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
⑦ 불국사와 석굴암

화려함과 절제를 동시에 간직한 불국사의 풍경.
화려함과 절제를 동시에 간직한 불국사의 풍경.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중년들 중 경주에 관한 추억 한 조각 없는 사람이 있을까?

분명 없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박철화 역시 마찬가지. 그는 1981년 경주 수학여행의 추억을 떠올리며 ‘서라벌의 보물’로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목했다. 신라와 신라인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원고를 아래 싣는다.

필자인 박철화는 서울대 불문과와 프랑스 파리 8대학·10대학에 공부했다. /편집자 주
 

경주 수학여행의 대표적인 장소로 유명한 ‘불국사와 석굴암’
자연과 인위, 무심함과 정교함, 화려함과 절제, 위엄과 겸손까지…
찬란한 불교예술·뛰어난 건축기법 등 세계문화유산으로
푸른자연 품은 깔끔하게 정돈된 경내… 신라문화역사 고스란히

고교 2학년 가을. 내가 경주 수학여행을 가기로 한 것은 불국사가 아니고 순전히 바다 때문이었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

강원도 내륙 도시 춘천에서 나고 자랐기에 그때까지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사진을 통해서나 불과 몇 달 전 시작한 칼라TV 방송에서 간접적으로 파란 바다를 보긴 했다.

태어나서 내내 온 사방을 둘러싼 산을 보며 자란 내게 바다는 놀라우리만큼 단순하고 명쾌한 풍경이었다. 상당한 시각적 충격이었는지 그 풍경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당시 감기 끝물에다 장염에 시달리던 내가 약을 복용하면서까지 수학여행에 참여하기로 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가는 길은 지루했고, 중간에 들른 장소들은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바다만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버스 안에서 경주와 신라의 문화에 대한 선생님들의 소개가 있었다. 하지만 10대 후반 소년들에게 그 말이 들어올 턱이 없었다.

 

일출 무렵의 불국사.
일출 무렵의 불국사.

알에서 사람이 태어나는 신비한 설화나, 하얀 피를 뿌리며 순교하여 이 땅에 불교를 받아들이는 전기를 마련했고, 그 불교문화의 찬란한 중심지가 바로 경주여서, 이번 수학여행의 목표가 그런 유적들을 둘러보는 것이라는 이야기 등등.

그런데 대체 그게 시커먼 교복을 입고 한 반에 70명 넘게 구겨 앉아 있다가 풀려난 우리들의 청춘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떼로 몸을 뒤틀며 우리는 저녁 무렵 경주에 도착했고 여관에 짐을 풀었다. 첫날은 경주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불국사를 거쳐 감포 문무대왕릉과 울산 조선소 탐방의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10대 후반의 고삐 풀린 청춘들이란 어디서나 본능적으로 이성을 찾아간다. 좁은 버스 안에서 몸을 비비꼬다가 간신히 풀려난 우리들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엇비슷한 시간에 버스에서 내린, 건너편 여관에 묵을 여고생들이었다. 전주에서 왔다는 그 여고생들에게 친구들은 선생님들 눈을 피해 수작을 걸었다. 키가 180cm 가까웠던 나는 얼굴마담 노릇하느라 앞에 섰고 ‘말빨’ 좋은 친구가 곁에서 여학생과의 약속을 받아냈다. 경주의 첫인상은 그러했다.

문제는 내가 저녁을 먹자마자 약을 먹고 인솔교사 방에서 잠이 들어버린 거였다. 그 사이 친구들은 선생님들의 철벽 방어를 뚫고 몇몇이 몰래 나가서 여학생들을 만났는데, ‘신라의 달밤’이 신통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다음날 아침 컨디션을 회복하고 나타난 내게 책임지라며 투덜거린 것을 보면. 그 가운데 한 여학생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펜팔 요청 쪽지를 건네받았지만 그걸 간직하지 않았다. 바다가 보고 싶어서 온 여행이었다. 아침 먹고 올라온 불국사 경내 어딘가에서 그 쪽지를 버렸다.

그것은 황홀한 아름다움에 대한 경배였다. 나는 불교도가 아니어서 절에 간 경험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아버지가 재직한 관할 면의 소양댐 안 청평사 정도에 가봤을 뿐이다. 그런 내 눈에 불국사와 석굴암은 놀라움 자체였다. 자연과 인위, 무심함과 정교함, 화려함과 절제, 위엄과 겸손까지…. 무엇 하나 보태고 뺄 것이 없었다. 짧은 인생 경험으로 보기에도 가장 완벽한 미의 원형이었다. 내가 그 여학생의 쪽지를 버렸다는 말은 그러니 수정되어야 한다. 정신이 팔려서 아예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는 기억조차 못하고 잃어버렸다. 석굴암을 나와 부지런히 혼자 다시 찾아가 둘러본 석가탑과 다보탑, 그리고 불국사를 품고 있는 산부터 경주의 모든 것이 지워지지 않는 의미가 된 것이다.

그날 아침 이후로 수학여행의 의미가 바뀌었다. 바다가 뒷전이었다. 물론 처음 본 바다가 놀랍지 않을 리 없다. 모래, 바다, 하늘로 선이 그러진 3등분의 세계는 굳이 표현하자면 미니멀리즘의 극치였고, 마크 로스코(Mark Rothko) 추상회화의 원조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숨결이 들어 있지 않다. 인공낙원의 향취가 없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가는 길에 본 감은사지 석탑 주변 쇠락한 삶의 자취, 인위적 흔적의 황량함이 더 인상적이었다. 감포 끝자락에서 본 문무대왕릉도 놀랍긴 했지만 이미 불국사와 석굴암에 마음을 빼앗긴 내게는 역사적 사연 가득한 자연물 정도였다. 그 점은 경주를 지나 울산 조선소에 가서 본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을 능가하는 배가 품은 산업화의 근대문명을 마주하면서 이번에는 그 과도한 인위에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 정도로 불국사와 석굴암은 최선의 조화를 이룬 이상적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때로 생각한다. 예술적이지 않은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한 내가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왜 문학과 예술을 전공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물론 타고난 기질이 있었겠지. 하지만 그 기질도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면 그토록 두드러지게 발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 불교 예술의 절정’이라 평가받는 석굴암 본존불.
‘신라 불교 예술의 절정’이라 평가받는 석굴암 본존불.

돌이켜보면 1981년의 수학여행은 내게 아름다움에 대한 원초적 동경을 심어준 계기가 아니었을까? 기질이 화약이라면, 불국사와 석굴암과의 만남은 영혼의 뇌관이었던 셈이다. 그 뒤로 경주는 늘 내 영혼의 처소 깊숙한 곳에 머물다 호출되곤 했다. 박물관에서 전시를 보다가, 책을 뒤적이다가 경주가 나오면 나는 곧장 그 수학여행의 아침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프랑스문학을 전공한 터라 대학을 마치고 유럽에서 몇 년 더 밀린 공부를 하기 위해 머물렀다. 현대시가 전공이었지만 미술과의 관계를 다루는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부를 핑계로 유럽 곳곳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돌아다녔다. 물론 유럽은 놀라운 곳이다. 근대문명을 만든 주인공들답게 규모와 아름다움에서 우리 것을 능가하는 문화유산이 곳곳에 있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고 내 핏속에는 우리의 역사와 자연에서 우러난 개별적 미의 원형이 있다. 그래서 그들의 휘황한 문화유산 앞에서도 나는 기죽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한가운데에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

지금이야 많이 알려졌지만 1990년대만 해도 유럽인들에게 한국은 동아시아 한구석의 크게 의미 없는 존재였다. 중국의 스케일과 일본의 경제력과 정교함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한국은 어떤 나라인지 거의 몰랐다. 우리가 한글이라는 독자적 언어를 갖고 있다는 것에도 놀랄 정도였다. 그래도 가끔 한국을 궁금해하며 가보려는 외국인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언제나 경주를 권했다. 내가 박가여서 신라 왕족의 후예라는 허풍 섞인 이야기까지 얹어주면 순진한 그들은 마냥 좋아했다. 그리고 돌아온 반응은 놀랍다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까지 갈 정도면 아시아 문화와 예술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가진 유럽인이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라는 찬사가 거의 다였다. 경주 남산의 석불들, 대릉원, 곳곳의 폐사지들…. 그 가운데서도 압권은 불국사와 석굴암이었다. 유럽 문명의 후예로 그들 나름의 미적 기준을 갖고 있는 개성 중시의 외국인들에게도 불국사와 석굴암은 부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들의 반응은 단순한 이국 취향에 머물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박철화.
문학평론가 박철화.

신라 천년왕국이 빚어낸 한국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이 만나는 이상적 아름다움의 뚜렷한 증거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유럽에서 돌아온 뒤로 여러 번 경주에 갔다. 보문단지의 벚꽃, 감포 문무대왕릉, 찰주에 보름달이 걸리던 심야의 감은사지, 용장사곡 삼층석탑처럼 남산에 숨어 있듯 남은 다 닳은 석탑과 석불들….

거기서 쇠락한 문화의 쓸쓸함에 전염되기도 했지만 나는 늘 불국사와 석굴암의 정돈된 아름다움, 인간의 세속적 삶을 넘어 종교의 영원한 성스러움이 번져나가는 그 자리의 끈질김과 단단함에서 영혼의 기운을 얻곤 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는 거의 40년 전 아침, 불국사 마당에서 듣던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