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기억 하나. 명절 끝, 큰댁에서 돌아온 엄마의 할머니에 대한 유일한 뒷담화는 ‘밥 많이 퍼라’라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부엌으로 연결된 안방 쪽문 앞에 자리한 할머니는 큰엄마를 비롯한 며느리들이 밥상을 준비할 때면 매번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밥 많이 퍼라.” 쌀이 귀하던 그 시절 손님을 대하는 안주인의 진심은 고봉밥이 대신 말해주었겠지요. 정 많은 할머니식 그 말씀이 엄마와 큰엄마는 그렇게 듣기 싫었답니다.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인데, 매번 부엌문 앞에 바투 앉아 ‘밥 높이’를 관장하시니 성가신 맘이 없지 않았겠지요. 알고 있는데 자꾸 말하거나 좋은 말도 되풀이 하면 잔소리가 되니까요.

며느리였던 엄마의 푸념이 이해가 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할머니의 그 포지션에 더 정감이 가 슬며시 미소 짓곤 합니다. 내남없이 가난하던 시절 밥 인심만큼은 양보하고 싶지 않았던 안주인의 결연한 의지 같은 게 보인다고나 할까요. 살짝, ‘밥 많이 퍼라’의 그 대상이 누구였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십중팔구는 할머니의 사위들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시집 간 딸을 둔 엄마에게 가장 반갑고 귀한 손님은 사위였을 테니까요. 사위에게 야박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은 친정엄마는 없을 것입니다. 밥심으로 살던 시대였으니 오죽했을까요.

이제 밥심이 아니라 다이어트심(?)으로 살아가는 게 더 효율적인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럼에도 귀한 손님에게 고봉밥을 푸는 그 정서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할머니 연세를 훨씬 넘긴 엄마도 당신 사위들이 오면 밥을 봉두(峯頭)로 푸십니다. 할머니처럼 잔정 깃든 잔소리만 하지 않을 뿐 그 옛날의 할머니가 원했던 것처럼 밥공기 가득 주걱 놀림을 하십니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가 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위가 오는 날이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바빠집니다. 평소 남편과 아들에게는 바쁘다는 핑계로 라면밥이나 해주고 시중 김밥으로 때울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딸내미 내외가 온다는 소식에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영끌’해서 없는 솜씨를 발휘합니다. 며느리든 사위든 내 집에 든 귀한 손님이라는 생각에 한 끼라도 제대로 먹이고 싶은 거지요. 보통 때는 그리 즐기지 않던 고기 메뉴에다 밑반찬까지 신경 씁니다. 밥그릇은 기존의 미니 밥공기가 아니라 좀 더 큰 그릇으로 세팅합니다. 당연히 고봉밥을 담습니다. 혹여 체면치레라도 할까봐 처음부터 가득 푸는 거지요. 그래야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집니다. 그 옛날 할머니의 ‘밥 많이 퍼라’라는 말씀이 DNA처럼 대물림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밥을 푸다보면 한쪽에선 또 다른 말씀들이 들립니다. 남편이 말합니다. “제발, 밥 좀 적게 퍼라.” 여분의 밥을 옆에 두면 더 깔끔하다나요. 착하고 눈치 빠른 사위는 적당히 배불러도 그 밥을 더 덜어먹겠지만 어쩐지 그건 제 방식은 아닙니다. 아들까지 남편 편입니다. “엄마, 입장 바꿔 생각해보세요. 제가 결혼해서 처가에 가서 밥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면 엄마 맘이 편하시겠어요?” 많으면 덜거나 남기면 되지 그게 고통일 것까지야 싶은 맘에 순간적으로 욱합니다. 하지만 아들 말에 의하면 그리 쉬운 게 아니라네요. 생각해서 주신 건데 즉각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고 합니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고통을 당한다? 이 부분에서 심장이 덜컥합니다. 얼마 전 교육방송에서 본 강의 장면 하나. 사랑의 관점에 대해서 생각게 하는 부분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두 공기, 세 공기, 한 됫박, 한 말이 아니랍니다. ‘한 공기’면 충분하답니다. 상대가 원치 않는 넘치는 사랑은 타자에게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요지였지요. 한 됫박이나 한 말의 사랑을 주고 싶은 것은 나의 입장이지 상대의 입장은 아니랍니다. 상대는 소박하게 담은 단 한 공기의 밥이면 족한데, 주는 이는 고봉밥으로 두 공기, 세 공기 아니 한 됫박을 주고 싶어 합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만큼을 감지하지 못한 채 오버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도 있다나요.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
소설가

맞는 말입니다. 중요한 건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된 이후에도 고봉밥을 푸는 마음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밥이라면 고봉밥이어야지요. 밥주걱 든 입장이라면 누구나 같은 마음일 겁니다. 줄 게 마땅찮으니 밥이라도 따뜻이 먹이고자 하는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상대도 그 마음을 알고 최선을 다해 밥상 앞에 앉는 거지요.

‘밥 많이 퍼라’시며 부뚜막을 내려 보던 할머니도 사랑이고 말없이 밥을 봉두로 푸신 엄마도 사랑입니다. 물론, ‘밥 적게 퍼라’고 말하는 남편과 아들도 사랑이고 그걸 재바르게 접수하지 못하고 앞선 두 여인을 따라하는 제 마음도 사랑입니다. 그것은 상대의 불편까지는 헤아릴 겨를이 없는, 상대가 원할 것만을 짐작하는 ‘찐’ 사랑입니다.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 그 모든 것을 고봉의 사랑이라 명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