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장마가 이어집니다. 물난리로 전국이 혼란스럽습니다. 7월 장마, 8월 무더위라는 기상 패턴이 무색할 정도로 안타까운 날들입니다. 위험 수위를 넘은 물길은 아량을 모릅니다. 교각을 삼키고 제방을 무너뜨리더니, 순식간에 들판의 경계를 없애고 집들을 고립시킵니다.

그나마 이곳은 장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습니다. 점심 약속을 위해 길을 나섭니다. 비 그친 하늘이 가을날을 앞당겨 놓은 것 같습니다. 좀 전까지 떠올린 ‘위험수위’에 대한 단상이 지워질 정도로 산뜻한 풍광입니다. 갓길에 차를 세워 가없이 푸르고 높은 하늘빛을 맘껏 담는 여유도 부려봅니다.

주유소에 들릅니다. 세차 먼저 하고 주유해도 되나요? 잠깐 갠 날씨 덕에 목소리 톤이 눈치 없이 높았나봅니다. 기름 넣어도 세차 할인은 안 됩니다. 심드렁한 직원의 대답에는 ‘나 귀찮으니 건드리지 마시오’하는 기색이 묻어납니다. 고객에게 같은 말을 수없이 반복했을 터이니 그 정도까지는 이해가 갑니다. 청명해졌다지만 여전한 고습도 날씨 앞에서 한결같은 친절 모드를 유지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 다음이 문젭니다. 단 몇 초 사이, 차창문을 닫을 기회조차 주지 않고 직원은 냅다 차에다 물을 뿌리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전 제스처도 경고도 없는 돌발행동입니다. 쌓인 스트레스를 그런 식으로 고객에게 푸는 모양입니다. 급히 창문을 올려 물세례는 면했지만 썩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사소한 지점에서 손상 받는 거니까요. 무시당한 게 분명한데 화를 내기엔 미묘한 순간이랄까요.

세차기가 돌아가는 동안 크게 쉼 호흡을 합니다. 이어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몇 번 되뇝니다. 십 음절로 된 그 말을 되풀이하다보면 달아오른 얼굴빛이 가라앉고 벌렁거리던 심장도 누그러집니다. 마법의 주문처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찾는 일은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을 건너야 할 때 활용하는 저만의 방법입니다.

점심 장소인 일식집에 도착합니다. 위로 둥근 손잡이가 달린 육수 냄비를 양손에 든 점원이 테이블로 다가옵니다. 얼마나 조심성 없게 들고 오는지 뜨거운 국물이 넘치는 게 다 보입니다. 어이쿠, 어이쿠 조심하라는 신호가 여기저기서 나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기어이 가까이 앉은 제게 육수를 쏟고 맙니다. 뜨거운 물기가 스치자 놀란 개구리처럼 몸이 절로 솟구칩니다.

국물이 원피스 허리춤을 타고 허벅지로 흘러내립니다. 일행들도 놀라 휴지와 행주를 들고 모여듭니다. 한데 아르바이트생인 듯한 점원은 남 일 보듯 “괜찮아요”라는 한 마디가 끝입니다. 이런 일이 대수롭지 않게 일어난다는 듯 테이블 세팅에만 손길을 놀립니다. 맘에 없더라도 미안함이나 겸연쩍음 정도의 액션을 취하는 게 당연한 순서일 텐데 그럴 기미조차 없습니다. 애써 무시하는 품새에서 무례함만 도드라집니다.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서운함을 내비치거나 클레임을 건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게 아니니까요. 스스로 달라질 마음이 없는 자 앞에서 정당한 한 말씀보다 나쁜 충고는 없습니다.

차라리 주인이 그렇게 응대했다면 속 시원히 뭔가를 말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힘없고 스트레스만 많을 ‘을’을 상대해봤자 찜찜함만 남겠지요. 어찌할 수 없는 소심함으로 소탈한 척(실은 허탈하게) 웃었을 뿐입니다. 속절없이 예의 무궁화꽃송이만 피웁니다.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그렇게 가라앉히다보니 덴 피부의 열감도 숙지고 속도 편안해집니다. 주유소 직원이든, 일식집 점원이든 그들이 보기에 상대가 긴장할 만한 대상이었다면 그토록 투박하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위압적인 느낌을 주거나 사회적 지위가 검증된 이들 앞이었다면 한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을 테고, 손님 입장에서 불쾌한 상황으로 이어지지도 않았겠지요. 혹여 실수로 그런 그림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금세 실수를 인정하고 미안함을 표현했겠지요.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
소설가

큰 것 앞에 작아지고 작은 것 앞에 커지며, 큰 것에 분노하는 일보다 작은 일에 흥분하기 쉬운 게 인간입니다. 들고 일어설 때는 물러나고, 물러서도 좋을 때 일어나는 게 인간의 속성이구요. 삶은 달콤함 못지않은 위험수위의 연속입니다. 을의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위험수위 근처에 다다른 을의 스트레스가 갑에게 맞닿기보다 엇비슷한 다른 을에게 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씁쓸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작은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마음을 다칩니다. 그것이 곧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연습하고 연습하는 이유가 될 테지만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스스로 하는 무궁화꽃 술래놀이의 필요충분조건은 누가 뭐래도 작고 사소한 세계에 한합니다. 사무치도록 화가 쌓인 경우, 이를 테면 그것이 갑을 향한 것이라면 정공법을 택해야겠지요. 그땐 맞서고 부딪치는 일만이 온당할까요. 날씨 탓이든 상황 탓이든 이 세상 모든 을들이 스트레스 덜 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수위가 낮아지듯 무궁화꽃 주문을 되뇌는 날도 줄어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