로 이어져오던 길쌈 문화와 자연염색의 세계까지 파괴시켰다. 민중의 삶이나 다름없었던 토속적인 문화가 사라지면서 쪽씨조차 말라버려 존재를 찾기가 어려운 점을 생각하고 명인은 자연염색만이라도 우리의 것, 우리나라만의 색상을 되찾기로 했다. 쪽씨와 홍화씨를 땅에 묻고 가꾸며 명인은 본격적으로 염료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정성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염색이 뭐예요?”

“홍화의 붉은 색과 푸른 쪽빛이 가장 예민하고 정성이 많이 들어가요.”

김지희 명인은 자연염색박물관에 사각문교힐, 만자 초화문교힐, 기하문과 호접문의 교힐 재현이라는 이름의 쪽빛 무늬 천을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었다. 홍화와 쪽은 염료가 고와서 자연염색을 하시는 분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한다며 매염제에 따라서 다양한 색상으로 추출되는 자연염색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조곤조곤 들려주신다.

명인은 교직생활을 할 때의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세계 염색가와 말레이시아 학자들과 교류를 많이 했다며, 세계대회 중에 명인은 대나무 잎을 동시에 준비해서 연구를 해보자고 제의했다. 대나무 잎 염색은 신월대의 큰 잎을 사용하는데 동매염을 한다며, 구리가루를 매염제로 사용하면 고운 연두색이 나온다고 한다. 두 나라가 똑같이 대나무 잎에서 염색을 추출한 후 두 번 염색해서 비교 분석하게 되었다. 실험 결과가 어떻게 나왔느냐고 물었다. 연두색의 고운 염료가 추출되었는데 우리 땅에서 자란 대나무 잎이 훨씬 색이 진하고 아름다웠다고 명인이 자랑스러워했다.

그 밖에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에서 염료를 추출하는 과정에 대한 많은 얘기를 들었다. 이끼를 암모니아수에 담가서 색을 추출하면 보라색이 나오고, 억새에서 국방색이 나온다거나, 진달래의 뿌리를 태운 재로 비둘기색이나 회색의 염료를 추출해서 스님이 입으시는 승복을 만든다는 마술 같은 얘기가 끝도 없이 쏟아졌다. 명인은 자연에서 받은 것은 자연으로 돌려줘야 한다고 일러주신다. 색을 추출하고 난 찌꺼기를 땅에 묻어주고, 진달래나무의 뿌리를 뽑는 대신 꽃을 보고 난 후에 잘라낸 나뭇가지로 염료를 추출한다거나, 화공약품이 들어간 매염제는 따로 모아두었다가 수거해가는 사람들에게 보내야 한다는 등, 자연에 대한 사랑이 애틋하다.

“염색을 하며 가장 중심에 둔 철학이 뭐예요?”

“거듭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우리만의 것, 자신만의 것이에요. 제자들이 그걸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명인이 된 것도 하늘의 뜻이라며, 자신이 알고 있는 좋은 기술을 후학들에게 모두 가르쳐주고 가야 한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하고, 자연염료를 복원하며, 제자를 길러내고, 명인 아카데미를 열어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덧붙여 주신다. 사회에 기여할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 명인이라고. 책에 나오지 않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이 필요하다며 문헌이나 책을 참고로 하면 실수가 없는 반면, 새로운 연구와 창의적인 연구에는 실패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하신다. 자기만의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런 실험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말씀이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자연염색이 제대로 정착되려면 각 분야별로 역할이 있어야 하고, 네트워크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사회적인 시스템이 정착되어 있지 않아 연구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허가와 인증을 받지 못하는 애로사항을 겪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하신다. 무엇보다도 네트워크가 이루어져야 소통이 쉽고 연구 과정이 지연된다거나 뜻하지 않게 번거로운 과정으로 인한 좌절을 방지할 수 있고, 학자들의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수 있다고 말 매듭을 지으신다.

/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