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상루와 두솔원 재사

진성이씨 두솔원 재사.
진성이씨 두솔원 재사.

선조의 묘를 지키고 제사 지내는 재사(齋舍)는 조상숭배가 삶의 일부분인 조선시대는 어떤 가치기준보다 우선했다. 또한 거대한 문중의 단합과 세 과시도 된다. 여러 제도와 가치기준이 변해도 조상숭배만큼은 형식적이라도 이어질 것이다. 안동은 어느 지역보다도 혈연으로 연결된 강한 유대감과 조상숭배는 거의 종교적인 수준이라 유독 재사가 많다.

#. 진성이씨 도솔원 재사

하늘도 코로나에 감염되었는지 예전 같지 않게 지리한 장마가 이어지고 있다. 전국적인 장마로 경주 집을 나설 때도 빗방울 정도였는데 영천, 군위, 의성을 지날 때는 쏟아지는 폭우에 모든 차들은 토끼같이 달리다가 순한 양이 되어 두눈을 껌뻑껌뻑 거북이같이 아니 두꺼비처럼 엉금엉금 기어갔다. 빗속의 전쟁이었다. 방송에서는 특집으로 물난리를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한때라고 서안동 IC를 빠져나와 학가산 온천 길 접어들자 큰 울음 터뜨렸던 하늘의 눈물도 그쳤다. 푸른 초록의 물결이 싱싱한 여름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얼마 안가서 왼편 길옆에 송원군 묘소 입구를 알리고 유허비 지나자 곧바로 두솔원 재사가 나온다.

두솔원 재사(兜率院齋舍)는 진성이씨 안동 입향조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隋)의 묘소를 지키고 묘제를 받들기 위한 재실이다. 건물이 전체를 사각으로 빈틈없이 감싼 북부지방의 특징으로 1천700년대에 옮겨온 건물인데 최근에 보수를 해 놓았다. 얼마나 건물이 낡았는지 옛 부재는 드문 드문 보일 정도다. 재실건물들은 묘소에 재를 지내기 위한 공간이라 1년에 한두 번 모이는 장소이기에 빈집을 관리하는 격이라 빨리 손상된다.

이 소박한 건물 처마 밑에 앉아있는 인상 좋은 아저씨께 묘소까지 거리가 얼마쯤 되는지 물었다. 300m 정도라 하여 우산 들고 올랐다. 시멘트포장 끝나고 수풀 우거진 산을 조금 오르자 ‘청초 우거진 골’이 아니라 잡초 무성하게 허리만큼 솟아 아래위 무덤은 윤곽이 드러나지 않고 석물과 비석만 풀밭에 솟아있었다. 강한 비 내린 뒤라 산새도 우짖지 않고 길옆에 두꺼비 한 마리가 엉거주춤 걸으며 온 산천을 지키고 있었다.

 

진성이씨 송안군 이자수 묘.
진성이씨 송안군 이자수 묘.

#. 홍건적과 송안군 이자수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 백성은 고통스럽다. 유럽이나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장구한 역사의 중국도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로 큰 고통을 당하는데 송나라를 멸망시킨 몽고족의 원나라 지배하에 고려도 부마국으로 전락하였다. 원나라는 몽고인을 최상으로 두고 그 밑에 몽고족을 보좌하는 색목인(色目人)을 두고 최하로 한인(漢人)과 남인(南人)을 두고 통치했는데 특히 남인은 몽고에 끝까지 저항한 남송사람들이라 더욱 핍박받았다. 자연재해가 나면 지금처럼 토목의 장비가 없을 때 인력으로 복구할 수밖에 없다. 1351년 대홍수로 범람한 황하의 수리로 수많은 농민들이 징발되어 민심의 동요를 일으키자 이 틈을 타서 한족의 송나라를 부흥한다는 기치를 걸고 백련교라는 비밀결사대를 기반으로 홍건적의 난을 일으킨다.

홍건적은 백련교와 세상을 구제한다는 미륵교 신자들이 동지의 표시로 붉은 천 조각으로 머리를 싸매어 홍건적이라 불렀다. 우리나라 동학군같이 대부분 농민들로 구성된 홍건적은 처음에는 세력을 떨치다가 관군에 의해서 진압되고 끝까지 살아남은 주원장은 결국 원을 무너뜨리고 한족의 명나라를 세운다. 이 홍건적이 관군에 쫓겨 만주로 후퇴하여 2차에 걸쳐 고려를 침략한다.

1359년(공민왕 3년)에 4만의 홍건적이 평양까지 함락한다. 그러나 이방실, 안우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추격으로 거의 궤멸시켰다. 이후에도 홍건적은 수군(水軍)으로 황해도, 평안도 해안을 침입하다가 1361년(공민왕 10년)10월에 10만의 홍건적이 2차로 침입한다. 이때 수도 개경이 위험하자 공민왕은 피난길에 오르고 개경은 함락되어 수개월동안 잔학함을 당해야했고 원주까지 함락당한다. 12월에 복주(안동)까지 피난 온 공민왕은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임명하여 홍건적 토벌에 나선다. 정세운은 이방실, 안우, 김득배 장군들과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한다. 이때 이성계는 사병 2천명을 이끌고 적장 사유 등의 목을 베는 등의 큰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낸다.

진성이씨는 진보현(청송 진보면)의 토착 향리였다가 시조격인 이석이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의 큰아들 이자수(~1365~)는 고려 공민왕 홍건적의 침입 때 고려 조정은 군대에 공을 세운 관료들에게 봉군, 통헌 등의 명예직(첨설직)의 벼슬을 주었다. 이자수도 진보현의 향리였는데 정세운 장군을 따라 큰 공을 세워 송안군에 봉해져 신분이 높아졌고, 세습으로 내려오던 향리(鄕吏)도 면하고 판전의시사의 벼슬도 지냈다. 이자수는 안동 입향조가 되어 퇴계 이황 같은 큰 학자가 나와 수는 많지 않아도 진성이씨(진보이씨)는 양반으로의 기반을 단단히 구축한다.

 

안동 김씨 이상루.
안동 김씨 이상루.

#. 재사 이상루

안동의 중요한 문중의 재사는 안동 서쪽 서후면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그것은 음택, 양택의 조건이 좋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선조가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린 깊은 인연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두솔원을 지나 서후면 사무소 가는 길에 안동 장씨. 풍산 유씨 재사가 연거푸 있고 경당 장흥효 고택이 도로에서 보이고 그 옆에 성곡 전원마을이 있다. 조금 지나면 서후면 사무소가 나오고 오른쪽 남으로 조금 가면 옛 경당 고택이 있었고 광풍루 정자가 쓸쓸히 있다. 조금 아래로 가면 학봉 종택과 간재 종택, 사육신 단계 하위지 고택 그 아랫마을은 관물당 권호문 고택과 청성서원이 있다. 면사무소에서 왼쪽 북으로 가면 신라고찰 봉정사 가는 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봉정사가 나오고 우측으로 200m만 가면 이상루가 길옆에서 안내한다.

 

이상루 누마루.
이상루 누마루.

이상루(履霜樓)는 직역하면 밟을 리(履)에 서리 상(霜)자를 써서 ‘서리를 밟고 서 있는 위풍당당한 루(樓)’라는 뜻으로 의역하면 돌아가신 조상의 얼을 찾고 뿌리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학문과 덕행, 나아가 충효가 뛰어난 선조에 대해 제사지내는 건물이 재사인데 여기 이상루는 안동김씨 시조 김선평의 묘소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건물이다. 1750년(영조 26년)에 건축했고 지금의 터에는 1793년(정조 17년)에 28칸으로 길게 중건햐였다. 일부 건물과 루는 옮겨지었다. 이상루는 재사 건물이면서 누의 건물이 인상적이라 답사할 때 들리곤 하는 곳이다. 지난주에 왔을 때는 고택체험도 하기에 개방되어 있어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다. 단청 칠한 것과 천태암(天台庵)현판이 있어 예전에 천태암 절을 폐하고 이 건물을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천민에 속했던 승려들은 양반의 노비와 비슷했기에 절을 순순히 빼앗겼을 것이다. 더구나 조선을 떨게 했던 풍양 조씨와 세도정치의 대명사 안동 김씨 문중에 스님들은 양반처럼 에헴 소리도 못 내고 눈물을 머금고 절을 두고 떠났을 것이다. 그래도 천태암 현판은 달아 놓았으니 일말의 양심은 있어 다행이다.

혼자서 찬찬히 둘러보는데 점잖은 분이 나오신다. 안동김씨 후손인줄 알았는데 타성인데 10년 전에 수리하여 고택 숙소로 운영하는 이신자 관장님이다. 앞으로 5년만 더하고 그만 둘 생각이란다. 그때가 80살이 된다하시는데 스스로 80을 정년으로 택한 삶이다. 여기서 생활하다가 안동시내 집에 가면 답답하다고 하신다. 그런데 세찬 비 오는 오늘은 문도 잠겨 사람도 없고, 산새들도 고요히 숨어 골짜기 물 흐르는 소리가 적막을 깨운다.

 

안동 김씨 시조 김선평 묘.
안동 김씨 시조 김선평 묘.

#. 안동김씨 김선평의 묘

김선평의 묘를 예전에 보았던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오늘 다시 찾았다. 문 닫힌 이상루 앞을 지나 산허리 휘감듯이 조금 오르면 묘소가 있다. 경사진 산길 오르는 계단을 온통 장대석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장인이 사라진 우리시대 혼히 없는 업자들의 작품이라 곳곳에 일그러져 있다. 석물에다 잔디로 잘 단장하여 왕릉같이 해 놓았다. 묘 옆에는 처참하게 부러져 누워있는 두 소나무가 묘한 여운을 준다. 검소한 진성이씨 이자수 묘와 화려하게 단장한 김선평 묘의 상반된 모습에 많은 생각에 잠긴다. 잔디를 심어 언제나 이 모습이고 이자수 묘는 일반 풀이라 잡초 무성하지만 때가 되어 벌초하면 깔끔해진다. 불교에서 마음공양이 최고이듯이 기리고 흠모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극한 마음이다.

안동김씨 시조 김선평은 어떤 사람인가.

후삼국이 각축을 다툴 때 고려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보다 열세였기에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다. 특히 신라 경애왕을 죽인(927년) 견훤과 공산전투에서 왕건 옷으로 변장한 신숭겸을 비롯한 8장수들이 순국(이때부터 공산을 팔공산이라 했다)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왕건이었다.

왕건은 전열을 가다듬어 930년(경순왕 4년, 태조 13년)) 고창(안동) 병산전투에서 8천명의 후백제 견훤의 군사를 함몰시켜 결정적 승기를 잡는다. 고창성주 김선평과 장길, 김행이 향군을 이끌고 왕건을 도왔기 때문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김선평에게 안동 김씨, 장길에게 안동 장씨, 김행에게 안동 권씨를 하사하고 삼태사로 모셨고, 고창은 안동 도호부로 승격시켜준다.

그러나 숨은 공로는 안동의 안중구(安中嫗)라는 할머니가 독한 고삼(苦蔘)술을 빚어서 적장에게 취하게 한 뒤에 총공격하여 승리했다고 한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2·12 쿠데타때 반대파 장군들을 술 마시게 한 뒤 했던 것과 같이 술이 역사의 줄기를 바꾼 것은 너무나 많다. 장보고, 전봉준, 신돌석도 술에 죽어간 영웅들이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